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뙤약볕>, 10년의 결산이 아닌 새로운 10년의 제시"

[인터뷰] 극단 청우 10주년 기념작 <뙤약볕>의 김광보 연출

검토 완료

한상언(paxcinema)등록 2004.06.18 18:22

<뙤약볕> 연습 중 ⓒ 한상언

어떤 배우가 출연하느냐에 따라 관객이 몰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연출가 혹은 극작가의 작품이냐에 따라 관객이 몰리는 경우가 있다. 극단 목화의 오태석, 연희단 거리패의 이윤택, 극단 차이무의 이상우, 극단 미추의 손진책 등의 경우가 그렇다. 이들은 자신의 이름과 극단의 이름만으로 관객을 모을 정도로 연극계의 스타들이다.

차세대 한국연극의 선두주자로 불리던 극단 청우의 김광보도 최근의 성과는 이들 스타 연출가 못지않다. 1998년 <뙤약볕> 이후 그가 이룩한 성과들은 이미 그가 스타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특히 <인류 최초의 키스>에서 최근 <에쿠우스>까지 그의 연출작은 대부분 흥행과 연출력 모두에서 성공을 했으며 그는 현재 한국 연극계의 가장 바쁜 연출가로 알려져 있다.

6월 15일 문예회관 예술극장 연습실에서 공연준비로 바쁜 김광보 연출가를 찾았다. 그는 19일부터 공연되는 극단 청우의 10주년 기념작 <뙤약볕> 준비로 바빴다. 배우들에게 연신 쏟아내는 주문은 김광보 연출이 극단 청우 10주년 기념작 <뙤약볕>에 느끼는 부담감을 느끼게 했다.

- 극단 청우가 창단 10주년을 맞았다. 94년 극단을 세우고 지금까지 이끌어왔다. 소감이 남다를 것 같은데.
"94년도에 멋모르고 연극을 하겠다는 젊은 시절의 열정 하나만 가지고 극단 청우를 만들었다. 90년 초 사랑티켓이 생기면서 관객이 갑자기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94년으로 접어들면서 3~4년 만에 대학로에 관객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94년부터 제가 계속 들었던 말이 '사상 최악이다', '관객이 사상최악으로 없다' 그런 소리였다. 그런 시기에 극단을 만들었다.

어린 나이에 관객이 없는 이유가 뭘까 생각을 해보니까 연극하는 사람들 스스로가 자기 스스로 무덤을 판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에 유행했던 연극이 가벼운 코미디, 벗는 연극, 섹스 코미디가 주류를 이뤘다. 관객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그런 연극은 한번 보고 나면 두 번 볼 가치가 있을까하는 건방진 생각을 하게 됐다. 연극이 연극다움을 회복하는 표현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초기에는 그것을 제가 연극의 원형성 회복이라고 얘기 했는데 그런 작업을 스스로 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사고를 가지고 그 생각을 펼치고자 극단을 만들었다.

10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여러 가지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고 때에 따라서는 금전적인 문제도 그렇고 작업자로서 작품을 만드는 입장에서도 그렇고 연극을 못할 지경까지 되는, 거의 거덜날 지경이 됐다. 10년을 맞이하게 됐는데 극단 청우의 10년은 생존을 위한 투쟁의 10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서울에 연고가 있는 사람도 아니었기 때문에 어떻게 되던 이걸 통해 내 스스로 존재의 바탕을 마련했어야 했다. 때문에 연극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도 지나온 10년을 웃으면서 회상하는 입장은 아니고 살아남으려고 참 어지간히도 발버둥을 쳤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10년이라는 세월이 한편으로는 씁쓸한 미소를 짓게 되기도 하고. 만감이 교차한다."

김광보 연출 ⓒ 한상언

- 극단 10년의 역사는 김광보 연출의 연출자로서의 역사이기도 하다. 김광보 연출은 어떻게 연극에 입문하게 되었는가
"단순하게 시작했다. 고3 겨울 방학 때 부산의 한 극단 앞을 지나가다가 워크숍 단원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문을 열고 들어간 게 오늘날 지금 내가 있는 계기가 됐다.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게 도화선이 되어서 횟수로 22년째 프로극단에서 계속 작업을 해왔다. 군대도 방위출신이기 때문에 퇴근하고 난 후 연극을 했다.

내게는 이것 아니면 할 게 없었다. 대졸도 아니고 고졸이니까 무슨 학력이 뛰어났던 것도 아니고. 돌이켜 보건데 인생을 살아오면서 유일하게 인정받았던 공간이 연극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연출데뷔하기 전에도 연기를 잘했던 것은 아니지만 스텝으로선 두각을 나타냈다.

