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시굴조사 결과 -일부 전면 발굴 필요성 제기

2년동안 복원보다 발굴해야 할 듯.

검토 완료

황평우(wearea)등록 2003.10.23 16:59
청계천 시굴조사 결과 -전면 발굴 필요성 제기

서울시의 의뢰로 2003년 9월 30일~2003년 10월 22일 현재까지 서울시 종로구 서린동~성동구 용두동 청계천 하상구간에서 실시되었던 시굴조사 1차 현장설명회가 시굴기관인 중앙문화재연구원(원장:윤세영)에 의해 개최되었다.

청계천 본류에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모전교, 광통교, 광제교, 장통교, 수표교, 하랑교, 효경교, 마전교, 오관수문, 영도교 등의 다리와 수문이 위치하고 있었고, 일제강점기 동안 이들 다리는 원상을 상실하고, 부분적으로 훼손되었으며, 관수교와 주교 등이 추가로 건립되었다. 청계천 복개공사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던 수표교만을 장충당 공원으로 이전복원하고, 광통교와 관수교, 주교 등은 그대로 콘크리트 속에 매몰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모전교가 위치하였던 지역은 박스형의 암거로 복개되어 있으며, 광통교는 상부 귀틀석과 멍에석에 대한 해체작업이 진행 중에 있어 이번 조사에서는 제외하였고, 지금까지 마전교와 영도교를 제외한 옛 다리 부분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주교 부근까지 종방향의 트렌치 조사를 완료하였다고 밝혔다. 한편 퇴적층 조사는 성북천을 중심으로 상류와 하류의 두 지점에서 실시하고 있으며, 100-150m 간격으로 트렌치(시굴조사용 구덩이)를 파서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조사단의 발표에 의해 옛 다리의 현재상태를 보면 광제교(廣濟橋)는 광통교 동쪽, 장통교 서쪽에 있었으나 1760년 경진준천 이전에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1750년경에 제작된 고지도에는 남산에서 흐르는 물길과 개천 본류가 합류하는 지점에 광제교가 표시되어 있으나, 경진준천 이후에 그려진 고지도에는 <濬川事實>의 내용처럼 표시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광제교는 1750년에서 1760년 사이에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경성부사>에는 광제교는 水下町 1번지 북쪽 다리로, 후에 曲橋라고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준천사실>을 비롯한 옛 기록에 광제교 외에 곡교라는 명칭이 별도로 나타나고 있다.

광제교의 개략적인 위치는 계원빌딩에서 홍보관 서쪽으로 연결되는 부분으로 추정되며, 복개구조물 아래에서의 폭은 16m 정도이고, 양 집수관로를 제외한 조사 가능한 폭은 10m 내외이다. 주변에 다리와 관련된 치석된 부재가 노출되어 있어 이를 중심으로 복개 교각 사이를 종방향으로 굴착하여 기초석 및 부재를 확인하고자 하였으나 조사결과 지표하 120cm까지 자기편, 기와편, 골재 등이 혼합된 층이 퇴적되어 있으며, 상부의 석재는 그 위에 놓여 있었다.

