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주의는 아직도 유효한 사상인가?

닉 다이어­위데포드/신승철·이현 옮김, <사이버­맑스>(이후,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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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승우(anar)등록 2003.08.24 17:45

책표지 ⓒ 이후

위데포드는 지금까지의 그저 그런 주장들처럼 또 다시 고전으로, 칼 맑스로 돌아가자고 외치지 않는다. 그는 맑스주의의 특징을 '다양성'에서 찾는다. 그는 맑스주의 내에 많은 이질적인 것들이 공존하고 있기에 맑스주의가 아니라 '맑스주의들'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다양성을 강조하는 것은 실패한 맑스주의, 소련식 맑스주의나 레닌주의로 맑스주의들을 환원시키는 못하게 막는다.

그렇다고 위데포드가 유행하는 포스트주의를 따르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본의 압도적인 힘을 무시하지 않는다. "자본은 모든 억압 형태를 자신의 논리에 포섭하고 있다. 서로 다른 종류의 지배가 위계적이지 않은 다원적인 방식으로 조직되는 것이 상대방의 정치적 민감성을 해치지 않는 좀더 나은 방법이라고 믿고 있는 포스트맑스주의의 신념과 달리, 자본주의는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지배이다"(37쪽). 위데포드는 국가사회주의만이 아니라 포스트주의의 주장, 낡은 운동과 새로운 운동이라는 거짓된 경계 또한 비판한다. 운동의 성격이 바뀐 게 아니라 운동이 뿌리내린 사회가 바뀌었을 뿐이기에 지금 필요한 것은 그 사회를 정확하게 분석하는 일이다.

위데포드는 지금 시대를 분석하기 위해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선언한 학자들(대표적인 학자로 다니엘 벨과 앨빈 토플러를 얘기한다)과 맞서는 한편, 맑스주의들의 잠재력을 증명하려 한다. 정보의 시대, 정보고속도로의 시대에 대한 미래학자들의 예언은 미래를 내다본 게 아니라 자신들이 가고 싶은 미래를 얘기했을 뿐이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는 그들의 주장은 단순한 예언이 아니라 일종의 계획이었다"(89쪽). "그들의 계획은 결국 기술의 도움을 받아 맑스라는 유령을 쫓아내려는 주술로 변해갔다"(90쪽).

글쓴이소개

닉 다이어­위데포드(Nick Dyer­Witheford): 캐나다 웨스턴온타리오 대학의 정보-미디어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자율주의적 맑스주의'의 시각에서 인터넷과 사이버스페이스로 대표되는 새로운 첨단미디어 시대의 투쟁 가능성을 살펴보는 데 주력하고 있으며, 反세계화 투쟁과 관련해 맑스의 '유적 존재'라는 개념을 혁신하려는 연구에도 착수 중이다. 최근 저서로는 비디오-컴퓨터 게임산업의 흥망성쇠를 다룬 <디지털 플레이(Digital Play)>(Montreal: McGill-Gueens University Press, 2003)가 있다.
위데포드는 미래학자들의 이론이 아니라 맑스의 이론으로 지금 시대를, 특히 첨단기술 자본주의 사회를 분석하고 넘어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위데포드는 이윤율 하락에 따라 자본주의가 반드시 멸망한다고 외치는 과학적 사회주의나 기술을 거부하는 네오러다이트운동, 위기를 극복하는 조절양식에 주목하는 포스트포드주의자들을 반박한다. 그러면서 위데포드는 지금까지 무시받았던 열린 맑스주의, "자본의 지배력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 권력에 저항하는 민중의 잠재력을 강조"(139∼140쪽)하는 붉은 노선에 주목한다(이미 부제에서부터 투쟁을 강조했다). 이 붉은 노선은 '자율주의'라는 이름으로 부활한다.

위데포드에 따르면, 자율주의는 "근본적으로 대안적인 전망을 통해 공동체와 커뮤니케이션을 바라보면서, 컴퓨터화된 자본주의에 맞설 수 있는 21세기의 코뮤니즘을 구축하는 데 기여할 것"(147쪽)이라 한다. 그리고 이런 전망은 바로 투쟁에서, 자본에 맞서는 노동계급의 투쟁에서 찾아질 수 있다. 이미 한물 간 듯한 노동계급이 어떻게 투쟁의 중심에 설 수 있단 말인가?

이를 설명하기 위해 위데포드는 '계급구성'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노동계급은 그 존재 자체로 의미를 가지는 게 아니라 자신을 주체이자 힘으로 만드는 투쟁, 자신의 필요와 욕망의 수준을 평가하는 투쟁을 통해 의미를 쟁취한다. 따라서 "계급구성은 부단히 변화한다.…구성/탈구성/재구성의 과정이 바로 투쟁주기를 구성한다"(151쪽). 부제에 나오는 투쟁주기는 이렇게 등장한다.

