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트] 해운대로 가는 막차

'딸애는 알리바이가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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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수(kss4321)등록 2005.03.30 16:00
서면에서 해운대행 지하철에 올랐다.
막차가 아닐까.
하루의 나른함이 곳곳에 배여 승객들은 다들 멍하니 앉아 있었다.
취객들의 흔적들도 듬성듬성 눈에 부딪친다.
나는 자세를 고쳐 잡았다.

출입구 옆에는 두 젊은이만이 서 있었다. 빈자리가 많은 데도....
대학생으로 보였다.
남학생은 다소 요란한 운동복에 노랑머리를 하고 있었다.
까만 머리의 여학생은 그에게 의지하는 편이었다.

주위 사람들은 그들에게 별 시선을 주지 않는다. 스치고 마는 정도였다.

어느새 남학생의 한 팔은 여학생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속삭이며 다정해 보였다.

가만 보니, 나 혼자만이 그 장면에 관심이 있어 보였다.

좀 그러했다.

내 옆자리 학생에게로 눈을 돌린다.
그는 영어 책을 보고 있었다.

두 남녀는 다시 나의 눈을 당긴다.
이번에는 그 여학생의 얼굴을 더 자세히 볼 수 있게 되었다.

'누구더라? 그래, 영수가 아닌가!'

친구의 딸이었다. 분명히 '영수'였다.
긴가 민가 다시 그녀를 뜯어보았다.
2, 3년 전에 본, 그 전에도 한 두어 번 본 친구의 딸이다.

'벌써 저렇게 컸나?'

다행히 그녀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불안했다.
주변사람들이 오히려 나를 보는 것 같았다.
눈을 돌린다.
앞 창문에 비친 옆 사람들의 표정들을 훑어본다.

열차가 몇 역들을 불안하게 더 가서야 그들은 손을 잡고 내렸다.
시립미술관 역이다.

'어떤 관계일까?'
'친구에게 다 말해 버린다!'
'내 말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일까?'

'오히려 풍파를 일으키겠지.' 고민이 되었다.

그 날 저녁 잠자리에서, 나는
아이들의 놀이터에 모래나 뿌리는 한심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며칠 후 그 친구를 만났다.
시원한 맥주가 전신을 얼얼하게 적시고 있었다.
나는 그 노랑머리가 문득 생각났다.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야, 너 딸, 지하철에서 봤다. 녹녹하게 데이트하던데."
"정말!"

"남자는 머리를 노랗게 염색했더라"
"............"

그 다음날, 그 친구한테서 뜻밖에 전화가 왔다.

"영수는 그때 지하철을 안 탔단다. 알리바이도 있고....."

한방 먹은 기분이었다.

"그래, 알았어. 그 날 내가 착각했을 거야. 미안해, 벌주로 한 턱 낼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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