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마술에 걸렸다.

어느날 남편에게 책 한권을 살며시 내밀었다. 남편이 우리 가족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말해주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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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혜(k26760)등록 2005.03.28 21:32
누구나 다 그렇듯 새 출발이란 것의 의미는 지금보다 좀 더 나은 것으로의 갈망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굳이 새로 시작하는 한해를 새해라고 이름 붙일 것이고,
긴 겨울을 이겨내고 이렇게 성큼 다가선 이 봄을 새봄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은 아닐지...
하지만 새로이 시작하는 한해는 지난 한해보다 경제가 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들이 많았기에
나는 새해벽두부터 뭔가 모르게 많이 불안하고 초조한 것이 사실이었다.
개인 일을 하는 남편의 일거리가 작년부터 눈에 띄게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봄이란 것이, 그것도 새봄이란 이름으로 내 곁에 성큼 다가왔음에
다시 한번 더 희망이란 것의 마술을 기대했었다.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남편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언제나 박꽃처럼 환하게 피어지기를,
봄이란 것이 그 마술 봉을 남편의 머리위로 힘껏 휘둘러 주기를 기대했었다.
그런데 남편이 마술에 걸렸다.
갑자기 일이 봇물 터지듯 밀려 든 것도 아니고,
몇 년을 그렇게 속 썩이던 외상수금을 받아 낸 것도 아니건만, 남편의 얼굴엔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바로 한권의 책 때문이었다.

며칠 전. 하루 종일 TV화면만 바라보는 남편에게 책 한권을 살며시 내밀었었다.
그건 바로 김 정현의 ‘어머니’였다.

얼마 전. 나는 한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그 책에서 가슴 떨리는 한줄기 기쁨의 빛을,
마치 캄캄한 망망대해에서 한 줄기 빛을 내뿜고 있는 희망의 등대 같은,
떨리는 기쁨을 발견하게 되었다.
읽는 내내 손수건을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을 만큼. 내 눈에서는 쉼 없이 눈물이 흘렀었다.
그리고 마지막장을 덮으면서 나는 기쁨의 눈물을,
더불어 고이 잠들어 있는 남편과 아이를 바라보며 행복의 눈물을 나는 또 흘려야 했었다.
참으로 힘든 우리네 인생길에 있어서 진정 무엇이 소중한가를 깨달았고,
진정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하여 남편이 내 곁에 있어서 얼마나 고맙고 행복한지를,
그 가족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서 제일 고귀하고 빛나는 보석임을,
더불어 기쁠 때보다도 힘들고 괴로울 때,
더 가족을 떠올려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남편에게 그 책을 내밀었던 것이다.

...나이 사십에 벌써 갈 곳이 없다는 낯익은 이들,
어머니도 아내도 아닌 또 다른 사람들,
빼곡히 거리를 메운 채 허둥거리는 아들과 딸들...
가족 위기, 가족 해체, 무심코 보아 넘기며 그럴 수도 있겠다, 불가피한 시대적 상황이겠지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미음이 아닌, 무의식적인 외면이었고 어떤 두려움에 대한 도피였습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믿었던 것이 무너지고 꿈이 사라지고 마침내 살아온 지난날마저 송두리째 부정 당하는데,
더 미련이 남을 까닭이 없겠지요.
하지만 이대로 사랑을 희망을 버리기에는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요.
정녕 한때의 혼돈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너무 황당해 어쩔 줄 모르는 아버지와 남편에게 그런 위태한 울타리에서 지레 도망치려는 아들과 딸들에게 아직 꺼지지 않은 불씨가 되고 있는 어머니와 아내의 모습들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작가 김 정현님은 이렇게 ‘어머니’라는 한권의 책을 가족이라는 이름 앞에 바치며
그들에게 사랑과 용기의 등불이 되기를 소원하고 있었다.

평생토록 온실 속에서만 살아온 부드럽고 고운 아내,
언제나 철이 들까 위태롭도록 맑기만 한 딸.
늦둥이로 나른했던 일상에 청량한 희망이 되어 주던 사랑하는 아들...
하지만 하루아침에 그들은 뿔뿔이 헤어져 버렸다.
이 나라의 병폐가 자기 직업에서 평생이라는 장인의식이 없는 것이라고 호들갑을 떨었기에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세상을 믿고 원칙을 고수한 우매함으로 뛰었던 아버지는 명예퇴직을 당하고
그 퇴직금으로 사업을 하지만 결국 부도를 당하고 채권자들에게 쫓기는 몸이 되고 만다.
저자는 그런 아버지를 이렇게 나타내고 있었다.

...희망보다는 책임으로 살아가는데 더 익숙한, 그래서 10년의 세월에도 벽 없는 세대들,
자신은 아무리 헐떡거려도 아내만은 자식만은 그 자리에 그대로 지켜주고픈 고집스러운 인생들.
누구는 그것을 정직 하지 못한 자존심이라고도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존심이 아니라 우매한 고집이었다.
아니 고집이 아니라 진정한 순정이었다.
아직도 그 순정을 간직한 순결한 영혼들. 그래서 그들은 더 억울하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약삭빠르지 못한 그들이었으니 그저 숙명이라 여기며 한마디 변명조차 내뱉지 못한다...

