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무간도>와 <독도>

영화 [무간도1]과 독도, 친일의 문제

검토 완료

김종성(연암박지원)등록 2005.03.29 12:24

양조위와 유덕화(왼쪽부터) 경찰과 범죄조직원인 그들이 서로 스파이가 되면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 김종성






숨막히는 긴장. 처음부터 끝까지 숨을 크게 내쉴 수 없었다.

어떻게 2번 보는 영화가 이토록 숨막힐 수 있을까? 영화 무간도1은 완벽한 시나리오, 푸른 빛깔의 우울한 영상, 느낌이 그대로 전달되는 배우들의 연기력, 감성을 타고 흐르는 음악...

등 과연 홍콩 느와르의 부활이라는 말이 전혀 손색없는 수작 중에 수작이다.




무간도는 ‘바르게 번뇌를 끊는 도’를 뜻한다. 스파이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범죄조직 보스를 제거하고 상대방의 비밀 기록을 없애려는 경찰신분의 유건명(유덕화)과 유건명의 정체를 밝혀 떳떳한 경찰이 되려는 진영인(양조위), 두 사람 모두가 하고자 하는 바가 `무간도[無間道]`인 것이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정체성에 혼돈을 느끼며 괴로워하고 있다.




영화의 전제는 간단하다. 10년 전 두 사람이 경찰학교 입학하게 되는데 한 사람은 조직원의 신분으로 경찰조직에 잠입하기 위해 경찰이 되고, 한 사람은 경찰의 신분으로 범죄조직에 잠입하기 위해서 조직원이 된다. 여기 중요한 점은 두 스파이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조직의 보스와 경찰국장 뿐이다. 두 스파이는 10년의 시간이 흘러 둘 다 각 조직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중요한 사건 앞에 자신이 속해 있는 조직의 이익을 위해 정보를 흘린다. 그렇지만 이내 두 조직의 보스는 정보가 세어나가고 있음을 직감한다.




여기서부터 극의 긴장감은 점점 고조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갈등이 심화되어가다가 경찰국장의 죽음으로 그 긴장감은 극을 향해 치솟는다. 이제 자신이 경찰임을 아무도 알 수 없게 된 진영인(양조위)의 연기는 심장이 멈춰버릴 듯 냉정하고 우울하다.



양조위, 그의 표정만으로도 영화의 화면은 가득 차는 것 같다. ⓒ 김종성





이 영화는 우리에게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정체성이란 것은 본질적인 것인가? 해석되는 것인가?

나는 경찰인가 조직원인가? 혹은 나는 조직원인가 경찰인가?




진영인(양조위)는 전과 8범에 2번의 형기를 마치고 완벽한 조직원이 되어 보스의 심복이 되어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며 괴로워한다. 그는 자신에게 친절히 대해주는 정신과 여의사에게 농담처럼 진실을 이야기한다.

(대사)“비밀을 이야기 해 줄께요... 나 실제로는 경찰이에요.”

그러나 여의사는 믿지 않는다.

(대사)“나도 경찰이에요...”




진영인(양조위)는 그 혼란 속에서 경찰국장의 죽음을 경험한다. 이제 어느 누구도 자신이 경찰임을 확인해 줄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이렇게 다른 이의 기억 속에 자신의 정체성이 없어질 때 그는 존재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없겠는가?

