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동 이발사'에 투영된 암울한 역사의 편린들

내 기억 속의 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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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수(grajiyou)등록 2004.05.07 12:33

ⓒ 유영수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그 때는 국민학교였지만) 그러니까 1979년 10월 27일, 정확하진 않지만 내 기억으로는 아마 토요일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쉬고 있는데 라디오에서 성우의 급박한 목소리가 반복적으로 흘러 나온다.

'대통령 각하께서 어제 서거하셨습니다. 대통령 각하께서 어제 급작스럽게 서거하셨습니다.'

철모르는 어린 나도 그 말이 믿겨지지 않았고 무슨 영화 속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었으며 내가 기억하고 있는 우리 나라 역사 중에서 첫 페이지를 장식했던 사건임이 분명했다.

노련한 연기력이 돋보이는 송강호와 문소리. 이 두 배우의 걸작품으로 남을 것으로 예상되는 영화 <효자동 이발사>에는 우리 나라의 암울했던 역사의 단면들이 영화의 내용 전개와 더불어 자연스럽게 녹아 나온다.

사사오입개헌과 3·15부정선거, 4·19혁명과 5·16군사혁명 그리고 10·26사태와 신군부의 정권장악까지 영화를 관람하면서 마치 한국사를 재조명하는 다큐멘타리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주 평범하면서도 소심한 이발사 성한모(송강호 분)가 격동적인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면서 겪게 되는 에피소드를 재미있게 다룬 이 영화에서 나는 한편으로 부정(父情)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남파간첩들의 설사병에 연유한 일명 '마루구스병' 사건으로 설사에 걸린 사람들은 모두 간첩이라며 정보 기관에서 잡아들여 고문을 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고, 마침 청와대 경호실장의 면도를 하다 '아부지, 저 물똥 쌌어요'라는 아들 낙안이의 말에 아들을 파출소로 넘기며 충성심을 보이는 매정한 아버지.

그러나 자신의 실수로 죄없는 아들이 고문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백방으로 수소문하다 경호실장에게 뇌물까지 바치며 수를 써보는데…

결국 오랜 고문 끝에 아들은 풀려 나오지만 심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다리를 못 쓰게 된 반신불구의 몸이 되고 말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들을 성하게 만들기 위해 온갖 약을 다 써보지만 별 효험이 없자 결국 아버지는 아들을 업고 전국을 헤메고 다니며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애를 쓴다.

우리 또래 세대들의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대통령이 외국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다든가 외국 원수가 정상회담을 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는 일이 있으면 수업을 팽개치고 학생들이 동원되어 길가에서 태극기를 흔들던 일이 흔히 있었다.

'각하'의 말 한마디가 곧 법으로 통하던 어두운 시대, 사석에서조차 나라를 비판하는 얘기가 나오면 쥐도새도 모르게 어디론가 끌려가던 시절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우리의 얼굴을 찌뿌리게 하는 역사의 어두운 단면들 하지만 분명히 그런 암울한 역사들을 딛고 우리는 오늘의 민주주의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기에 그것들은 잊혀질 수 없는 그리고 잊혀서도 안 되는 소중한 우리의 과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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