하지만 아버지가 그렇게 고집스럽게 지키고자했던 아내와 자식들은
아버지의 부재 하나로 어느 날 갑자기 미아가 되어 버린다.
아내는 온실속의 고운 화초였기에, 그 화초를 보호해줄 보호자를 잃어버렸다는 두려움 하나로,
세상의 무서운 바람 앞에 맞설 힘을 얻지 못하고, 어느 날 한순간의 두려움으로 무작정 떠나버리고,
딸은, 아버지가, 어머니가, 자기들을 버렸다는 절망을 무섭게 가슴에 새긴 채,
어린 동생을 고아원에 맡기고 술집으로 내몰려 결국에는 몸을 파는 일에 휘말리고 만다.
뒤늦게 딸의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죄인이 되어 만신창이가 된 딸 앞에 무릎을 꿇는다.
하지만 딸은 울부짖는다.

...모든 것은 너희를 위한 일이었다. 다 자식과 가족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언제 저희가 이렇게 버려 달라고 했나요? 아니, 정말 이렇게 버리지 않으면 안 되었나요?
어느 날 갑자기 영문도 모른 채 거리로 쫓겨났어요. 갈 곳도 없었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저 숨쉬는 것 뿐, 그런데도 우리가 무조건 기다려야 했나요? 기약도 없이 그저?
그런데도 이게 무슨 꼴이냐고 물으세요? 그럼 어떡해요?
아빠도 없고, 엄마도 없고, 갈 곳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우리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어떻게!...

그리고 딸은 그 모든 것이 아빠의 자신을 위한 일이었다고 한다.
아빠의 삶, 아빠의 인생, 아빠의 꿈, 아빠의 한, 그리고 아빠의 자존심 때문이었다고 울부짖는다.
딸의 울부짖음에 아버지는 후회를 한다.

...착각이었다. 다시 일어서기만 하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되돌려질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게 되돌려지는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함께 거리로 나앉고 함께 고통당하고 함께 통곡하는 것이 진정한 가족이었다. 어리석었다.
끝내 이렇게 더 갈 곳 없는 막다른 수렁에 이르러서야 그것을 깨닫다니,
돌이켜 생각하면 어쩌면 정말로 자존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모두를 잃어버린 초라한 꼴을 보이기 싫어 도피한 무책임한 자존심 때문에...

결국 딸은 아버지를 거부하며 밖으로 뛰쳐나가고 뛰쳐나가는 딸을 붙잡으려던 아버지는 사고를 당한다.
그리고 의식불명 상태 그러나 딸은 아빠의 사고를 미처 모른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린 엄마는 아이들을 찾아 나서고
그러나 그들의 재회는 결국 상처투성이가 되어 서로에게 가슴 찢기는 고통만을 안기게 된다.
엄마는 딸의 상처에 경악하고 딸은 자신의 상처가 부모 탓이라 오로지 원망을 하고...
하지만 엄마는 딸의 가슴의 상처를 치유하기위해 참으로 눈물나는 노력과 질긴 인내를 감수한다.
그러나 딸의 가슴에 끈질긴 원망 하나는 바로 아버지.
사고를 전혀 모르는 딸은 자신을 두 번 버린 거라며 더욱더 아버지에게 배신감을 느끼지만
엄마는 그런 딸에게 아버지를 이해시키려 노력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의 소식을 접하게 되고 의식불명인 아버지를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아버지를 바라보며 가족들은 경악한다.
그러나 그들은 비로소 안도하게 되고 또 이제야 절실히 느끼게 된다.

...더는 고통도 없을 것 같았다. 세상을 살며 부딪칠 수 있는 모든 시련은 다 겪은 것 같았다.
또 살면서 설혹 이보다 더한 불행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다시 두려워하거나
감당해 내지 못해 휘청거리지 않을 것 같았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 나름이었다.
가장 밑바닥 아래까지 곤두박질쳐 진정 소중한 것이 무엇이며 행복이 무엇인지를...

그들은 절실히 깨달은 것이었다.
그리고 가족들은 아버지의 의식을 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더불어 아내는 그때서야 느낀다.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소중한 것은 모두 그대로 있었다.
다만 그것들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몰랐을 뿐이었다...

드디어 가족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살아야겠다는 굳건한 의지로
아버지는 어느 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의식을 회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생각한다.

...얼마나 많은 시간들이 삶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을지는 모른다.
그리고 그 시간동안 또 얼마나 많은 시련이 닥쳐올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그 무엇에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한순간이라도 남아 있는 그 시간만이 소중할 따름이다.
불행이라 여기며 못내 슬퍼하던 그 모든 것도 사실은 한낱 꿈이었다.
진정 소중한 것을 곁에 두고서도 그것을 알지 못해 허둥거렸었다. 소중한 것은 언제나 그대로 곁에 있었다. 떠났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도 사실은 착각이었다. 믿지 못해 잠시 눈이 멀었던 것 뿐 이었다.
진정 떠났던 것은 오직 사랑을 잃어버린 그 자신일 뿐이었다...

그리고 작가는 참으로 위대한 결론을 끝으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였다.
사랑이란 이름을 스스로 걷어버리지 않는 한 영원히 부서질 수 없는 가족이라는 이름이었다...

책장을 덮으며 남편은 나의 작은 손을 꼬옥 잡아 주었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우리 조금만 더 힘내자.”
올봄. 이 새봄에 우리가정엔 희망이란 마술 봉이 힘차게 휘둘러진 것이다.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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