그 아래로 사질층과 씰트층이 반복 퇴적되고, 250cm 지점에서 황갈색의 뻘층이 노출되었다. 광제교 부근의 조사결과 옛 다리와 관련된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장통교(長通橋)는 현재 한국산업은행 빌딩 부근에 위치하였다. 長倉橋, 長楸橋, 장■골다리 등으로 불렀다. 장통교를 廣濟橋라고 하는 의견도 있으나 고지도와 문헌으로 보아 별개의 다리이다.
장통교는 개천 본류와 목멱산 쪽에서 흘러내리는 지천이 합쳐지는 곳에 위치하며, 이곳에서 10m 내외이던 개천 본류의 폭이 20m이상으로 넓어진다.
장통교는 개천 준설과 함께 몇 차례 修築되었는데, 그 증거로 다리 서쪽 기둥에 '辛未改造'와 '己亥改造'의 8자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또 1929년 을축년 홍수 때 한복판 3간이 붕괴되었다가 복구되었다. 과거기록과 사진자료를 종합해 볼 때, 1958년 청계천 복개와 함께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장통교가 위치한 지역의 복개구조물 아래에서의 폭은 24m 정도이고, 양 집수관로를 제외한 하천의 폭은 11m 내외이다. 장통교가 위치하였던 지역에는 고가도로의 기초가 자리하고 있으며, 주변으로 복개구조물의 교각이 배치되어 있다. 조사는 복개 교각 사이를 종방향과 횡방향으로 구획하여 기초석 및 다리와 관련된 부재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였으며,
서쪽의 트렌치에서 지표하 140cm 정도에서 다리의 부재로 사용된 듯한 석재가 노출되었으나, 원위치를 이탈하고 있어 기초석은 아니며, 중앙부에 고가도로 기초와 동쪽의 물막이 보에 의해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트렌치에서 확인된 층위는 상부 120cm까지는 자기편, 기와편, 현대 생활 폐기물이 뒤섞여 있었으며, 그 하부로 모래층이 씰트층과 함께 퇴적되어 있다. 250cm까지 굴착하였으나, 장통교 기초와 관련된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수표교지(水標橋址)는 현재 청계천 2가 수표다리길에 위치하였다. 광통교와 함께 청계천에서 가장 유명한 다리였으며, 청계천 복개공사가 시작되면서 1959년 지금의 장충단 공원으로 옮겨져 청계천 다리 중 그 나마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다.
수표교가 놓여진 것은 1420년(세종2)으로 당시 이곳에 馬廛이 있어서 마전교라 불렀으나, 1441년(세종 23)에 다리 옆에 개천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서 水標石을 세운 이후 수표교라고 하였다. 1760년(영조 36) 영조는 57일 간에 20여 만 명을 동원하여 개천을 준설하고, 수표교 돌기둥에는■庚辰地平■의 네 글자를 새겨서 이후 개천 준설의 표준으로 삼도록 하였다. 수표교 한쪽 귀틀석에 '營改造 丁亥改造■등의 개조년월을 표시한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여러 차례 보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58년 청계천 복개 당시 고적위원의 의견을 받아 1959년 지금의 장충단 공원으로 이전하였다. 수표교의 규모는 길이 27.5m, 너비 7.5m, 높이 4m로 측면에서 보면 5개씩 9열로 교각이 세워져 있다.
수표교가 위치한 지역의 복개구조물 하에서의 폭은 30m 가량이며, 양 집수관로를 제외한 하천의 폭은 15.4m 내외이다. 하상의 남편에 치우쳐 장통교 하류에서부터 상수관로가 1.5m 폭으로 동쪽으로 연결되어 있다. 상수관로의 남편에 수표교의 부재로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직경 100cm 내외의 방형 석재 3매가 노출되어 있다. 하부를 조사한 결과 석재 밑에서 비닐조각이 노출되는 등 위치가 이동된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그 중 1매에는 직경 60cm의 기둥 흔적이 남아있다. 상수관로 북편 지역은 폭이 약 10m 정도인데 3매의 교각이 위치하고 있다. 복개교각 사이를 종방향과 횡방향으로 트렌치를 설정하여 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서편에 콘크리트 박스가 남북으로 위치하고 있으며, 그 동편에 연하여 길이 160cm가량의 장대석이 위치를 이동하여 있고, 그 동편으로 정연하게 바닥석이 깔려 노출되었다. 이들 바닥석은 110cm 정도 하부에서 노출되고 있으며, 수표교 하부에 깔았던 석재로 추정된다. 전면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기초석의 범위 및 박석의 성격을 확인하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觀水橋는 1918년 일본에 의해 지금의 청계 3가 사거리에 세워진 다리로 건립과 관련해서는 1918년 3월 31일 『매일신보』에 「조선제일의 관수교」라는 제호로 자세하게 실려 있다. 관수교는 길이 15칸 반(28.2m), 넓이 12칸(21.8m)의 철근 콘크리트로 된 다리이며, 1917년 8월 1일 착공하여 1918년 3월말에 준공예정으로 공사비는 4만3천원이 투입되었다고 한다. 청계천 복개 시 다리 자체를 복개구조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현재 복개도로 지하에 다리의 형태가 남아 있다. 관수교에 대해서는 3D 스캔 실측을 실시하여 그 규모와 현상을 파악하고 있다고 했다.

하랑교지(河浪橋址)는 청계3가 센츄럴호텔 동편에 위치하였다. 고지도에는 新橋, 河郞尉橋, 樺榴橋, 花橋 등으로 불렀다. 일제강점기 때에 이미 콘크리트 다리로 개축된 것으로 보인다.
하량교가 위치한 지역의 복개구조물 아래에서의 폭은 30m 가량이며, 양 집수관로를 제외한 하천의 폭은 14.3m 내외이다. 하상의 남편에 치우쳐 1.5m 폭의 상수관로가 서에서 동으로 연결되어 있다. 상수관로의 북편에 길이 280cm, 너비 72cm 가량의 상판으로 추정되는 석재가 노출되어 있어 이를 중심으로 복개 교각 사이에 종횡으로 트렌치를 설정하여 조사를 실시하였으며, 조사 결과 110cm 정도 하부에서 석교의 기초석으로 추정되는 석재들이 너비 8m의 범위에서 노출되어 있어, 하랑교의 기초석으로 추정되며, 발굴조사를 통해 하량교의 전체적인 범위와 노출된 석재의 성격 확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효경교지(孝經橋址) 청계4가 세운상가 옆 아세아전자상가(구 아세아극장) 동편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에는 영풍교라 하였으며, 맹교, 소경다리 등으로 불리었다. 서쪽 기둥에 '丁巳禁營改造■라는 刻字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개축되었는지 청계천 복개 시 멸실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밝혔다.
효경교가 위치한 지역의 복개구조물 아래에서의 폭은 30m 가량이며, 양 집수관로를 제외한 하천의 폭은 20m 내외이다. 하상의 남편에 치우쳐 1.5m 폭의 상수관로가 서에서 동으로 연결되어 있다. 상수관로 북편은 너비 15.3m 가량되며, 복개 교각의 사이를 종횡으로 구획하여 조사를 실시하였고. 조사결과 50cm 정도의 깊이에서 다리 부재로 사용된 듯한 치석된 석재가 정연하게 노출되었다. 이는 효경교와 관련된 부재로 추정되며, 길이가 80cm정도이며, 너비 7m의 범위에 밀집하여 노출되었다. 이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 효경교와 관련된 기초석을 확인하고, 그 규모와 범위를 확인하여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주교는 청계 4가 사거리에 놓여있던 다리로 일제강점기 창경궁로와 배오길을 연결하는 도로를 개설하면서 놓은 것으로 보인다. 관수교와 마찬가지로 청계천 복개 때 다리구조물을 그대로 복개도로 구조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복개도로 지하에 남아 있다. 주교에 대해서도 관수교와 마찬가지로 3D 스캔 실측을 실시하여 그 규모와 현상을 파악하겠다고 한다.

