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열정과 차디찬 이성의 여인 이매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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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urangin)등록 2004.01.23 15:20


이화우(李花雨) 흩날릴제

울며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하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다들 알고 계시는 이매창의 절창입니다.

이 시는 뭐랄까요. 하얀 배꽃이 비처럼 떨어지던 날 하필이면 애인이 가버렸던가
봅니다. 그러니까 때는 봄이었던 거지요. 봄이었는데, 그런데 어느새 가을이 와버
렸습니다. 가을이란 뭔가요. 그냥 넋놓고 앉아 세월이며 뭣이며 온갖 것들 생각하
기 딱 좋은 계절 아니던가요. 그리하여 애인을 잃어버린 여인은 지금 저도 나를 생
각할까 어쩔까 그렇게 궁금해하며 심지어는 꿈에서도 그것을 궁금해하고 있다는 내
용인 것 같군요.

헤어지기 싫은데도 헤어지는 연인들의 심사란 원래 그런 것 아니던가요. 나는 아
직도 저를 못잊어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하는데 저는 벌써 나를 잊었겠지? 나쁜
X 혹은 나쁜X. 그러면서 혹시, 혹시 하며 아니야, 저도 나를 못 잊어 먹지도 못
하고 잠도 못 잘 거야. 그럴 거야.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 너무 심했나요?

매창은 원래의 이름이 아니라 매화를 좋아하는 자신의 심성에 기대어 스스로 지
은 요샛말로 하면 필명이지요. 본명은 계량, 이계량이라 하는군요.

계량은 요새로 치면 9급 공무원쯤 되려나요. 전라도 부안 아전의 딸로 태어났는
데 어려서부터 거문고라든가 그런 기예에 뛰어난 소질이 있었다는군요. 게다가 부
안이란 어떤 곳입니까. 고창과 이웃을 하고 있는 부안은 채석강이며 내변산 선계폭
포 등등 누구라도 가슴에서 시가 꿈틀거리는 그런 고장이지요.

요새는 핵패기장 문제로 다소 이상한 이미지를 띠게 되었지만, 핵을 극도로 반대하
는 부안의 인심도 실은 이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청정지역, 산수 좋고 물도 좋고
사람 마음도 좋은 곳이라는, 그런 곳에 핵이라니 이게 무슨 말이냐 하는 정서도 정
치적인 문제 못지 않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사진이 바로 선계폭포인데 어떤가요. 어디선가 그냥 시가 우편배달부의 편지처
럼 다가올 것 같지 않은가요? 아무튼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태어난 이매창, 뛰어
난 기량을 지녔음에도 신분의 벽을 넘어설 수 없는 시대에 태어난 죄로 기생을 하
고 있지만 그 마음만은 꼿꼿한 대나무 같고 사시를 푸른 소나무 같았지요.

어느 때인가 지나가던 건달이 매창에 관한 소문을 듣고 한 번 어떻게 해보고자 수
작을 부렸다지요? 딴에는 양반의 핏줄이라고, 요새말로 하자면 아마 정치브로커 쯤
이나 되겠는데 아무튼 선비랍시고 설익은 싯귀 몇으로 매창을 유혹하려고 했던 모
양입니다. 이에 매창이 다음과 같은 시로 응대를 합니다.

平生 學食東家
(떠돌며 밥얻어 먹기를 평생 부끄럽게 여기고)

獨愛寒梅映月斜
(차가운 매화가지에 비치는 달을 홀로 사랑했었지)

時人不識幽閑意
(고요히 살려는 나의 뜻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指點行人枉自多
(제멋대로 손가락질하며 잘못 알고 있어라)

자, 이렇게 되면 그 잘난 양반 건달 표정이 어땠을까요. 그냥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가는 것밖에 뭐 달리 할 일이 있었을라구요. 그렇다고 그녀에게 사람을 사랑하
는 가슴이 없었을까요. 그렇지는 않지요. 그녀에게는 당대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
는 열정이 있었고 또한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애잔함이 있었습니다. 이를 증명하
는 시 하나를 더 볼까요.

취하신 님 사정없이 날 끌어당겨

끝내는 비단저고리 찢어 놓았지

비단저고리 아까워 그러는 게 아니어요

님이 주신 정마저 찢어질까 두려워요


이건 뭐랄까요. 술 취한 사내들에게 비단저고리가 찢겨졌나봅니다. 그런데 그녀
가 안타까워하는 것은 비단저고리 따위가 아니지요. 술취한 사내들에게야 풋사랑,
그야말로 하룻밤 풋사랑인지 모르지만 그녀에게는 결코 그렇지가 않다는 거, 그녀
는 이미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거. 그런데 불안하다는 거, 왜냐하면 자신은 천한
기생이고 상대 남자는 그 반대편에 서 있으니까.

오, 신분의 벽이여. 구조의 모순이여.

하긴 그보다 더 이전 시절에는 그렇게라도 자신의 마음조차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
었음을 감안하면 매창은 그래도 행복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를테
면 매창은 구조적인 모순을 자각하고 있었던 선구자라 할 수 있겠네요. 실제로 그
무렵부터 천민과 여성의 지위가 서서히 향상되기 시작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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