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십이 넘은 노모는 옛집만 가면 힘이 솟는다.

팔십 노모는 항상 걱정이 많다.

검토 완료

마동욱(madw)등록 2003.06.09 16:13

2003년 6월 전남 장흥군 안양면 학송리 옛집 ⓒ 마동욱

올해 나이 83세의 노모는 3년 전만 해도 시골 농촌에서 밭이나 논에 나가 농사일을 했다. 그러나 80이 지나면서 큰아들 덕분에 시골 읍내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어머니는 3년 전 지금의 읍내로 이사를 처음 왔을 때 매우 건강하여 틈만 나면 옛집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 밭을 일구면서 옛집과 아파트를 군내 버스를 타고 이동하였다. 어머니가 밭일을 하기 위해 옛집을 찾아가면 아버지는 빈 아파틀 지키고 있었으며 어머닌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시골집으로 출퇴근을 했다.

1998년 5월 장흥읍 건강했던 아버지가 서울 스튜디오를 찾아와 찰영했던 사진아래 섰다. ⓒ 마동욱

그러던 중 2년 전에 연로하셨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어머니의 건강은 예전과 사뭇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자주 못 잊고 찾았던 고향도 조금씩 멀어지는가 싶더니 하루 종일 넓은 방에 누워 있거나 아니면 겨우 가까운 병원을 찾거나 막내아들이 하고 있는 작은 분식집을 오갔다.

그런 어머니에게는 어머니 나름의 고민이 몇 가지 있다. 첫째 고민은 막내아들이 40 중반이 지나도록 집 한칸 마련하지 못하고 늘 돈 때문에 고생하면서 단칸방에 네 식구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2003년 6월 학송리 옛집에서 막내딸 전화를 받고 있다. ⓒ 마동욱

막내아들은 언제나 돈을 버는 것보다 돈 안 되는 사진인가 뭔가를 한답시고 늘 돈만 까먹고 있으면서도 뭐가 그리도 바쁜지 낮에는 얼굴조차도 볼 수 없고 밤에는 컴퓨터 앞에 앉아 잠도 안 자고 뭔가를 하는데 일을 하는 건지 놀고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놈이 항상 걱정이지만 도대체 아들놈은 남들처럼 돈에 욕심도 없는데다 욕심내지 말고 살자고 하니 아무래도 어머니의 눈으로 보면 나이가 먹을만치 먹은 아들이지만 걱정이 앞서는 모양이다.

2003년 6월 어머니는 힘이 넘쳤다. ⓒ 마동욱

그러나 2년 전 운명을 달리했던 아버지는 사뭇 어머니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기 전 그래도 막내아들을 믿고 있었는지 언젠가 네가 하는 일이 잘되어 잘 살 수 있으니 열심히 살라고 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버진 나에겐 큰 바위처럼 느껴졌다. 세상을 살면서 아버지 역시 무척 힘든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난 아버지로부터 단 한번도 크게 꾸짖음을 당했거나 매를 맞아 본 기억이 없다. 아버지는 성질이 매우 급했지만 자식들에게 매질을 한다거나 자식들을 크게 나무라지도 않았다.

언제나 자식들이 하는 일에 편을 들었고 자식들이 바라는 쪽에서 자식들을 믿고자 했다. 어릴 적 공부가 떨어지면 언젠가 늦공부가 터져 너도 공부를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습관처럼 말해왔다.

2003년 6월 어머니는 옛집 마당에 옥수수를 심었다. ⓒ 마동욱

아버지는 어쩌면 너무 쉽게 아들을 믿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철이 들면서 나 자신도 조금씩 하게 되었지만 아마도 아버지는 아버지 자신이 아주 어릴 적 아홉 살 나이에 어머니를 잃었기에 자신의 자식들에게 그만큼 관대했던 것 같다.

어머니의 둘째 고민은 큰아들이 더 잘살게 되는 것이다. 큰아들은 어릴 적부터 부모님에게 큰 기대를 갖게 했던 믿음직한 아들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나 어머니는 누구보다 큰 아들을 가장 신임한다.

