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관산 산행기

검토 완료

백도영(bgsdy)등록 2003.11.14 16:24
늦어도 열 시에 떠나겠다던 천관산행 버스는 10시 10분에 움직였다. 천관산은 전라남도 장흥군 관산읍과 대덕읍 경계에 있는 산으로 높이가 723M라고 했다.

일명 천풍산(天風山)으로 불리우기도 하고 지제산(支提山)이라고도 한다는 이 산은 1998년 10월 13일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고 했다.

구례의 지리산, 영암의 월출산, 정읍의 내장산, 그리고 부안의 내변산과 함께 호남지방의 5대 명산 중에 하나라고도 하는 이 산이 천관산으로 불리우는 까닭은 수십 개의 봉우리가 하늘을 찌를듯이 솟아있는 것이 천자의 면류관과 같아서라고도 하며, 신라의 김유신과 사랑한 천관녀(天官女)가 숨어 살았다는 전설이 있어 천관산이 되었다고도 한다.

아무튼 늦어도 '10시까지 안오면 출발'이라는 협박성 산행 안내문을 액면 그대로 믿고 남보다 일찍 서두른 탓으로 30분 이상 기다리는 여유를 즐겼다. 출발 직전 2주만에 만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뒤 맨 뒤에서 앞으로 3번 째 좌석에 자리를 잡고 눈을 부쳤다.

잠은 버스가 외곽도로에서 서해안고속도로로 바꾸어 타기 전에 찾아왔다 아무래도 감기 증세가 있어 출발 전에 먹은 약 기운같았다.

앉아서 청하는 잠은 매우 불편했다. 속력을 내는 버스의 굉음과 덜컹거림을 잠결에 들으며 오락가락하는 만큼, 약에 취해, 혹은 잠에 취해 어디쯤 지나고 있을까를 생각하고 있었다.

한참을 달리던 버스는 자정에 맞추어 서산 휴게소 우리를 내려놓았다. 모든 사람이 떠난 텅빈 주차장, 가득 고인 어둠, 이곳이 경부고속도로였다면 이 시간에 이렇게 쓸쓸하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을 하며 커피를 뽑았다. 안개를 벗겨내는 수은등이 근사하다고 느껴질 때 일행 중에 한 명이 다가왔다.

"아니, 그 좋은 술을 한 잔 안하고 잠만 자깁니까?"
"염려 마. 지금부터 마실 테니…."
말은 뱉는 순간 현실을 동결한다고 했던가, 한 잔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버스가 출발하고 누군가가 내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소주병을 들고 옆에 와서 앉았다. 언젠가 속세를 버리고 떠난 사람이었다.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자리를 조금 움직여 주었다. 그녀에게서 술 냄새가 풍겼다. 잔에 술을 따르며 그녀가 말했다.
"내일이 찾아와도…. 말고 다른 신곡을 많이 배웠어요."
"아, 그래? 지금 불러 봐"

그냥한 말이라는 것을 알아들은 그녀가 주문에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쓸쓸한 표정이 어두컴컴한 실내만큼이나 어둡다고 느껴졌다.
"아무래도 전 박복한 여자인가 봐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이었다. 건네 받은 잔을 입안에 털어넣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박복하다는 말을 들어서일까. 많이 힘든 얼굴이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하지만 새삼스레 무슨, 이라는 표정으로 반문을 했다.

"아! 왜 그런 생각을 하지?"
그녀가 깔깔 거렸다. 과장된 몸짓에 따르던 술잔이 출렁거렸다.
"사는 게 그렇잖아요"

몇마디 말이 오가는 동안, 밀려드는 잠이 자꾸 목을 눌렀다. 감기기운으로 계속 졸음이 쏟아 졌지만 사람이 심각하게 말하는 데 못들은 채 잠을 잘 수는 없었다. 그녀가 무슨 말인가 할 때마다 반응을 보이는 것도 예의라면 예의일 수 있겠다.
"음, 그렇구나. 음…. 그래"

얼마만큼 달렸을까. 안개를 뚫고 달리던 버스의 차창 밖으로 목포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시계는 새벽 2시 5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버스가 인천을 출발한지 거의 다섯시간 만이었다. 톨게이트를 벗어나며 그녀에게 말했다.
"조금 눈을 붙여야 하지 않을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금방 잠이 들었지만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조금씩 느껴왔던 요의가 통증을 동반할 만큼 조여왔기 때문이었다. 옆에 앉아 잠을 청하던 그녀를 의식하며 혼잣말을 했다.
"장흥엔 몇 시나 돼야 도착하는 거야."

자고 있지 않았던 듯 옆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이 금방 말을 받았다.
"사십분 정도 더 가야 한다내요."
"사십분씩이나? 돌겠군."
시간은 3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버스를 세워달라고 주문할까 하다 그냥 참기로 했다.