오간수문지(五間水門址)은 현재 청계 6가에 위치하고 있다. 오간수문은 성벽 아래에 설치된 水門으로 성벽을 지키거나 수문을 관리하기 위하여 수문 앞에 긴 돌을 놓아 다리 기능을 병행하도록 하였다. 1760년(영조 36) 경진준천의 모습을 담은 『濬川圖』에 성벽 아래 다섯 간의 수문이 있고, 수문 앞에 긴 돌로 다리를 놓아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하였다. 오간수문의 초축에 관한 기록은 없으나, 개국 초 도성을 수축할 때 물길을 고려하여 성벽 아래 수문을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오간수문은 1907년 중추원에서 하천수의 원활한 소통과 토사가 쉽게 흘러 가도록 하기 위해 수문을 뜯어버린 후, 1908년(융희 2) 3월에 훼손되어 방치된 성벽을 처리하고, 시가교통을 원할히 하기 위해 동대문 북측 성벽과 함께 동대문 남쪽 오간수문의 성벽을 헐어버리고, 다리를 설치하여 五間水橋라 부르게 되었다. 이후 오간수교는 1921년 6월 동대문에서 광희문간 전차노선이 신설되면서 다리 옆으로 전차선로가 놓이게 되었고, 또 1926년 6월 순종의 장례행렬이 장지인 裕陵(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으로 갈 때 오간수교를 건너게 됨으로써 인부 2,500명을 동원하고, 枕木 800개, 軌道 180개를 지원 받아 약4.5m이던 다리를 약 8.2m로 확장하였다. 그 후 청계천 복개공사와 함께 사라지게 되었다.
오간수문이 위치한 지역의 복개구조물 아래에서의 폭은 약 53m이며, 양 집수관로를 제외한 하천의 폭은 45.3m 내외이다. 하상의 남편에 치우쳐 2m 폭의 상수관로가 서에서 동으로 연결되어 있다. 상수관로 북편은 너비가 약 40m이며, 복개 교각과 고가도로 기초가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다. 북편과 중앙부에는 오간수문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석재들이 흩어져 있었다. 조사는 이들 석재를 중심으로 종 방향으로 복개 교각 사이를 굴착하여 수문과 관련된 유구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였다. 조사결과 북쪽트렌치 서쪽에서는 직경 30cm 내외의 목주가 120cm 정도의 간격으로 8매가 확인되었으며, 그 동편에서 수문과 관련된 석재가 산재되어 노출되었다. 남쪽 트렌치에서도 북편에서와 마찬가지로 목주와 석재가 노출되어 오간수문의 방향과 그 후의 변화상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목주와 석재가 확인된 지역을 대상으로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전체적인 수문의 형태와 이후의 변화상을 확인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시굴기관인 중앙문화재연구원은 청계천 복원구간내 시굴조사는 근대화 과정에서 멸실되거나 방치된 유적의 흔적을 확인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제고함과 동시에 청계천 복원에 따른 문화재의 보존 방안을 마련하고자 한다고 전하며,
시굴조사는 청계천 복원구간인 5.84㎞의 하상을 대상으로 옛 다리의 흔적을 확인함과 아울러 청계천의 변화상을 살필 수 있는 퇴적층 조사와 종방향의 층위조사를 중심으로 실시하고 있으며, 일제시대 교량인 관수교와 주교는 그 현상을 파악하기 위한 실측조사를 실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의 시굴조사를 통해 청계천 복개와 동시에 사라진 것으로 추정하였던 수표교, 하량교, 효경교, 오간수문 등의 흔적을 그 기초석의 존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청계천 복원의 역사적 의미를 제고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이들 유적의 발굴조사를 통해 당시 건축 기술의 실상을 파악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한편, 광제교와 광통교의 기초와 흔적은 여러번에 걸친 청계천의 준설과 복개구조물 및 고가도로 기초에 의해 파괴된 것으로 파악된다.
지도 위원회에 참석한 문화재위원들은 유구가 발견된 4곳의 전면발굴이 필요하다고 의견을 피력했으며, 앞으로 2년이내에 청계천 복원을 마무리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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