부산시절에는 조명디자이너로서 꽤나 이름이 있었다. 이일을 함으로써 유일하게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존재가치를 발견했다. 그런 것들이 근거가 되어 연극을 하는 행위자체가 나를 먹고 살게 끔 해주는 그런 동기가 되었다. 한 2년 3년 전에 문득 자고 일어나서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어쩌면 죽을 때까지 이 일을 할 것 같구나. 하더라도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지속시킬 것인지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

최근에 흔히 듣는 소리가 흥행연출자라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좋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유쾌하지 않다. 흥행연출자라고 하는 것은 생활의 방편으로서는 먹고 살 수 있는 근거는 된다. 하지만 주관적인, 내 편견만 가지고서는 작품을 할 수 없다. 그래서 관객을 생각해 망하지 않게 만들어줘야 하고 이런 것들로 인해 내가 왜 연극을 하지? 라고 하는 회의를 하게 한다. 반대로 극단 청우의 작업의 경우 먹고 사는 문제가 지독히도 문제점을 불러일으킨다. 항시 그 상반된 그 두 가지 경우 속에서 십년을 맞이하는 지금까지도 오락가락 하고 있다.

- 부산에서 활동하다 서울로 올라와 극단을 창단하게 된다. 서울에 올라오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는가?


도피다. 지독한 도시 빈민출신이다 보니 어려서부터 어렵게 살았다. 가정환경의 울타리를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을 어려서 부터 많이 가졌다. 그래서 항시 내가 태어난 곳을 떠나고 싶고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다. 워낙 부산에서 28년 시간 자체가 고통의 연속이었다. ‘서울에 올라와서 입신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에 온 것은 아니다. 과감히 부산을 버리고 서울로 뜰 수밖에 없는 근거는 내 내면의 문제에 있었다. 부산을 떠나고 싶다는 욕망이 훨씬 컸고 서울에 작은 소극장 조명담당으로 취직을 하게 되면서 과감히 부산을 떠나게 됐다.

- 처음 배우로 시작하여 조명디자인, 이후 연출을 하게 되었다. 연출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언제부터 했는가?


결정적으로 나에게 영향을 주었던 것이 70년대 <한국연극>이었다. 그 당시 <한국연극>은 학구적이었다. 극단 서재에 70년대 <한국연극>이 무수히 꽂혀있었다. 그 잡지를 보면서 연극의 꿈을 키웠다. 그 중 잊지 못하는 것이 ‘동랑레퍼토리’ 신화이다. 당시 미국에서 귀국한 유덕형 학장님이 신화적인 인물이었다. 유덕형, 안민수, 오태석 그런 선생님들의 작업들이 한국연극에 소개되었다. 오태석 작, 유덕형 연출의 <초분>이 공연되면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 기사를 읽으면서 꿈을 키웠다.

유덕형 학장님의 인터뷰 중 연출가가 갖아야 하는 덕목 중 조명디자인에 관한 것이 있었다. 조명디자인을 하는 것은 객관적 입장을 마련하는 것이다. ‘객관적인 상황에서 무대를 들여다보는 것이 조명 디자인인데 그 입장자체가 연출가의 덕목과 맞닿아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그 시기에 연출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그렇다면 내가 조명 디자인부터 먼저 시작해보자 생각 하면서 조명디자인을 하게 됐다. 시작한 것은 조명 디자인이 아니었고 조명담당이었고 조명 디자이너가 되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연출을 하게 되면서 초기에는 열정 하나밖에 없었다. 지금 내가 굉장히 부르짖는 것 중 하나가 객관성이다. 나이 어린 그 시절, 객관적이지 못하고 주관적이었기 때문에 힘을 많이 주고 열정 하나만 가지고 연극을 만들었다. 그것들이 마니아층을 만들었지만 한편으로는 관객을 부담스럽게 만들었다.

결정적으로 내가 95년 11월에 했던 <오필리어>라는 연극을 통해서 고민에 빠지게 됐다. 안치운 선생의 평론에서 내가 한번 피박살이 났다. 안치운 선생은 ‘소위 뒷골목 연극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지금 말하는 벗기는 연극이 아니고 제도권의 영향에 영향 받지 않는 젊은이들 특유의 실험적인 행위들을 뒷골목연극이라 하는데 소위 뒷골목연극이라고 자처하는 김광보의 뒷골목연극은 뒷골목 연극이 아니다. 그런 방식들은 이미 연극에 있어왔던 방식들인데 뭐 새로운 게 있나’ 그런 혹독한 비판을 했다. 그러면서 제가 굉장히 회의에 빠지게 됐다. 회의에 빠지면서 고민을 하게 됐다. 그 고민은 지금까지도 화두이다.