큰아들이 설혹 어떤 일을 잘못하여 아버지가 그 일로 하여금 많은 고통을 겪게 되더라도 아버지는 늘 관대했으며 가끔 논에서 소를 몰며 쟁기질을 하다 쟁기질 하던 소가 말을 잘 듣지 않거나 아버지 생각대로 일이 잘 되지 않으면 화가 나서 소리소리 지르며 큰아들을 향해 원망을 했다.

그러나 막상 큰아들이 아버지 앞에 나타나면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또 큰 아들 말에 따라 큰아들이 원하는 일들을 해주고 만다. 그래서 내가 어릴 적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큰 아들 때문에 자주 다투는 것을 보았다.

2003년 6월 밭에 남겨 두었던 호미가 없어져 낫으로 마늘을 캤다. ⓒ 마동욱

어머니는 큰아들 말을 그래도 아버지만큼 잘 믿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젊었을 때 몸이 몹시 아파 금방 돌아가실 위기에 놓였을 때가 있었다고 한다.

그 때 큰형의 나이 19살이었는데 19살 나이인 큰 아들이 어머니를 등에 업고 읍내까지 나와 병원에 입원을 시켰고 어머니의 몸 상태가 아주 위험에 처해 수술을 하여야 했지만 수술을 하면서 수혈을 하여야 할 피가 시골 병원엔 준비되지 않았고 피를 구하는 방법은 누군가 광주까지 올라가서 피를 구해 와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 되었으며 병원 원장 의사는 그 일을 큰아들에게 맡겼다고 한다.

큰아들은 어머니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광주까지 올라가 피가 있을 법 한 병원을 수소문하여 피를 어렵게 구하여 어머니께 필요한 피를 밤늦게 구해 와서 무사히 수술을 할 수 있었으며 어머니는 그 덕분에 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깨어 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 절박했던 일이 있고 난 후 그나마 큰아들 하는 일에 조금씩 제동을 걸었던 어머니도 큰아들 말을 아버지처럼 믿게 되었고 큰아들은 아버지가 그렇게도 어렵게 마련했던 재산들을 많이 없애 버리고 아버지를 통해 빚을 얻어 냈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무척이나 힘든 세월을 보내야 했다.

2003년 6월 어머니는 며느리, 손자와 함께 캐낸 마늘을 잘랐다. ⓒ 마동욱



그렇게 부모님을 어렵게 했던 큰아들이 늦은 나이에 꽤나 많은 돈을 벌었고 젊었을 때 고생을 시켰다며 읍내에 부모님 두 분을 위해 아파트를 마련 해 주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2001년 11월에 이사 온지 채 일년도 되지 못해 어머니를 남겨 놓고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마지막 세상을 떠나면서 그래도 큰아들 덕에 늦게나마 편히 살다 간다고 행복한 미소로 답을 했었다.

그러나 큰아들의 사업은 몇 년 전에 비해 조금 어렵다.
그래서 어머니는 큰아들 사업이 예전처럼 잘되 가난한 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어머니가 바라는 욕심은 언제나 자식들이 남들 보다 더 잘살거나 크게 성공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막내아들과 큰아들 그리고 또 이제 아들들의 걱정이 끝났다고 생각되면 이어지는 걱정은 막내딸이다.
막내딸이 부천에서 작은 선반 공장을 하지만 그놈의 IMF때부터 꽤나 힘이 들었고 아직 변변한 집하나 마련 못하고 살고 있으면서도 막내사위는 둘 째 아들인데도 오직 시집식구들을 위해 자신이 희생한다며 늘 걱정을 한다.

어머니의 걱정은 언제나 마르지 않은 샘처럼 끝이 없다.
일찍 결혼하여 사남매를 낳았지만 남편을 젊은 나이에 잃고 혼자서 어렵게 고생도 많이 했던 큰 누나를 걱정 한다.

2003년 6월 작두질은 꽤 힘이 들었지만 어머니는 매우 즐거워 했다. ⓒ 마동욱



큰딸은 이곳 장흥에서 멀지 않은 관산에 살고 있다.
농번기 때면 어머니는 혼자서 농사를 짓느라 바쁜 딸을 도와주기 위해 관산까지 늘 나가곤 했다.

