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언론은 왜 이렇게 편파적일까?"

중국인 저널리스트 한때 맹신했던 미국언론 신랄하게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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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정(wieimmer98)등록 2004.11.28 20:25
학창 시절 미국의 대외선전방송 'VOA(Voice of America)' 입사를 희망할 정도로 미국언론을 맹신했던 중국 출신 저널리스트가 "이제는 미국언론의 보도를 혐오하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털어놨다.

현재 캐나다 밴쿠버에 살고 있는 프랭크 치(Frank Qi)는 지난 2001년 12월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 온라인 잡지에 쓴 '편향적 서양언론이 나의 가정에 들이닥쳤을 때'(When western media bias hits home) 칼럼을 통해 자신의 경험과 함께 이같은 견해를 밝혔다.

<오마이뉴스>는 최근 치씨의 양해를 거쳐 지난 24일 영문판(english.ohmynews.com)에 당시 칼럼 전문을 게재했다. 사회주의 국가 중국에서 태어나 학창시절을 보내고 다시 자본주의로 건너간 겪은 치씨의 경험은 미국 언론의 문제점을 이해하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미 언론, 9·11 테러 이후 자국이기주의 여실히 드러내"

그는 "중국 언론을 정부의 선전도구라 매도할 수 있지만, 서구언론도 나름의 문제점을 갖고 있다"며 사례를 들어 "공정한 척 하지만 일방적인 시각으로 보도하는 미국언론의 위험성"을 열거했다. 특히 미국언론이 자국이기주의에 빠져 사실을 왜곡하는 모습에서 큰 실망을 느꼈다고 토로했다.

대표적인 사건이 99년 베오그라드 주재 중국대사관 폭격사건. 당시 미군의 폭격공격으로 이어난 이 사건에 대해 서구언론은 중국과는 완전히 다른 보도를 했기 때문. 미국언론은 구식 지도로 생긴 오폭이었다는 미군 사죄에 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고 그는 지적했다. 또 베오그라드 폭탄공격에서 죽은 세 명의 중국 기자들에 대해서도 침묵했다.

2001년 4월 일어난 중-미 스파이정찰기 충돌사고 역시 비판에 올랐다. 당시 미국 EP-3 정찰기가 중국 하이난다오(海南島) 상공을 정찰하던 중 중국 전투기와 충돌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나 "당시 미국언론의 균형성, 공정성 상실은 혐오할 수준이었다"고 그의 회고했다.

그는 "(미국) 메이저 언론의 편파적 기사 일색이었다"고 지적한 뒤 "(미국언론은) 미 공군이 미국 안전과 관련해 타국 영공을 염탐하는 것은 합법적인 것이라 주장하며 중국정부를 살인마라 매도하는데 한목소리를 냈다"고 전했다. "대부분 미국 언론은 '중국정부는 거짓말쟁이, 호전적이고 살인적'이라는 지배적 주장에 동의했고, 중국측 입장을 전한 매체는 없었다"고 그는 덧붙였다.

그는 9·11 테러 이후 미국언론의 무지한 이분법적 사고에 대한 비판도 잊지 않았다. 그는 "미국 정부의 반성 여론을 무시한 채 미국 지지자들은 '선(good)'이고 나머지는 모두 '악(evil)'로 구분하는 기사가 주를 이뤘다"고 당시 미국언론 보도를 평가했다. 그는 '미국 보도는 왜 이렇게 편파적일까'라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 뒤 "VOA에서 일한다면 내 아들도 아니다"고 할 정도로 서구언론을 반대했던 중국 언론학자 아버지에게 "여전히 공산주의 언론을 신뢰하지 않지만 서구언론도 나름의 문제점을 갖고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고 밝혔다. 그리고 "VOA에서 일하고 싶다는 태도를 재고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다음은 치씨 칼럼 전문이다.

서구언론의 편향성이 나의 가정에 들이닥쳤을 때
VOA에 반대한 아버지의 선견지명을 회고하며

"VOA에서 일한다면 넌 내 아들도 아니다." 학교졸업 후 VOA(Voice of America)에서 일하겠다는 내게 아버지는 이처럼 반응하셨다. 난 이미 대답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1989년부터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아버지는 공산권 언론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진 분이셨기 때문이다.

나는 지성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언론학을 가르치는 대학교수였고 어머니는 기상학자였다. 대부분 중국 지식인들처럼 나의 부모님도 내가 고등교육을 받기를 원했다. 내가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5년 후 언론학 석사과정을 밟기로 결정했을 때 부모님은 무척 기뻐하셨다.

