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전화에서 탈출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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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식(punctum)등록 2004.05.19 18:02
결혼 전에는 가끔 혼자 떠나는 여행을 즐겼다. 대개 자정 무렵에 출발하는 밤기차를 이용했는데 밤에 출발해 새벽에 도착하는 기차 안에서 새우잠 자는 것으로 하루 숙박비를 아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창밖 풍경을 내다보는 재미는 덜했지만 몸을 비비고 사는 무덤덤한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공간으로 이동하는 깜깜한 시간의 터널을 지나는 느낌에 설레기도 했다.

물론 말이 그럴 듯해서 그렇지, 걸음걸음 외로움을 곱씹게 되는 홀로 여행길에서 나는 동반자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고 결국 결혼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내라는 존재가 일상탈출의 동반자라기보다는 또 하나의 일상이 되면서, 나는 다시 그 아내를 두고 혼자 떠나는 여행을 계획하기도 한다. 우리는 정말 가닥도 없이 탈출을 꿈꾸는 빠삐용의 후예들인 모양이다.

내 직장 동료 중에 이런 친구가 있다. 그는 동료들끼리 술 한 잔 할 일이 생기더라도 집에서 직장을 잇는 경로에서 잠시도 벗어나지는 못한다. 기껏 직장 옆 호프집이나 가야 따라가지 모처럼 크게 바람내서 '바닷바람 쐬면서 회 안주에 소주 한 잔 하자'거나 하는 자리에는 끼어들 꿈도 꾸지 못하는 것이다.

그 친구 휴대폰이 인터넷을 통해 위치 추적이 되고 있기 때문인데 혹 그 경로를 벗어나 엉뚱한 위치에라도 가 있을 때면 부인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잡고 이것저것 설명하고 변명하느라 번잡한 일이 생기는 것이다.

어느날 새벽 내 차에 그 친구를 태우고 초상집을 다녀오던 길이었다. 길을 잘못 들어 다리를 건너버리는 바람에 올림픽대로를 달려야 할 것을 강변북로에서 헤매고 있었다. 새벽 서너 시가 되도록 남편을 기다리던 그 친구 부인은 불이 나도록 전화를 해서 왜 엉뚱한 곳을 배회하는지, 혹은 정말 초상집을 다녀오는 것은 맞는지 등등을 따져 물었다.

허둥지둥 이 애매한 상황을 설명하느라 진땀을 빼는 그 친구보다도, 운전대를 잡은 내 등골이 더 축축하게 젖어들고 있었다. 그래서 한 번은 술기운에 내가 진지한 충고를 했더랬다.

"야, 네가 지금부터 삶의 투쟁과제로 삼을 것이 뭐냐면 말야. 바로 그 휴대폰 위치추적을 해제하는 거야. 그게 관철되지 않고는 말이지, 너는 네 마누라의 노예나 다름없으니까. 따라서 이 건 정말로 네 삶을 걸고 이겨야 하는 싸움이야.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해."

나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 반드시 그렇게 살아야 하고, 또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삶의 조건들, 즉 일상에서 떨어져 가끔은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하는 망상에도 빠져보고 '옛날에는 이렇지 않았는데'하는 몽상 속에서도 허우적거려보는 시간이 우리에게는 반드시 필요하다.

도무지 한 순간이라도 인원 점검의 감시망을 벗어나서는 안락한 정신적 평안을 누릴 수 없던 학교·군대를 거쳐 지금은 직장과 가정에서 인원점검을 받고 있다. 한번쯤 쳇바퀴 돌듯 반복하는 생활에서 벗어나는 휴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정신없이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 내가 혹 괴물이 되어가고 있지는 않은지 누가 알 것이며,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가 같은 사람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는가?

며칠 전 바다에 빠져 죽겠노라고 유서를 써놓고는 가출한 여고생을 휴대폰 위치추적 끝에 어느 바닷가 민박집에서 찾아냈다는 기사가 있었다. 그래서 이 위치추적이라는 것이 사생활 침해 논란은 있지만, 대개는 사람 목숨을 구하거나 하는 장한 구실을 한다는 얘기였다.

그렇지만 감옥 안에서도 한다는 자살을, 그깟 위치 추적해서 집에다 들여앉혀 놓는다고 막을 수 있을까? 그 여학생도 그저 죽을 생각 말고는 없었다면 민박에서 시간 끌 일도 아니고 그냥 물속으로 달렸을 것이다. 어쩌면 그보다는 죽도록 막막한 현실과 그래도 살아서 누리고 싶은 어떤 것들 사이에서 조용히 고독한 성찰을 하던 중은 아니었을까?

혹, 자살은 그저 말이고, 고등학생 신분에 엄두도 낼 수 없던 용기를 내어 혼자 떠난 여행의 짜릿한 고독을 방해한 집요한 감시망에 세상 살기가 더 싫어지지는 않았을까, 혼자 상상해본다.

언젠가는 꽤 숫자가 되던, 족쇄 같은 호출기나 휴대폰을 절대 가지지 않겠다고 버티던 친구들도 지금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촘촘하게 엮인 채 숨 가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그나마 살아남으려면 그 족쇄를 감히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 휴대폰은 분신이고, 생존도구이며, 신분증이다.

그래서 나도 이 휴대폰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하루 종일 만지작거린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혹 한 순간이라도 걸려온 전화를 받지 못할까 싶어 두꺼운 철근콘크리트 속에서는 수시로 안테나 숫자도 세어놓고, 시끄러워서 벨소리가 들리지 않는 야외에서는 피부로라도 느끼고 받기 위해 재빨리 진동으로 옮겨놓기도 한다. 그러고는 또 그렇게 일상의 얄팍한 단 맛에 매달리는 꼴이 스스로 한심해 이렇게 불평을 늘어놓기도 한다.

아주 버릴 수는 없더라도 가끔은 떠날 수 있기를. 그래서 맹목적인 관성 대신, 그래도 뭔가 돌아보고 내다보며 가늠해가는 삶을 나는 꿈꾼다. 그래서 아직은, 아주 가끔씩이라도 휴대폰을 꺼놓은 채 한 일주일 어디론가 떠나버릴 용기가 나에게서 사라지지 않기를, 조용히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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