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성매매금지법' 인가.

[주장] 매매춘에 대한 정부의 대처. 순서가 잘못되었다.

검토 완료

허지웅(ozzyz)등록 2004.10.20 15:38
'성매매금지법' 을 둘러싸고 발생하고 있는 작금의 몇몇 사건들을 보면서 마치 철지난 촌극을 보는 듯한 느낌에 실소를 금할 수 없다. 한쪽에서는 정의 실현과 여성의 인권 신장을 논하고, 또 다른 한쪽은 생존권을 주장하며 피맺힌 투쟁을 시작했다.

도대체 어느쪽이 피해자이고 가해자인지 주객이 전도되는 가운데, 지켜보는 이들은 참으로 혼동스럽다. 이들은 서로 다른 노선에서 서로 다른 꿈을 꾸며, 서로 다른 권리를 주장한다. 어느 한쪽에 선뜻 손을 들어주기는 마뜩지않지만, 분명한 것은 정부의 논리가 (늘 그래왔듯이) 뒤틀릴대로 뒤틀려있다는 점이다.

한때 이 여성들은 국가에 의해 정책적으로 장려된 '경제 투사' 이자 외화를 버는 애국자들이었다. 박정희는 닉슨 독트린 이후 멀어져 가는 미국을 대신하여 일본 자본의 적극적인 유치를 정책 기조로 삼았고, 일본인들의 '섹스 관광' 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다. 박정권은 여행사들을 통해서 기생관광을 해외 선전하였을 뿐 아니라 유신 직후에는 국제관광협회(현재의 한국관광협회)에 '요정과'를 설치하였으며, 1973년 6월에는 문교부 장관이 매매춘을 여성들의 애국적인 행위로 장려하는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

결국 1979년에는 이 희한한 '한류 열풍' 에 의해 65만명의 일본인들이 한국을 찾았고, 이 중에 80퍼센트 이상이 한국의 '섹스 관광' 에 열을 올렸다. 한국의 윤락단지, 즉 사창가는 이 시기에 국가의 비공식적인 지원사격 아래 기하급수적으로 그 몸을 불려나갔다. 엄연히 매춘 방지법(61년 11월 제정)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박정권은 한국의 여성들을 일본 관광객들앞에 발가벗기고 팔아넘겼다.

기왕 지사 애국자, 경제 투사로 칭송할 거였으면 매매춘 여성들의 수익이라도 신경써줘야 했지만, 박정권은 오히려 화대의 착취 구조를 묵인하고 방관했다. 총수입의 80퍼센트를 커미션으로 떼어가는 섹스 산업의 착취 시스템은 대부분 이 시기에 자리 잡혀졌다. 일단 외화만 벌어드렸으면 그뿐, 매매춘 여성들의 인권이나 생활권 따위는 정권의 관심 밖이었다.


괜히 꺼낸 역사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의 매춘 산업은 엄연히 국가에 의해 장려되고 성장해왔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해방 한국 이후, 사창가들이 조직적으로 형성되고 성장한 것은 모두 박정희 정권때였으며 모든 것은 정책적으로 뒷받침되고 조장되었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나라에서 묵인하고 성장시킨 '섹스 산업' 을 이제와서 도덕군자인양 서슬 퍼런 칼날로 좌시하지 않겠다며 폼을 잡고 나선 것이다.

그 동안 이 산업에 종사해온 여성들은 하루 아침에 어디로 가란 말인가. 그것도 요즘 같은 불경기, 취업 대란의 시절에 말이다. 정권의 어르신들께서 주장하는 이 오묘한 도덕 논리가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 오히려 뉴스에서는 더욱 더 음성화 된 섹스 산업이 등장하고 있는 실정이고, 마초들의 희망 사회인 대한 민국의 남성들은 특유의 이중 논리를 내세우며 좌시할 뿐이다. 어디에서도 지식인이나 기득권의 양심어린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그렇다. 그들에게 매매춘 여성들은 단지 '쉽게 돈 벌고 싶었던 철 없고 더러운 여성' 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생계 따위는 궁금하지 않다. 원래 큰 일을 도모하는데에는 작은 희생들이 뒤따르기 마련이라고 자위할 따름이다.

순서가 잘못되었다. 매매춘이 문제이고 진심으로 여성들의 인권이 걱정스러웠다면, 우선 그네들의 조직적인 화대의 착취 구조를 개선해야 했다. 또한 골목 등지로 음성화되어 꼭꼭 숨어있는 이들을 국가 차원에서 밖으로 끌어 올리고, 공론의 장을 통해서 미래를 논해야 했을 것이다. 이것은 공창의 주장이 아니라, 현재 엄연히 난립해있는 사창들을 법적으로 인정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처럼 냉정하고 어리석었다. 대한민국의 음흉한 이중성은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눈앞에서 지워버리고 없애버리는데에만 급급할 뿐, 그것을 이해하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은 전혀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들의 어두운 치부를 드러낼 뿐만 아니라, 이 사회의 그릇되고 뒤틀린 구조를 인정하는 모양새가 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거리에 쏟아져나온 성 노동자들의 현실을 왜 외면하는가? 성매매는 악이라는 텍스트 위주의 거시논리에만 급급하여 진실을 보지 못하는, 아니 보지 않으려는 수작이 아닌가 말이다. 점점 더 음성화되가고, 심지어는 주택가로 스며들어가고 있는 매매춘을 어떻게 근절할 것인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그 시작은 대상을 올바로 이해하고 인정하는데에서 출발해야 한다. 최소한 성매매에 관련해서, 대한민국은 단 한번도 그런 관용을 보인적이 없다. 이제는 더 강한 몸짓으로 자신의 좁은 시야를 가리고 있을 뿐이다. 거기에는 진실로 거대한 이중성이 자리잡고 있으며, 무서운 것은 그것이 가장 진보적인 인사들의 입에서도 발견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오늘도 뉴스를 보면서 두렵다. 매매춘 여성들의 데모가 술자리의 희희낙락속에서 단순한 가쉽거리로 치부되는 것이 두렵고, 그 술자리의 아버지들이 가정에서 딸에게 늘어놓는 도덕경이 두렵고, 그 아버지가 지난달 짓밟았던 10대 소녀의 가냘픈 몸사위가 두렵다.

또다시 가슴이 먹먹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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