당시 대부분 중국 부모는 자식에 대한 엄격한 통제와 공산주의 이념에 대한 강한 집착을 가졌지만 나의 부모님은 민주적인 방식으로 나를 길렀고 내 선택에 절대 관여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런 방식만이 자녀의 자발성을 촉진하고 창의력을 키운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유로운 교육방식의 역효과를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공산주의 사상을 주입하는 교육체계에 반항하기 시작했다.

1989년 나는 대학생들의 거리시위에서 선두에 서있었다. 머리에 흰 띠를 두른 채 "자유와 민주주의"를 외쳤다. 나는 당시 16살 고등학생이었다. 대학입학 후에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기를 원하는 주위의 제안을 거절했다. 당시 공산당은 소위 '장학생'들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당시 VOA는 어린 중국 대학생에게 가장 믿을만한 정보원이었다. 물론 내 아버지는 VOA에 관심조차 없었지만, 나는 그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나는 "적어도 VOA는 뉴스 정보와 미 정부의 선전은 구분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모든 정부는 언론을 선전도구로 이용하지만 적어도 미국은 VOA를 통제할 수 없어요. 우리 나라를 보세요. 모든 언론사는 정부의 재산인데, 누가 감히 그들의 주인에게 욕을 할 수 있겠어요?"

아버지의 얼굴은 금세 굳어버렸다.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나는 말을 이었다. "나는 아버지 같은 중국 언론학자들을 동정해요! 아버지는 감히 진실을 말할 수도 없잖아요. 아버지는 꼭두각시에 불과해요. 만약 내가 언론인으로 일하게 된다면 난 VOA에서 일하겠어요!"

나의 마지막 말은 아버지를 흥분케했다. "난 VOA에서 일하는 아들을 둔 적 없다."

나는 대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중국 유명 경제학 대학원에 지원했지만 모두 떨어졌다. 그러나 나에게는 몇 가지를 선택사항이 있었다. 인민해방군(the People's Liberation Army)이나 중국군에 입대하거나 대학교에서 교수가 되는 방법이 있었다. 혹은 취업의 길도 있었다.

나는 여자친구를 생각하며 첫 번째 선택은 제외시켰다. 내가 너무 어리다는 점에서 교수의 길도 포기해야했다. 게다가 침착성 없는 내 성격 탓에 학자의 길도 탐탁지 않았다. 22살의 나는 조용한 삶을 살 준비가 돼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취업을 하기로 결정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5년 동안 중국은 경제적·사회적으로 놀라운 변화를 겪었다. 그 동안 나는 해외이민과 교육의 붐을 목격했다. 1990년대 후반 아시아는 경제공황을 겪은 반면 중국은 경제성장을 유지했다. 서민들의 생활은 날로 번창했다. 각종 전자제품을 집에 들여놓고, 서양의 연회처럼 요리 5개 이상이 나오는 식사를 매끼 즐겼다. 이런 변화는 고수익자들에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서민생활에 나타난 변화였다.

서민들은 또한 다양한 뉴스도 접할 수 있었다. 수백 가지의 신문과 잡지가 거리 가판대를 가득 메웠다. 또한 TV도 점차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했다. 특히 TV 탐사보도가 유행처럼 번졌다. 중국 정부가 운영하는 국영방송인 CCTV는 '뉴스초점(Focus Report and Talk)'이나 '뉴스추적(News Probe)'과 같은 프로그램을 제작해 사회의 어두운 면을 드러냈다. 또한 이런 프로그램들은 전례가 없는 스케일과 깊이로 중앙이나 지방정부를 강하게 비난했다.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나는 서양언론에 대한 신뢰에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나는 직업상 외국 바이어들을 자주 상대했다. 중국을 처음 방문하는 이들의 반응은 항상 놀람과 혼란 두 가지였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중국의 현대화였다. 그들은 처음부터 정부권력으로부터 탄압받고 망명을 희망하는 중국인들을 예상한 것이다.

대신 그들은 행복한 생활을 누리고 얼굴에 두려움이 없는 중국인들을 만나게 되었다. 외국의 많은 이민전문 변호사들이 망명신청을 위한 팸플릿을 보내왔다. 나는 거절의 뜻을 표했지만 그들은 나의 진심을 믿지 못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내가 "중국의 다른 도시 출신이고 난 단지 상해에서 일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면 그들은 즉각 "정말이요? 난 중국에는 이주의 자유가 없는 줄 알았는데"라고 답한다.

나는 그들에게 중국은 이미 20여 년 전부터 많은 변화를 겪었다고 말했다. 그들을 서구 미디어가 중국의 실상을 호도하고 있는 것을 몰랐다. 한 방문자는 "중국은 공산국가이고 공산국가의 정부는 거짓말하고 사람들을 죽인다"고 말했다.

