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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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필(jluv)등록 2004.11.18 17:36


혁명가 체게바라는 잊어라.

더 이상 그는 그가 아니다.



돌 맞을 말이겠지만 이 말부터 해야겠다.

"더 이상 신은 신이 아니다."

" 당신이 알고 있는 신은 이미 누군가에의해 만들어진 신이다."

" 그 신은 곧 인간의 한계성 때문에 만들어진 신이다." 고 포이에르바하가 말을 했다면, 신앙심이 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에게 돌을 던질 것이다(이미 던졌다)

도스토옙스키는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이렇게 표현한다.

"여기는 모든게 잘되고 있는 마을입니다. 비록 당신이 예수일지라도 우리의 질서를 위해서라면 오지않았으면합니다."

바울이 예수를 말할 때 예수의 죽음과 부활만 말한다. 생전의 예수 즉 역사적 사실이었던 예수는 말하지 않는다. 그는 죽음과 부활만이 예수의 전부라 생각한다. 그러는 그와 논쟁을 벌여 처참하게 깨졌던, 야고보나, 베드로등 예수의 제자들은 죽음과 부활만큼이나 역사적예수에 대해 말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는 바울이 전한 예수다. 바울이 해석한 예수를 믿고있는 것 뿐이다. 그러나 그 예수는 죽음과 부활이라는 액기스만 있을 뿐이다. 신학자 불트만은 이것을 케리그마라했다. 우리는 예수를 아는게 아니라 믿고있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르다. 왜곡은 정확하게 알지 않고 무조건 믿는데서 왜곡이 시작된다. 일그러진다. 움베르토에코는 아무리 거룩한 성직자라도 무조건 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사람을 죽이는 지경까지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장미의 이름으로"에서 말을 한다. 맑스를 해석한 레닌은 혁명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맑스를 전투적으로 해석할 수 밖에 없었다. 레닌이 해석한 맑스는 피가 뚝뚝 흐르는 전투용이다. 스탈린은 레닌과 맑스를 독재정권을 유지하기에 적합하게 해석을 했다. 누가 누구를 어떻게 해석하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해석하기에 따라 그는 그가 되고 또 그는 그가 아닌 누군가가 되기때문이다.














































체게바라만큼 이시대에 다양하게 해석되어지는 인물은 드물 것이다. 그에대한 해석이 아무리 많다해도 공통점은 있다. 혁명가 체게바라. 혁명가. 이제 우리는 체게바라하면 혁명가부터 떠올릴 것이다. 체에관해 생각할 때는 무의식적으로 혁명이란 단어를 떠올릴 수 밖에 없다. 그만큼 그는 혁명적 삶을 살았다. 하지만 영화는 혁명가 체를 말하는게 아니다. 단지, 어느 젊은이의 기나긴 여행이야기다. 여행을 했던 그 젊은이가 체게바라 라는 이름을 가졌을 뿐이다.

선입감을 버려야한다. 감독이 제공해주는 시선을 따라, 주인공이 이동하는 경로를 따라 가면서 보기만 하면 된다. 일체의 고정관념과 선입견을 버려야한다. 감독이 왜 위대한 체를 그렇게 밖에 묘사를 안했나? 라는 의문을 던지려면 영화관을 나가야한다. 감독은 체의 혁명성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단지 23살 젊은이의 여행을 말하려는 것이다. 이미 감독은 중앙역에서 길고도 지루한 여행의 일정을 통해 브라질의 삶을 보여주었다. 양철판으로 된 주택단지며, 거칠고 험한 길 곳곳에도 사람의 따스한 정이 있는 길의 여정을 보여주었다. 관객은 감독의 시선에 따라 느끼면된다. 일단 선입견은 버려야 한다. 체게바라,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그의 삶이 펼쳐진다. 그러나 기대는 오해를 낳고 오해는 잘못된 해석을 낳을 수 있다. 영화는 그래서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가 아니다"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다"







자기를 부정하는 것. 자신을 더 이상 자신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 그게 이영화의 메세지다.

예수는 자신을 부정했다. 광야에서 사십일을 굶으며 자신을 부정했다. 그리고 또 십자가 위에서 "엘리엘리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었다. 그리곤 역사적인 실존은 거기서 마무리 되었다. 그가 부활 했을 때는 그는 더 이상 그가 아니었다. 그는 새로움이었다. 역사는 거기서 시작되었다. 모든 시작은 자신을 아는 것, 그리고 자신을 부정하는 것, 자신을 버리는 것부터 시작한다. 여행이란 관광이 아니다. 발견이다. 깨달음이다. 사물과 풍경 사람과 풍습 다른 문화 가운데서 자신에게 익숙하게 길들여졌던 것들에서 멀어지는 동안 늘 낯선 풍경과 문화와 사람들을 만나야하는 여행은 다른 각도에서 자신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게 여행이다. 여행에서 변화되지 않는 사람은 익숙함의 노예일 것이다. 여행은 익숙함과의 단절이다. 익숙함과 편리함에서 벗어나야 자신을 알고 자신과 결별할 수 있다.