내 10년의 최고의 실패작을 <오이디푸스 그것은 인간> 이라고 얘기하는데 그때 손진책 선생께서 그걸 보고 나오시면서 내 등 한번 툭 때리면서 ‘힘 좀 빼’ 라고 했다. 그것이 또 화두가 됐다. 연극에서 연출자가 힘을 뺀다는 것은 주관적이 아니고 객관적인 것을 말한다. 그것이 굉장히 힘들었다. 비로소 내가 연극을 함으로서 속된말로 놀 수 있었던 작품이 <인류최초의 키스>가 아닌가 생각한다. <헨리4세>에서도 좀 놀긴 했지만.

김광보 연출 ⓒ 한상언

- 10주년 기념 공연으로 <뙤약볕>을 하게 된 이유?


어린나이에 연출자 김광보를 알리게 된 작품이 98년도에 극단 미추에서 했던 이 <뙤약볕>이었다. 지난 10년을 돌아보니까 내 작업 속 대표작이 두개가 있더라. 그 중 하나가 <뙤약볕>이고 그 하나가 <인류 최초의 키스>이다.

98년 내가 <뙤약볕>을 할 당시 거의 거덜이 났다. 극단도 거덜이 나고 생활도 거덜이 났다. 연극을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할 때에 손진책 선생님이 절 거두어 주어서 미추에서 이 작업을 하면서 비로소 다시 연극을 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그 당시에 3개월 동안 미추산방에서 숙식을 같이 하면서 이 작품을 했다. 묘하게 10주년이 되는 이 시점에서 10주년 공연을 뭘 해야 될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하다가 내게 다시 시작 할 수 있게 근거를 마련해준 이 작품을 다시 해야겠다고 결정했다.

<뙤약볕>은 10년을 결산하는 무대가 아니고 우리가 앞으로 10년을 가기위한 제시이다. 우리는 이 길을 다시 시작해 보려한다는 의미에서 <뙤약볕>을 한다고 보면 된다.

- 98년 공연과 다른 점 어떤 것이 있는가?


엄청나게 달라졌다. 그 당시는 연극이 원시 제의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연극의 원형성을 회복하고 무대 위에 생생한 집단 광기를 보여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6년이 지난 시점에서 다시 비디오자료를 보니까 낯 뜨거워서 못 보겠더라. 내가 얼마나 힘을 줬던지 배우부터 해서 조명까지 쏟아 부어서 터질 것 같은 연극이었다. 쉽게 말해 채우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너무나도 꽉꽉 들어차게 연극을 만들었다. 숨 쉴 틈 하나 없는 그런 연극이었다.

이번 연극은 아직까지도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비우기에 주력하겠다는 생각이다. 연극의 형태가 완성되었을 때 그 형태 속에 주연이 되어야 하는 것은 배우다. 스텝은 부가적인 것으로 도와주는 것이지 스텝이 전면에 나서서 연극을 좌지우지하면 그것은 연극이 아니다. 배우로서 모든 것들을 보여줄 수 있다면 그것이 최고의 연극이다.

98년 <뙤약볕>에서 그 많은 것을 음악적인 요소, 안무, 집단동작 그런 것들로 해결했다면 그런 모든 것들을 다 걷어내겠다. 그 당시 음악이 괜찮았었다. 심지어는 음악이 어떤 평가를 받았냐 하면 ‘그 난해한 박상륭의 작품세계를 음악이 이해하게끔 해주었다’ 그러면 음악이 이해하게끔 했으면 배우는 무엇이냐? 라고 하는 문제에 당도하게 된 것이다.

이번 <뙤약볕> 같은 경우는 그 모든 것들을 배우의 힘으로, 배우의 느낌으로, 배우의 입장으로 보여주겠다. 그래서 음악은 최소한의 요소, 심리적 저항에 대한 효과, 파도소리, 빗소리, 천둥, 바람소리 그런 것으로 해결하겠다. 그리고 무대는 비우겠다. 조명도 극소수의 조명만 사용하겠다.