어머니는 언제나 습관처럼 뭔가 일을 해야 한다.
그런데 아파트로 이사를 오고 아버님이 먼저 돌아가시고 난 후 가급적 일을 피하는가 싶더니 또 언젠가부터 마치 일을 하기위해 사는 것처럼 일을 찾아 나가곤 했다.

그러나 근래에 접어들어 무슨 고민이 많았던지 갑자기 시름시름 아프다는 것이다.
밤에도 깊은 잠을 자지 못하고 늘 꿈속에서 돌아가신 아버님을 보거나 예전에 시골에서 함께 살았던 이미 돌아가신 분들을 자주 보게 된다는 것이다.

새벽녘에 그런 꿈을 꾸고 나면 식은땀을 많이 흘리고 일어나기 조차 힘이 들면서 온몸을 잘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잠을 자기가 두렵다며 잠을 제대로 자려고 하지 않거나 방에 걸려진 아버님 사진을 어딘가에 감추기까지 했다.

아버님 사진을 보면서 자주 아버님 꿈을 꾸게 되기 때문에 사진을 보이지 않은 곳으로 숨겨 놓았다고 했다.
어머니는 83세의 나이임에도 비교적 건강 했지만 근래 들어 자주 병원에 나가 팔다리가 아프다며 물리 치료를 받고 있다.

평생을 오직 농사일을 했으니 당연 하겠지만 어머니는 자주 젊었을 때처럼 몸이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푸념을 하신다.

2003년 6월 마늘 쫑을 뽑지 않았던 마늘은 다 크지 못했다. ⓒ 마동욱


그러나 어머니가 옛집에 나가 호미를 들고 풀을 뽑거나 낫을 들고 풀을 베어 낼 때는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손놀림이 빠르다.
그래서 함께 일을 하는 젊은 며느리는 도저히 어머니를 이해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아파트 넓은 방에 누워 있을 때와 밭에 나가 일을 하는 모습을 며느리로서는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다고 막내며느리는 항상 생각한다.
어머니는 몸이 아프다며 누워있다가도 우리 내외가 옛집을 간다고 하면 따라 나선다.

옛집에 도착하면 어머니 얼굴엔 생기가 돈다.
만나는 사람마다와 정겨운 인사 어머니가 하루라도 옛집에 머무르면 이웃에 살았던 사람들의 어머니를 모셔가려는 일들이 어머니에게는 무척 즐거운 모양이다.

평생 동안 살아왔던 고향이기에 그만큼 어머니 마음을 따뜻하고 포근하게 감싸 주는 것 같다.
현충일 날 공휴일을 틈내 어머니는 막내아들 내외와 손자를 앞세우고 마늘을 캐러 옛집에 갔다.

옛집 마당엔 어머니가 막내아들 몰래 살 짜기 찾아와 마당가에 심어 놓은 옥수수와 호박이 잘 자라고 있었지만 옮겨 놓고 제 때 물을 주지 못했던 고추나무는 대부분 죽고 세 그루만 겨우 살아 있었다.

2003년 6월 어머니는 다음 농사를 위해 풀을 뽑아 내면서 마늘을 캤다. ⓒ 마동욱


밭으로 나간 어머니는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마늘을 캐고 우리를 못 믿겠다며 밭에 두고 온 호미가 없어졌다며 낫으로 마늘을 캤다.
막내아들과 며느리 손자는 오직 마늘 캐기에 급급했지만 어머니는 마늘을 캐면서도 다음 농사를 생각하며 풀을 뽑아내고 있었다.

어머니에겐 옛집에 다니면서 작은 농사라도 짓고 싶은 마음을 버리고 싶지 않은가 보다.

어제도 어머니는 시골 옛집에 갔다. 그리고 오후에 전화가 왔다. 이웃집에서 꼭 함께 자자고 하니 하룻밤을 자고 마늘도 말리고 마늘을 캤던 밭에 다시 콩을 심겠다는 것이다.
아무리 농사를 짓지 말자고 말하지만 언제나 어머니의 고집을 말릴 수 없다.
혹이라도 어머니가 가진 마지막 희망인지도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막내아들에게는 옛집에 가는 것을 숨기고 살 짜기 며느리에게만 알리고 옛집에 갈 때가 많다.
ⓒ 2007 OhmyNews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