아마도 과거에는 그랬을 것이고, 나 또한 공산주의를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나는 변화된 중국에서 살면서 여전히 중국에 관한 부정적인 뉴스를 전하는 서구언론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중국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거짓보도를 한다고 생각지 않지만, 그들의 보도에 있어 균형성과 공정성은 어디에 있는지 궁금했다. 왜 그들을 많은 중국인들이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 것일까?

1999년 베오그라드 주재 중국 대사관 폭격이 일어났을 때 서구언론에 대한 나의 불신은 증가했다. 당시 사건은 미군에 의한 폭탄공격이었지만 나는 중국과 서구 언론에서 완전히 다른 보도를 목격했다.

나는 CNN과 MSNBC의 인터넷뉴스를 통해 중국 기자 세 명이 죽은 폭발사건 기사를 읽었다. 나는 처음 몇 개의 기사를 읽고 너무 혐오감을 느껴 기사를 끝까지 읽을 수 없었다. 미국 언론은 구식 지도를 이용한 미군의 사죄에 별다른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미군은 전장의 정확한 조사를 유지하고 매 시간마다 전쟁터 지도를 갱신하는데 당시 보도된 미군의 터무니없는 주장은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미국 언론은 미 영사관에 돌을 던진 시위자들이 있었지만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았다고 전하며 그들을 "급진 민족주의자"라 표현했다. 또한 뉴스는 중국에 거주하는 미국인들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다고 보도했지만 사실 미국 대사관이나 영사관은 중국 경찰이 철통같이 보안경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중국 언론인들이 체포되는 것을 대서특필했지만 베오그라드 폭탄공격에서 사망한 중국 언론인들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베오그라드 여성·어린이병원'의 폭격에 대해서도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내가 이 사건을 언론학을 전공하는 동료에게 이야기하자 그들은 깜짝 놀랐다. "그들이 정말 그랬어?" 내가 틀렸던 것일까? 다른 공산주의자들이 거짓말하는 것일까? 중국과 유고슬라비아가 공산국가라는 이유로 선전기계인 언론의 신뢰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내가 2001년 밴쿠버로 이사했을 때 미국 언론의 균형성과 공정성에 대한 나의 회의는 혐오에 이르렀다. 그해 4월 중국과 미국의 스파이정찰기가 충돌한 사고가 있었다. 당시 보도는 메이저 언론의 편파적 기사 일색이었다.

그들은 영공에서 다른 나라를 염탐하는 것은 합법적이고 무해한 것으로 인정했다. 그 이유는 미국의 국가안전과 관련된 사항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CBS나 NBC와 같은 전국네트워크 방송에서부터 시애틀 지역TV까지, 전국 일간지부터 CNN, MSNBC와 같은 메이저 언론의 웹사이트까지 미국 보도는 '중국정부는 거짓말쟁이, 호전적이고 살인적'이라는 지배적 주장에 동의했다.

펜타곤 대변인이나 미군 대원들이 죽은 중국 파일럿을 살인자라고 지칭하는 것을 그대로 보도한 반면 어떤 보도에서도 중국측 입장을 전하는 매체는 없었다. 미 공군의 친지들과 미 항공기에 노란 리본을 단 사진을 TV 브라운관과 신문에 연일 보도했다. 중국 파일럿 유족에 관한 기사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당시 나는 중국 언론 또한 이번 사건에 있어 미국을 비난했지만 나는 미국언론의 보도를 통해 좀 더 객관적인 보도를 기대했다.

그리고 9·11 테러가 터졌다. 사건 발생 당시 미 국무부가 공격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일부 목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 뉴스보도는 주로 이런 시각에 공감하는 이들을 깔보는 시각이 주를 이루며 평화적 해법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비난받았다. 또한 언론은 미국인과 그들을 지지하는 세력은 '선'으로 나머지 다른 세력은 '악'으로 나누며 이분법적으로 단순화시켰다. 나는 내 자신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미국 보도는 왜 이렇게 편파적일까?"

나는 밴쿠버공공도서관에서 열린 회의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당시 밴쿠버공공도서관에서는 시민들과 지역언론사 대표들이 모여 9·11 테러보도에 대해 논의했다. 회의기간 동안 많은 시민들이 균형성과 공정성을 잃은 뉴스보도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나는 회의 끝에 토론자들이 시민들의 관심에 대해 적절하게 언급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그 뒤 나의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에서 나는 VOA에서 일하고 싶다는 과거 나의 태도를 재고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여전히 공산주의 언론을 신뢰하지 않지만 서구언론도 그들 나름의 문제를 갖고 있다고 전했다. / 프랭크 치(Frank Q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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