보다시피 연습장이 원형무대이다. 원형무대라고 하는 열린 공간인데 우리가 표현하는 연극의 형태는 우리가 마당극에서 말하는 열린 형태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무대는 원형으로 만들어졌지만 무대에서 보여주는 환상은 추구한다. 그러면서 작품이 보여주는 의미만이 원형무대와 맞기 때문에 원형무대를 만들고 객관적인 정황으로 이 연극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것은 연기술과 관련된 부분이다. 내가 연습할 때 계속해서 강조하는 말이 호흡을 놓으라는 것이다. 들숨이 있고 날숨이 있다. 들숨 속에서 대사를 하거든요. 숨을 들이 키고 멈추고 대사를 하는데 그것은 죽은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다. 지금 내가 이야기 하고 있듯이 호흡이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일상적인 호흡의 자연스러움을 무대에서 보여주자는 것은 아니다. 일루전도 부명 있어야 한다. 단지 그것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보여 달라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연기술이다.

- 두 달에 한편 꼴로 작품을 올리며 활발한 연출 작업을 해왔다. 극단 청우 뿐만 아니라 국립, 시립, 기타 민간극단의 작품도 의뢰받아 하고 있는데 외부 극단의 작품 연출시 그 극단의 고유한 특징을 감안하는가?


감안을 한다고 보는 게 맞다. 대신에 100%를 감안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서 극단 청우의 작업은 제가 감안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하려고 하려는 목적을 끝까지 밀고 간다. 그러니 배우들이 고통스럽다. 대신에 외부작업은 드라이한 입장을 견지하게 된다.

시립이나 국립 같은 경우는 좀 다르지만 내가 연출 의뢰 받는 작품은 다분히 상업적인 코드를 가지고 있다. 그런 코드에서 작품을 만들게 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제가 100% 그 모든 것을 다 감안해서 철저하게 맞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대신 거기서 한 10%정도는 내게 맞춘다. 예를 들어 우리 극단에서 할 수 없는 작품인데 외부에서 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진 작품이 있다. 예를 들어 <헨리4세>의 경우는 우리 극단의 능력으로 그 작품을 할 수 없다. 돈도 많이 들고. 대신에 한 90%정도는 그쪽 팀에 감안을 해주고 그래 10%정도는 내가 이런 것들을 한번 시도해본다는 욕심을 가지고서 작품에 임한다.

비근한 예로 가장 최근에 했던 <에쿠우스> 같은 경우, 내가 어떤 생각으로 그 작품을 했냐하면 작년 연말에 내가 <웃어라 무덤아>라는 작품을 했는데 그 작품이 나에게 중요한 터닝포인트를 마련해주었다.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거의 소리하나 안 지르고 작품을 만들었다. 철저하게 놀았다. 보시는 어떤 평론가 선생님은 이 작품이 한국의 모든 전통들이 다 녹아들어갔다. 라는 말씀을 하셨고. 그것이 모티프가 되어서 내가 <에쿠우스>를 하면서 어떤 목표 하나만 가지고 했냐하면 중극장 이상의 극장에서도 소리를 안지르고도 연극이 될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디에서부터 근거하면 아까 말했던 그 호흡. 대극장에서도 우리가 호흡을 정확하게 구사하면 소리 안 지르고 대사가 들린다. 그런데 많은 배우들이 대극장이기 때문에 소리를 질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외부작품을 하면서는 그런 생각을 감안하고 한다. 혹자는 때에 따라 내 작품이 외부작업을 할 때 더 유연하다고 말한다.

- 많은 작품을 연출하다보면 잘 만들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한 아쉬운 작품들이 있을 것이다. 어떤 작품이 가장 아쉬움이 남는가?


바로 <당나귀들>이다. 당나귀들은 지금도 아쉽다. 재미있는 작품이다. 만약에 작가가 허락한다면, 국립극단이 허락한다면 그 작품을 우리 극단에서 한번 해보고 싶다. 그 이유는 너무 짧았다. 까놓고 이야기해서 3주 반, 4주도 안 되는 연습기간으로 공연이 올라갔다. 그것이 너무 아쉬웠기 때문에 나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고 다시 한번 할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준다면 그 작품을 다시 한번 해보고 싶다는 것이 솔직한 제 입장이다. 근래에 했던 공연중에 가장 아쉬운 작품이다.

<뙤약볕> 연습중인 배우들 ⓒ 한상언

- 연극을 하는데 큰 영향을 받은 선배 연극인이 있다면?


