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숭미주의자의 고백

내 안의 ‘미국환상’을 다시 발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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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식(punctum)등록 2004.05.07 16:04
나에게 미국이라는 나라는 하나의 신화였다. 고요한 일요일 새벽, 승냥이 떼처럼 밀려 내려온 빨갱이들로부터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구원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 뒤로도 오십 년이 넘게 그 평화를 지켜주기 위해 멀리 이국땅에서 노심초사 고생하는 수호신이라고 믿어왔던 초등학생 시절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공짜가 없을 뿐만 아니라, 힘 없으면 시달리는 것이 정한 이치라는 것도 알만큼 알고 지낸 최근까지의 일에 관한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대략 이런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제체제를 이야기할 때마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개념은 ‘천민자본주의’였다. 사전에서 찾아본 적도 없고, 경제학 개론 시간에 배운 기억도 없지만 너무나 명료한 이미지로 다가왔던 개념. 그저 늦게 배운 돈맛에 눈이 벌개져서 공공선이나 도덕 따위는 내팽개쳐버린 지 오래인 백성들에게 어울리는, ‘상놈’(천민)자본주의가 우리의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천민자본주의가 아닌 자본주의는 무엇일까? 당연히 그것은 미국의 자본주의를 의미했다. 투명성은 기업활동의 기본인데다가 기업가들은 기부와 사회환원을 의무처럼 생각하고, 국민들은 그런 기업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나라. 그래서, 미국은 비록 인격마저 사물화시키고 상품화시키는 자본주의의 총본산이라고는 해도, 우리나라에서 경험하는 야만적인 것과는 질이 다른, 기본은 돼있는 경제윤리를 가지고 있는 나라라고 나는 확실히 믿어왔던 것이다.

또한, 우리의 정치를 표현하는 가장 정확한 개념으로 나는 ‘유사민주주의’를 흔히 떠올리곤 했다. 민주주의랍시고 정당도 있고 선거도 하지만 제대로 된 민주주의는 절대 아닐 그 무언가, 그것이 바로 내 머리가 이해하는 유사민주주의였다. 국회의원이라는 공인된 사기꾼들의 머릿수 놀음에 놀아나는 팔자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래서 그 뻔한 거짓말과 속임수에 알고도 속으며 살아야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절대로 ‘제대로 된’ 민주주의일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마도 제대로 된 민주주의라면 역시 링컨의 나라 미국의 그것이리라고 믿어왔다.

적어도, 한국이 민주주의의 전통이 짧다거나 정치발전을 한참은 더 해야 미국 같은 ‘정치 선진국’을 따라갈 수 있다는 관념이 하나의 상식으로 존재하는 한, 그것은 나만의 믿음만도 아니었으리라.

조금 더 내려가서 인간이니 윤리니 하는 철학적 바탕으로 가면, 그런 생각은 더 뚜렷했다. 도대체 시민으로서의 개인존중은 없는 막된 이기주의에다가, 가치에 근거한 공동체의식이라고는 약에 쓰려 해도 찾기 어려운 날 선 집단주의와 연고주의. 일본이라는 꼬인 나라의 식민지 노릇을 하며 배우느라 곱절로 꼬여버려, 동양윤리와 서양윤리의 단점들만 기형적으로 얼버무려진 것이 한국이라는 나라라고 믿어왔던 반대편에는, 어쨌거나 사사건건 성경책에 손을 올려 맹세를 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문구를 동전에서부터 의사당 입구에까지 새기고 사는, 윤리적 기초 하나는 탄탄한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나에게 미국이란, 모름지기 기본은 되어있는 나라를 의미했다. 그저 고맙고 착한 나라는 아니라고 해도, 그저 천박하고 야비하기 짝이 없는 한반도의 지배자들과는 ‘기본’의 수준에서 비교할 수 없는 나라이며, 어떤 의미에서건 배우고 쫒아가야 할 목표지점이라는 것이 미국에 관한 나의 막연한 느낌이었다. 그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미국이라는 신화’의 내용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아도 최근 들어 심하게 흔들리던 미국이라는 신화는 드디어 무너져 내려 뽀얀 먼지가 되고야 말았다. 아무리 힘을 앞세우는 나라라고는 해도, 국제연합이나 국제법의 외피를 두르기 위해 눈치를 보는 정도의 상식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무참하게 짓밟아버린 막무가내 침략전쟁을 두 번 목격하면서 이미 환상의 한 자락은 접혀들던 차였다. 또한, 유가가 올랐다고 해도 낮은 환율 때문에 별 재미도 못보고 있는 아랍 산유국들을 협박한 덕에 미국 수입 원유값이 진정되었다는 뉴스가 대통령의 인기를 급상승시키는가 하면, 야당후보는 대외 통상압력의 대명사인 ‘슈퍼 301조 부활’ 공언으로 맞불을 놓는 모습이 ‘미국인의 양식’이라는 콩깍지를 벗겨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라크에서 날아든 몇 장의 사진은 충분히 미국에 대해 비판적이었다고 생각해 온 나 자신의 생각마저, 아직 너무나 숭미적이었다는 느낌에 도달하게 만들었다. 발가벗긴 채 묶이고, 쌓이고, 얼굴에는 무언가 씌워진 채 오로지 수치심과 굴욕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 고안된 갖가지 몸짓으로 널브러진 육체들. 다시 말해 존엄한 인격과 영혼들. 심지어, 개줄로 이라크인의 목을 묶어 쥐고는 희희낙락하는 얼굴은, 무엇이든 손아귀에 쥐면 약탈하고 강간하고 파괴하려는 원시적인 지배욕망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모습 그대로였다.

전기고문과 물고문, 성고문의 존재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던 87년에 나는 이 덜떨어진 나라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답답하게 느껴졌었다. 그리고, 아마 미국에서라면 이런 일까지 벌어지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기에 ‘외신에 보도된 한국의 모습’이 그렇게 부끄럽기까지 했었던 것이다.

그리고 좀더 머리가 굵어서 이 구석진 지구촌의 변방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미국 출신의 유학생들을 만났을 때, 80년 광주의 기록과 사진을 보여주며 ‘당신들은 아마 지구상의 어디선가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으리라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할 때는 이 야만적인 변방의 모습이 이제야 보편적인 인간의 이성 앞에 공개된다는 감격에 가슴 속이 울렁거리기도 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착각이요, 망상이었던 셈이다. 한국뿐만 아니라 아프리카나 미국에서나 마찬가지로, 인권이란 개념은 실제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그림일 뿐이다. 다른 것에 대한 인정과 용인이란 어쩌면 아직까지 인류가 도달하지 못한 어떤 경지일 뿐이고, 따라서 이백년 전에 유럽과 미국에서 이미 확립되었다는 ‘인간의 존엄성’이란 여전히 전세계인이 목숨 걸고 얻어내야 하는 보편적인 목표지점인 것이다.

이라크인 포로들에 대한 비인간적 학대가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부시 대통령의 미국 내 지지도가 급락했다고 한다. 그러나 남녀 가릴 것 없는 성희롱이 조직적으로 자행되었다는 증거와 증언이 잇따르고 있는 상황에서도 ‘폭락’했다는 그 지지도는 여전히 50%에 가깝다. 미국에 대해 새삼 절망하는 마지막 지점이 바로 이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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