40분을 더 가야한다던 버스가 오분도 지나지 않아 갑자기 환해진 어느 거리에서 멈추었다. "벌써?" 차창 밖으로 강진 공용버스터미널이라는 큼지막한 입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의 행선지는 강진이 아니라 장흥이었다. 아무래도 버스가 목포IC를 지나면서 길을 잘못들은 것 같았다.

새벽 손님들을 기다리는 택시기사들을 향해 기사가 내리고 사람들도 내렸다. 덕분에 따라 내리며 화장실을 찾았지만 잠궈 논 화장실 말고는 볼일을 볼만한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길게 늘어 선 버스들 틈 사이로 어둠이 있었다.

새벽 4시에 도착한다던 버스가 목적지인 천관산 주차장에 우릴 내려놓은 시간은 5시 50분이었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 컵 라면을 하나씩 끓여 먹고 산행에 들어가려 할 때 우리처럼 천관산 산행을 온 버스들이 한 대 두 대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들을 뒤로하고 곧장 오르기 시작했다.

가을 억새가 유명한 산이라고 했지만 모든 것은 어둠이 덮어버려 보거나 느낄 수는 없었다. 가파른 경사를 손전등으로 비추며 3부 능선, 혹은 4부 능선쯤 올랐을 때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기온은 아주 포근했다. 지난 번 용문 휴게소에서 떨던 기억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지레 겁먹고 준비한 겨울 파커가 거추장스러웠다.

입고 있었던 파카를 벗기 위해 잠시 휴식을 취하며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때 낮게 드리운 운해와 눈이 마주쳤다.
"아! 참으로 근사하구나."

운해와 눈을 맞춘지 몇 분쯤 지났을까. 일행과 떨어진지는 이미 한참되었다. 운해의 배를 가르며 오렌지색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운해에 갇혀 있는 곳이 마을이라고 착각했던 그곳이 바다라는 것을 태양이 녹인 세상을 보고서야 알았다.

심호흡을 크게 한 후 두 팔을 활짝 펴고 태양을 안았다. '언젠가…. 그 날, 가슴에 용암을 품고 살았습니다'를 쓰던 날을 떠올리며 오래도록 그것을 안았다.

망상은 이룰 수 없는 꿈이지만 공상은, 상상은 달라지지 않는 표상일 수도 있겠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먼저 간 사람들이 기다려도 올라오지 않는 나를 찾는 전화였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그다지 가파르지 않았다, 서둘러 정상에 올랐을 때 능선 가득히 펼쳐진 가을 억새가 키를 넘게 달려들었다. 붉게 상기된 나를 보고 해마다 억새축제가 열리는 억새재라서 억새가 많다고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연대봉에 설치된 안내판에는 맑은 날에는 제주도가 보이고 월출산이 보이고 멀리 소백산까지 보인다는 문구와 함께 사경도까지 그려져 있었다. 정말 그럴까 싶어 다른 산악회에서 찬조 출연한 장흥이 고향이라는 친구에게 '정말인가요?" 라고 물어보았지만 '전혀요'라는 대답만 들었다.

정상 주변에는 억새보다 더 큰 당암(堂巖)이라던가 고암(鼓巖), 사자암(獅子巖), 상적암(上積巖) 등으로 불리는 기암괴석들이 가을 낙엽을 뚫고 우뚝 우뚝 솟아있었다.

하산길은 여유로웠다. 아름다운 동백꽃잎 만큼이나 주렁주렁 달린 유자밭의 풍요를 여유롭게 감상하며 하산을 했다. 산에 오르기 싫다고 버스에 남아있던 사람들이 풍성한 식탁 앞으로 사람들을 이끌었다.

여유롭게 점심을 먹었고 어딘가로 출발을 했다. 가이드가 안내 방송을 했다.
'이곳까지 온 김에 보성 녹차 밭을 들렸다 가려합니다'

무슨 나무인지 이름을 잃어버렸지만 곧고 높게 뻗은 아름드리 나무밭을 지나 녹차밭에 들어섰다, 화전민이 천수답을 일구듯이 층층이 계단을 만들어 심어 논 녹차밭에 들어가서 심호흡을 할 때 일행 중의 누군가가 친구인지 후배인지를 나에게 소개시켜주면서 한마디 거들었다.
"이 분은 작가셔."
"정말?"
누군가의 후배가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진을 함께 찍자는 말과 함께 내 팔짱을 끼었다. 동시에 일어 난 일이었다.
"하하 정말, 민망스럽네."

귀로에 올랐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무박등산을 한 날의 귀경 길은 잠이 우선이었다. 잠에 빠져들기 전 가이드의 음성을 들은 것같다.
"다음 번 산행은 적상산입니다."

그 날부터 열이틀이 흘렀다. 모레 나는 적상산으로 떠난다. 그 날 부르지 못했던 노래는 모레 부를 것이다. 아직도 내겐…. 이라는 노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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