23살 청년 체와 29살 청년 알베르토의 거칠고 험한 여행은 부닥침이다. 깨짐이다. 부닥침과 깨짐은

자신과의 싸움이다. 앉아서 터득하는 수행이 아니라 여행은 걸음은 몸을 움직이면서 스스로 부닥치면서 맞닥뜨리면서 해결하고 피해야하는 상황이다. 여행자체가 변증법이고 여행자체가 유물론이다. 주인공을 따라가다 보면 영화는 주인공들이 얼마나 무기력하게 살아가는지 또 주인공들이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페루의 마추픽츠를 올라가는 길에 두 사람은 기진맥진해있다.그러나 보잘 것 없는 사내가 그들보다 훨씬 더 많은 짐을 지고 가뿐히 올라간다. 그들은 거기서 자신들의 나약함을 본다. 광산으로 가는 부부를 본다. 거기서도 자신들의 무기력함을 본다. 죽어가는 노파를 보면서 해줄 수 있는 일이란 두 손을 꼭 붙잡고 그를 위해 빌어주는 일 밖에 할 수 없다.



그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국가 아르헨티나의 사람이었다. 그는 의학도였다. 그것은 굉장한 기득권이었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이있었고, 알베르토 또한 돈을 보내주는 사람이있었다. 전혀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아니었고 배운 사람 부유한 국가의 사람이었다. 글도 읽을 줄 알았고 글도 쓸 줄 알았다. 오토바이를 탈 줄 알았고 알베르토는 춤도출 줄 알았다. 사람들을 사랑하는 정도 있엇고 애틋하게 생각하는 마음과 아파할 줄 아는 마음 또 버릴 줄 아는 행동도 가지고 있었다. 깨닫는 힘도 있었다. 그들은 아무 것도 없는 여행자였지만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여행은 철 없이 지도위에 줄 딱 긋고 출발 했던 무모한 도전자, 일년 여 걸린 여행을 사 개월만에 끝내겠다고 생각했던 무모함을 바꾸어준다. 사람과 풍경속에서 그들은 더 이상 예전의 그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변했다. 집에서 멀리 떨어져, 익숙한 것들과 결별을 한 후에 그들은 변했다.



마치 백무산의 시 처럼



물그림자는 저녁 불러 물로 보내고/ 산그림자는 바람 불러 산으로 보내고//… 다 돌려보내고 손을 씻는데/ 피묻은 내 손 씻기지 않네//… 지는 산그림자가 쯧쯧/ 혀를 차며 그러네/ 다 그 자리에 두고/ 너만 보내면 될 걸/ 너만 남겼냐고’(‘방생’)



















































영화 마지막 부분의 대사를 소개 한다.



"비록 우리가 이런말을 하기에는
한없이 부족한 사람들일 테지만
이번 여행에서 아메리카 대륙의
실체없는 분열과 불확실한 국가 정체성은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자리를 빌어 우리가 단일한 민족으로써
편협한 지역주의를 탈피하는 한편,
아메리카 대륙과 페루의 연합을 위해 다같이 건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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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은 내 생각 이상으로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난 더 이상 내가 아니다."





그리고 영화의 시작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길에 대한 애정이 있었다."

떠남은 변화의 시작이라고, 길은 가능성으로 열린 공간이라고 말한다.

변하고 싶으면 떠나라. 훌훌 , 가능한 익숙한 것에서 멀리 떠나라.

삶의 자리를 떠나 멀리 더 멀리 떠나 자신이 떠나온 삶의 자리를 되돌아 보라.

그러면 자신이 보인다고.













































---자녀들에게 보낸 편지/체게바라---

너희들이 이 편지를 읽게 될 즈음에는 나는 더 이상 너희들과 함께 있지 못할 게다.
너희들은 더 이상 나를 기억하지 못할 거고 어린 꼬마들은 이내 나를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빠는 소신껏 행동했으며 내 자신의 신념에 충실했단다.
아빠는 너희들이 훌륭한 혁명가들로 자라기를 바란다.
이 세계 어딘선가 누군가에게 행해질 모든 불의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키웠으면 좋겠다.
그리고 혁명이 왜 중요한지, 그리고 우리 각자가 외따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점을 늘 기억하여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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