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그리고 다카아키 마사오

충의사 박정희 친필 현판 철거에 대한 단상

검토 완료

이정희(hee8861)등록 2005.03.15 16:28
아래의 글은 예산지역에서 발행되는 무한정보신문에 14일 실렸던 송용배(예산군 예산읍. 46)씨의 독자 칼럼입니다. 충의사 현판 철거에 대한 사회적 논란이 거셌지만 정작 충의사가 소재한 예산지역에서의 공개적인 의견개진이 없었던 점에 비취어 아래의 글이 공개적인 토론의 소중한 촉매가 될 것이란 판단아래 해당 신문사와 투고자의 동의를 얻어 게재 합니다. <편집자>

이야기 하나, 1940년 4월

성장 과정 중 어느 한 자락이 그 사람의 전 생애를 지배할 수도 있다
1940년 4월, 긴 칼을 차고 싶었다는 23살의 젊은 청년 박정희는 그가 의도 했던 하지 않았던 일본 천황을 위해 혈서를 쓰고 만주군관학교 2기생으로 자원입학 하였다. 그리고 다카아키 마사오(高木正雄)라는 이름으로 군관학교를 1등으로 졸업하고 <만주일보>에 그 영광의 얼굴을 싣고 말았다.

그 아름다운 청년은 졸업 식장에서 "대동아 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聖戰)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훌륭하게 죽겠습니다"라는 선서를 하였고, 그 선서 이후 굴곡 많은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성공한 친일파 다카아키 마사오는 박정희라는 이름으로 살아남았다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

그가 일본 천황을 위해 자랑스럽게 손가락을 베어 혈서를 쓰고 충성의 표상으로 독립군 토벌에 앞장선 이 기막힌 사연을 한국 경제 부흥의 화신, 근대화의 아버지라는 칭송으로 어찌 가릴 수 있으며 독립운동가와 민주열사의 피로 쓴 우리 역사를 어찌 용서할 수 있겠는가.

이야기 둘

1930년 3월 ‘丈夫出家生不還’(장부출가생불환, 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23살의 청년 윤봉길은 이렇게 결심을 하고 집을 나섰다

“날이 가고 해가 갈수록 우리 압박과 고통은 증가할 따름이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 각오가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뻣뻣이 말라가는 삼천리강산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중략> 나의 철권(鐵拳)으로 적(敵)을 즉각적으로 부수려 한 것이다. 이 철권은 관(棺)속에 들어가면 무소용(無所用)이다. 늙어지면 무용이다. 내 귀에 쟁쟁한 것은 상해 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였다.”

아아 이 청년 윤봉길은 1932년 4월, 사랑하는 아내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과 그렇게 지키고 싶었던 고향 산천을 버리고 25살의 뜨거운 목숨을 조국의 제단에 던졌다. 그리고 그 정신으로 다시 살아서 우리에게 조국의 의미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지금 묻고 있다.

에필로그

일제 강점기의 두 청년 한 청년은 조국을 위해 죽었고 한 청년을 일본을 위해 살았다. 산 자는 살아서 이 땅의 올곧은 양심과 정의를 짓밟고 자신이 추앙하던 일제에 의해 살해당한 청년의 사당에 냄새나는 돈과 부패한 권력을 들고 떼로 몰려와 뻔뻔하게 향을 피우고 충의사란 글귀를 남겼다.

다시 2005년 3월, 다카아키 마사오 사후 26년이 지나서 '충의사'란 박정희의 친필 휘호는 떼어졌다. 이제 우리 예산 군민들은 아니 대한민국의 역사를 손에 든 오늘의 우리는 떼어진 저 현판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윤봉길의사가 다시 살아오신다면 ‘다카아키 마사오’가 쓴 자신의 현판을 들고 우리에게 뭐라고 하실까?

더 이상 손으로 하늘을 가리려 하지말자. 다카아키 마사오의 지난 일들을 아무리 감추려 해도 역사는 벌떡벌떡 살아서 진실이 무엇인지를 계속 증언해갈 것이다. 그리고 남은 자들은 박정희에 의해 훼손된 이 역사의 정의를 ‘충의사’ 현판을 떼어내듯 그렇게 하나씩 지워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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