더 나아가 본질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인가?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며 적어도 나의 존재가 드러나는 것은 다른 이의 기억에 전적으로 의존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아무리 내가 다른 이가 기억하는 그가 아니라고 외쳐도 나는 다른 이의 기억 속에 나일 뿐이다. 만일 내가 그것이 아니라고 거부를 한다면 우리는 쉽게 정신병원의 신세를 지게 될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정체성은 격자화된 타인의 기억 속에 갇혀있다고 볼 수 있다. 남이 바라보아주는 정체성에 의해서 내가 규정된다는 사실. 즉, 내가 관계 맺고 있는 이웃에 따라 나의 존재가 달라진다는 사실. 바로 구조주의가 이야기하는 중요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타인에 의해서 규정되는 나란 존재는 변화가 불가능한 것인가? 혹시 그것은 또다시 나를 본질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여기서 우리는 후기구조주의적 관점을 가지게 된다. 나는 외부의 눈으로부터 규정되지만 그 외부 역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영화 속에서 진영인(양조위)나 유건명(유덕화)나 모두 그러한 자신의 존재 규정을 벗어나려 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성에서 떠나는 것이다. 그러나 진영인(양조위)는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국장의 죽음을 통해 유일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지탱해주던 관계성을 잃게 된다. 반면 유건명(유덕화)은 안정되고 보장된 경찰이란 신분에 안주하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있는 조직원 보스를 경찰의 이름으로 살해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만나게 된다. 서로 원하는 신분으로 인정받기 위해 협상하려는 것이다.

유건명(유덕화)는 진영인(양조위)에서 이제 자신이 경찰로 살아가길 선택하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진영인(양조위)는 자신이 경찰이기 때문에 그렇게 인정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러자 유건명(유덕화)는 과거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만 지금은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렇다. 난 유건명(유덕화)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렇지만 과거의 사죄가 없이 그러한 선택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직 과거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최근에 논란이 되고 있는 독도문제를 보는 한 가지 시각을 발견하게 되는데

독도문제는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문제라는 것이다. 과거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을 때 언제나 과거는 현재의 선택 앞에 발목을 붙잡는다는 것이다. 유건명(유덕화)가 이제 착한 사람으로 살아가길 선택하려고 해도 과거의 선택에 대한 사죄 없이는 그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이처럼 독도의 문제도 과거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에 또다시 현재의 모습으로 과거는 반복되는 것이고 과거의 친일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에 지금도 친일세력들이 민족의 거국적인 선택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친일세력들은 마치 유건명(유덕화)와 같이 자신의 신분이 탈로날까봐 두려워하고 있다.

그들은 과거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과거의 죄악으로 쌓아올린 부를 여전히 떵떵거리며 누리고 있으며 반면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냉대와 소외 속에 쓰러져가고 있다. 어떻게 우리의 현실이 영화 무간도와 꼭 닮아있다.




우리의 지난 과거는 사람들의 정체성을 단지 부와 권력으로만 바라보며 친일세력들을 우리시대 정상인으로 정체성을 새겨놓고 독립운동가들과 개혁세력들을 빨갱이란 이름의 정체성으로 새겨놓았다. 그러나 정체성은 외부의 눈이 변할 때 변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펼쳐지고 있는 새로운 시대는 친일세력을 친일세력으로 개혁세력과 독립운동세력을 정당한 세력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런 변화의 와중에 친일세력들이 일부 개혁적인 모습으로 탈바꿈을 하려고 하지만 그들의 과거는 그들의 기회주의적인 변화를 잡는 장애물이 되어 결국 그들의 진면목을 드러낼 것이다.




무간도. 근 100년의 왜곡된 역사는 우리 모두를 번뇌와 고통 속에 빠뜨렸다. 친일세력들은 근 100년간 자신의 이러한 번뇌를 끊기 위하여 개혁세력과 독립세력의 씨를 모두 말려버리려 했지만 시대의 흐름은 준비된 때를 맞춰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이제 개혁세력과 독립세력들이 번뇌와 고통을 끊기 위해 전력투구하고 있다. 과거 친일세력의 무간도가 죄를 은폐하기 위한 악이었다면 현재 개혁세력과 독립세력들의 무간도는 거꾸로 돌려진 시계를 바로 세우는 정의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영화를 보며 느낀 점을 생각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왔다. 써 놓고 보니 맞는 말 같다.

제대로 된 무간도가 가능할 때 우리는 비로소 무간지옥(영원히 지속되는 가장 고통스러운 지옥)을 벗어나 정의 평화와 생명이 꿈틀대는 하나님 나라를 꿈꿀 수 있을 것이다.


작업장 무너미

영화포스터 ⓒ 김종성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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