대표적인 두 분의 스승이 있다. 첫 번째가 ‘이윤택 선생님’이시다. 이윤택 선생님이 보여주었던 투쟁력이라고 해야 하나요. 또는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는 그 열정, 연극에 임하는 자세. 이윤택 선생님은 하루에 4시간 이상 안주무신다. 그런 어떤 생존 전략이랄까 서울연극판에서 살아남을수 있는 생존전략을 그 선생님한테 철저하게 배웠다 생각한다.

스승이라 말하기는 뭐하지만 심정적으로 제일 존경하는 손진책 선생님한테는 인생의 처신의 방법을 배웠다는 생각이 든다. 그분은 그릇이 크다. 굉장히 열려있는 분이시고 포용력도 큰 분이다. 그 분이 보여주는 작품도 그렇다. 작품도 열려있고 포용력이 큰 작품들을 한다. 97년도에 봤던 손진책 선생님이 만든 <봄이 오면 산에 들에> 그 작품을 잊을수 없다. 그 비어있는 그것을 보고선 지금 이순간까지도 비어있는 연극을 추구하는 결정적 동기를 마련해주신 분이 결정적으로 힘을 빼게 만든 분이 손진책 선생님이다 말할 수 있다.

같이 작업을 해보고 싶은 배우 혹은 다시 나의 작품에 출연시키고 싶은 배우가 있다면?
저는 배우의 능력은 백지장 한 장 차이라고 본다. 그 모든 것을 백지장을 뒤집을 수 있는 다시 그것을 쌓을 수 있는 능력은 테크닉이 아니고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뙤약볕>의 절반 이상이 처음 하는 배우다.

특별나게 선호하는 배우는 별로 없다. 어떤 배우가 와도 관계없다고 생각한다. 그나마 내가 만난 배우 중 정말 좋은 배우가 <플루프> 할 때 추상미이다. 그 배우는 정말 사랑스런 배우다. 그리고 거의 동물적인 감수성과 본능 거기에 수반되는 작품 해석 능력 이런 것들을 다 가지고 있다. TV나 영화에서 보는 추상미와 연극에서 보는 추상미는 참 많이 다르다. 그래서 피는 못 속이는 것 아닌가. 제가 어릴 때 창고극장에서 추송웅 선생님의 <빨간 피이터의 고백>을 보았다. 그 선생님이 보여주었던 광기도 가지고 있다. 어떤 작품이건 간에 배우 추상미라하면 100% 신뢰할 수 있지 않을까 할 정도로 그 배우에 대해서 신뢰하고 애정을 많이 가지고 있다.

- 연출님의 이후 계획과 꼭 해보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

작년에 외부작품을 너무 많이 했고 속된 말로 흥행적으로 성공했다. 그때 내가 먹었던 맘이 올해는 우리 극단이 10주년이니까 외부작품을 안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극단에 주력하겠고 마음먹었고 실지 그렇다보니까 외부작품 들어온 것이 아무것도 없다. 올해 초에 <에쿠우스> 했던 것이 마지막이었고 지금 <뙤약볕>을 하고 있고, <뙤약볕>이 두 군데 지방 공연이 있다. 이윤택 선생님이 하는 밀양연극제 거창국제연극제에 <뙤약볕>이 가고. 그게 끝나자마자 8월말에 <웃어라 무덤아>를 올리고 10월에 <웃어라 무덤아>를 가지고 일본 공연을 간다. 올해 제가 잡혀 있는 일정이다. 12월에 외부작업을 뭘 하나 할지는 <뙤약볕>과 <웃어라 무덤아>의 결과가 말해줄 것이다. 여기서 제가 말아먹으면 살 방법이 없다. <플루프>를 12월에 하자는 얘기가 있고. <플루프>는 내가 좋아하는 작품이기 때문에 <플루프>라면 언제라도 내가 다시 하겠다는 마음이 있다.

15년째 숨겨놓은 작품이 있다. 엄두가 안나 못했는데 페르난도 아라발의 작품중에 <천년전쟁>이란 작품이있다. 이게 내가 알기로는 70년에 프랑스에서 올라간 적이 있다고 알고 있다. 아라발 최초 최후의 음악극이다. 쉽게 말해서 우리 입장에서 본다면 세기말 연극이고요. 그네 입장에서 본다면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의 내용을 담고 있는 굉장히 격렬하고 과격한 연극이다. 이걸 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능력이 안 되니까 제작 여건이 안 되니까 정말 이걸 하고 싶어도 못했는데 글쎄 내년쯤에 이 작품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고. 내가 최후까지 숨겨놓고 있는 히든카드가 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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