[연재소설] 추징금을 털어라 (5)

전직 대통령의 집을 터는 간 큰 도둑 이야기

검토 완료

김성룡(ufoi)등록 2005.10.03 21:27
지요한이 이 사건을 맡은 건 석철에겐 대단한 불행이었다.

팬티에 럭셔리하게 수놓은 황금빛 장미 자수가 진짜 금 일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석철은 마냥 황홀했다.

S양은 다른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재벌 3세와의 교제는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도 황금 팬티에 관해서는 대중을 의식한 듯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발뺌했다. 때문에 석철은 두어 달만 조용히 숨어 지내면 사건은 곧 잊혀 질 거라고 생각했다.

CCTV에 찍힌 모습 때문에 석철의 신분은 쉽게 드러났다. 수사는 비공개로 진행되었으며 지요한은 숨어있는 석철을 끌어내기 위해 묘안을 짜냈다. 모 방송국에서 도시 빈민층의 비참한 삶을 그린 다큐멘터리가 제작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지요한은 산동네에서 살고 있는 석철 아버지의 생활상도 함께 취재해줄 것을 요청했다.

다큐멘터리는 정확히 사건 발생 두 달 후 전국적으로 방영되었다. 다 쓰러져 가는 산동네에서 한 쪽 다리를 절며 힘겹게 비탈길을 오르는 아버지의 주름 패인 얼굴을 보는 순간 잊고 지냈던 아버지에 대한 연민이 석철의 가슴을 울렸다. 비록 자신에게 해 준 것은 별로 없었지만 아버지는 참 불쌍한 사람이었다.

5.5공 시절 노상방뇨 한번 잘못했다가 오청 교육대에 끌려가 육 개월 동안 죽을 고생을 하다 다리병신이 되어 나왔다던 어린 시절 아버지의 술주정을 석철은 기억하고 있었다. 매일 같이 억울한 마음을 술로 달래던 아버지를 견디다 못해 어머니는 집을 나가버리고 말았다.

지요한의 예상한대로 방송이 나간 후 한 달이 되어갈 무렵 아버지가 살고 있는 산동네에 석철이 나타났다. 지요한이 파놓은 덫에 걸리고 만 것이다.

5년이 지났지만 석철은 지요한을 증오했다. '상대의 약점을 교묘히 이용하는 비열한 인간' 그것이 석철의 뇌리 속에 각인된 지요한에 대한 감정이었다. '상대방의 약점을 최대한 이용하라' 그것이 지요한식 수사방법의 핵심이었다.

석철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지요한은 온갖 협박과 회유를 해보았지만 석철이 지요한의 계획에 순순히 응할 리 없었다.

'사형? 그래 죽여봐. X발! 죽일 수 있으면 죽여보라고? 그깟 몇 천만 원 훔쳤다고 사형을 시켜?'

석철이 배 째라는 식으로 소리를 질러대자 오히려 놀란 것은 지요한과 범식이었다. 초범인 범식은 빌어도 시원치 않을 판에 현직 검사 앞에서 석철이 소리를 질러대자 여간 불안한 것이 아니었다.

'좋아. 내가 너 사형은 못 시켜도 평생 콩밥 먹게 해준다. 강, 절도에 살인미수, 특수강도 그리고 니 친구도 최소한 5년은 콩밥이다.'

'아주 소설을 쓰지 그러세요? 검사님. 누굴 병신으로 아세요? 나야 짧으면 5년 재수 없으면 10년 살 테고 이 새끼는 초범이니까 집행유예 받을 테고'

'너 여기가 어딘 줄 알아? 없는 죄도 만들 수 있는 곳이야. 함부로 까불지마라.'

'아.. 그러세요? 그러니까 한 번 해보시라니깐요?'


지요한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삯이며 말을 이었다.


'이번 일 없었던 걸로 처리해 줄 테니까 좋은 말로 할 때 협조해라.'

'검사님. 저 그냥 평생 콩밥 먹을게요.'

'이번 일 성공하면 너 완전히 뜬다. 국민적 영웅 되는 거야. 임마.'

'만약에 성공 못하면요?'

'그렇더라도 대한민국 범죄사에 길이 남을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거지. 죽이지 않냐?'

'그럼 검사님이 직접 하세요.'

'이 자식이.. 너 이렇게 비협조적인 이유가 뭐야?'