그렇다면 노동계급은 어떻게 싸우나? 20세기 초반이 전문노동자, 대중노동자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사회적 노동자'의 시대다. 노동이 사회화된 시대에는 임금노동과 부불노동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이제 노동자만이 아니라 학생, 소비자, 시청자 등 사람들의 모든 활동이 생산과정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위데포드는 "사회적 노동자라는 개념은 '낡은' 노동자 계급 이론과 '새로운' 사회운동 분석의 결합이자 종합"(183쪽)이라 주장한다. 그리고 이 개념을 통해 노동세계에 대한 사회의 개입이, 사회에 대한 노동세계의 개입이 가능해지고 "착취에 맞서는 계급투쟁의 전통적인 구성요소가 새로운 해방운동과 재통합"(183쪽)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재통합을 통해 '투쟁순환'이 첨단기술을 타고 등장한다.

이제 저항의 지점은 공장만이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드러난다. "탈산업주의자들의 환상과는 달리, 전통적인 작업장 투쟁은 새로운 디지털 환경에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또 다른 행동주의의 영역들로 옮겨가고 재구성된다"(218쪽). 그리고 이런 투쟁은 근본적으로 자율적인 가치를 추구하고 노동의 창조적인 에너지를 개발하는 생성을 지향한다.

책의 후반부는 포스트모던 사상가들과 새로운 운동방식에 대한 위데포드의 설명과 평가로 채워져 있다. 위데포드는 자율주의에 바탕을 둔 자신의 대안을 얘기한다. 임금노예제를 없애기 위해 보장소득을 지급하는 제로노동이 한가지 대안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제공되고, 실적보다는 필요와 결합되며, 가정주부와 학생 같이 전통적인 유급노동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지급되는 사회적 임금을 창출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흔히 '제로노동'으로 알려진 입장이 바로 이것이다"(412쪽). 이 "보장소득은 가사와 교육에서 건강에 이르기까지 자유롭게 배분된 서비스와 사용가치의 일괄적인 통합, 나중에 논의할 것처럼 현금거래를 넘어서 사회적 연대를 창출해줄 협력적이고 집합적인 관리 형태이다"(417쪽). 이처럼 제로에 바탕을 둔 생각은 제로상품, 제로국가로 발전한다. "사유화가 사회를 기업의 의지에 종속시키려는 목적 아래 자본 안에서 국가를 해체해버린다면, '국가화 없는 사회화'는 다양한 방향에서 자본을 침식하고 포위하려는 목적 아래 무수한 비상업적 집단들 속으로 국가의 기능을 다시 흡수한다"(435쪽).

위데포드의 주장에 따르면, 투쟁은 기술 자체를 무조건 따라가거나 거부하는 게 아니라 기술체계 내부에서 벌어져야 한다. 그는 과학의 발전에 따라 사회가 자동적으로 변화할 것이라는 신화에 맞서 과학기술이 자본주의의 지배도구로 사용되고 있음을 지적하는 한편, 자본주의에 맞서는 투쟁들이 자본의 기술적 통제를 극복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그는 기술 내에 잠재된 모순과 압력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 모순과 압력이 투쟁과 적대로 터져 나올 것이라 예상한다.

그런데 여전히 애매한 점이 남아 있다. 기술의 이중적인 성격을 인정한다 해도, 기술의 원리 자체가 그 사용방향을 결정하는 경우도 있다(예를 들어, 핵기술). 배치를 전환시켜 그 성격을 바꿀 수 있다는 자율주의의 생각은 때론 지나치게 추상적이어서 힘의 역학관계를 무시한다. 위데포드가 강조하는 자본의 힘, 특히 세계화 이후 거대화된 독점자본의 힘을 추상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그런 추상성은 네트워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도 드러난다. 위데포드는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가 공적인 지원을 받아 모든 가정에서 사용될 수 있다면 계획경제의 이상도 실현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런 산술적 수치만으로 경제를 운영할 수는 없다. 경제에는 기술적인 발전만으로 정확하게 포착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 그래서 폴라니(Karl Polanyi)는 '내면 조망'을 주장했다. "생산수단은 눈으로 볼 수 있고 만질 수도 있는 외부 세계의 측면으로, 측량과 계산이 가능하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필요 욕구와 노고를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상황을 상상해보고 그의 필요 욕구와 고통과 노고를 느끼고 경험하며 그의 내적 자아로 들어가야 한다. 이러한 '내면 조망'은 물질적인 것과 관련있는 외부적 조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칼 폴라니/홍기빈 옮김,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책세상, 2002, 106쪽). 이런 내면 조망은 기술적인 면이 아니라 협동조합이나 노동조합, 산업 결사체, 지방자치단체같은 '살아있는 힘과 관계들'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자율주의의 논리는 조금 더 현실에 깊숙이 뿌리를 내려야 한다.

"맑스냐 아니냐"라는 질문은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다. 한 사람과 시공을 뛰어넘어 그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비교하는 것은 불공평하고 무의미한 일이다. 그리고 제갈공명이 아무리 뛰어나다해도, 죽은 그가 살아있는 사마달을 쫓을 수 있는 기회는 단 한번뿐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제갈공명의 '부활'이 아니라 '다른' 제갈공명을 찾는 것일지 모른다. <사이버­맑스>는 이전의 논의보다 다양하긴 하지만 다르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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