'아니 그럼 어떤 미친놈이 경찰들이 24시간 지키고 있는 집을 털러 들어간답니까? 나 잡아가쇼. 그러는 거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런 건 걱정하지 마라. 다 계획이 있다.'

'계획이고 뭐고 관심 없으니까 빨리 콩밥이나 먹게 해주쇼.'

'내 계획을 들으면 너도 생각이 바뀔 거다. 한 번 들어 봐라.'

'관심 없다고요. 관심 없다는데 왜 자꾸 그러세요? 검사님?'


석철이 짜증을 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석철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판단한 지요한은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보라며 일단 한 발 물러섰다. 그렇다고 결코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다음날 오후 취조실에서 석철과 지요한의 단독 면담이 시작됐다. 그런데 웬일인지 지요한 답지 않게 풀이 죽어있었다.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던 지요한은 더 이상 석철을 설득할 수 없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한 동안 말도 하지 않은 채 우울한 표정만 지었다.

그러다가 지갑을 꺼내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갑자기 눈물까지 흘리는 것이 아닌가? 지요한의 갑작스런 행동에 이번엔 석철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석철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쭉 내밀어 지갑을 보았다. 지갑 속엔 지요한의 딸과 아내가 함께 찍은 사진이 꽂혀있었다.


'내가 미친놈이다. 미친 놈. 그렇지 않냐?'


지요한이 자조 섞인 말로 물었다.


'왜 그러세요? 집에 무슨 일 있으세요?'

'오늘 아침에 총장님이 전만희 사건 해결 못하면 옷 벗으라고 그러더라.'

'....'

'조직이라는 데가 더러운 곳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X같은 줄 처음 알았다.'

'뭘 그런 걸 가지고 걱정하세요? 변호사 하시면 되잖아요?'

석철은 진심으로 걱정스러웠다. 석철은 어느 새 분위기에 취해 인생 상담사나 된 것처럼 지요한을 위로하기 시작했다.

'검사질 그만두는 날이 내 초상 날이다. 너도 잘 알겠지만 내가 잡아넣은 놈이 어디 한 둘이냐? 명절 때마다 우리 집으로 배달되는 식칼이랑 작두가 몇 갠 줄 아냐?'


지요한의 말은 결코 과장이나 엄살이 아니었다. 그 점은 석철도 잘 알고 있었다. 교도소에 있을 때 가끔 백상어파 두목 백상민과 같은 조에서 교도작업을 할 때가 있었다. 백상민은 입버릇처럼 지요한을 쑤셔버리겠다 거나 파묻어버리겠다고 말하곤 했었다. 지요한 외에도 웬만한 강력부 검사들이 매년 겪는 일이기도 했다.


'시골 같은 데로 숨으면 어떨까요?'

'그런다고 걔네들이 못 찾아낼 것 같냐? 그리고 자식 교육문제도 있고.. 하나 밖에 없는 딸 강남에서 중고등학교는 다니게 해야지'

'...'

'솔직히 나 죽는 건 괜찮은데 나 없이 살 마누라랑 애새끼 생각하니까 미치겠다.'

'그러지 마시구요. 보험하나 드세요. 요즘 생명보험 좋은 거 많이 나왔던데.. 저도 하나 들었거든요. 노후 대비해서.. 평생 도둑질만 할 순 없잖아요.'

석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지요한이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울기 시작했다. 석철은 자신의 말실수 때문이라 생각하고 더 당황해했다. 그 때였다. 지요한이 무릎을 꿇더니 석철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애원을 하는 것이 아닌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인데도 석철은 믿겨지지가 않았다


'윤석철. 한번만 도와 줘. 한번만.. 나 진짜 씨발 죽기 싫거든. 윤석철! 한번만 살려주라. 응? 윤석철.'


현직 검사가 도둑놈 앞에 무릎 꿇고 도둑질을 해달라고 애원하는 꼴이라니.. 석철은 어쩔 줄을 모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요한은 자존심이고 뭐고 다 내던진 채 석철에게 매달렸다. 한 번 눈물이 터지자 억지를 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감정에 몰입 되었다. 지요한은 더욱 더 처절하게 애원했다. 이미 걸레만도 못하게 추락한 자존심을 보상받기 위해서라도 이번에 아주 끝장을 볼 작정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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