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스의 문제: 인권과 효율의 대립

인권이 네이스 문제의 핵심임을 잊지 말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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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철(hyunchulsj)등록 2003.06.05 10:42
“저도 한 말씀드리겠다. 학교의 불편을 해소한다는 차원에서 노력했는데 이게 또 다른 혼란으로 비쳐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국무위원들에게 누를 끼쳐서 죄송하다. 심기일전해서 원상회복하겠다.”

참여정부라고 하는 노무현 정부 출범 100일째 국무회의에서 윤덕홍 교육부총리가 한 발언이라고 한다. 짧은 이 발언에서 나는 네이스를 둘러싼 현 상황에 대한 윤 부총리의 인식이 어떤 것인가를 발견하고 실망과 분노를 느낀다. 나는 윤 부총리의 이 발언에 대한 반박을 통해서 네이스의 본질적인 문제를 다시 부각시키고자 한다.

첫째, 윤 부총리는 현재의 상황을 혼란으로 “비친다”라고만 생각한다. 그러니까, 그의 인식에 따르면, 실제로는 혼란이 아닌데 사람들이 혼란스럽게 여길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네이스를 둘러싼 현재의 상황이 혼란이 아니라면 그는 도대체 어느 정도가 되어야 혼란이라고 말할 것인가?

네이스를 둘러싼 가파른 논쟁과 갈등을 거쳐, 마침내 국가 인권위원회의 의견을 따르자고 교육부총리가 앞장서서 방향 제시를 하는 듯 했다. 그러나 정작 인권위의 결정이 나오자, 차일피일 그 권고안 수용을 미루면서 혼란과 갈등을 증폭한 것이 과연 누구인가? 다시 우여곡절 끝에 인권위 권고안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발표한 후, 어느 새 다시 슬금슬금 말을 돌리다가, 결국 사실상 네이스 시행을 하도록 결정한 것은 누구였나? 이렇게 정신이 없을 정도로 갈지 자 행보를 계속하고 나서 하는 말이 “혼란으로 비쳐” 송구스럽다고 하는 사람이 바로 교육 부총리라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한국 교육의 책임자로 있는 것이 우리의 슬픈 현실인 것이다.

둘째, 그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뒤집은 그 결정이 단지 “학교의 불편을 해소한다는 차원”이라고 말하고 있다. 수기를 해야 할 교사들의 불편을 덜기 위해서 학교 형편에 따라 네이스를 사용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도대체 지금 이 문제의 본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런 상황 인식 수준을 교육 부총리가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그는 네이스 시행 여부가 가장 중요한 실제적 결정 사항인데, 손으로 기입하면 불편하다고 하는 지엽적인 문제에 종속시켜, 이 핵심적인 문제의 결정 사항을 뒤집는 지침을 발표해버렸다.

셋째, 그는 이렇게 혼란으로 "비친" 상황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대상은 국민이 아닌 국무위원들일 뿐이다. 그래서 그는 “국무위원들에게 누를 끼쳐서 죄송하다”라고 말한다. 물론 그는 동료 국무위원들에게도 누를 끼친 셈이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도 먼저, 국민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했어야 한다. 이 상황에서 누가 가장 큰 피해자인가? 바로 교육을 받는 학생들, 이 학생들을 올바로 교육시킬 의무와 권리가 있는 교사들, 그리고 학부모들일 것이다. 네이스로 인해서 정보 인권 침해에 속수무책인 상태가 되는 학생들, 학부모들, 교사들일 것이다. 윤 부총리는 자신의 일관성 없는 언행으로 이들에게 가장 큰 누를 끼친 것이다. 그는 이들에게 가장 먼저, 진심에서 우러나는 사과를 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없는 다수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윤 부총리는 이들에게는 별로 누를 끼쳤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오히려 이들을 학교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서 행한 자신의 결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현 상황을 혼란으로 “비치게” 만들어 버린, 사려가 부족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넷째, 그는 “심기일전해서 원상회복하겠다” 라는 말로 자신의 결심을 밝혔다. 먼저, “심기일전해서”라는 말을 보고는 실소마저 나온다. 이 문제가 한 사람이 “심기일전”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인가? 교육 부총리는 심기일전해서 마음 굳게 먹고 네이스 시행에 따른 인권 침해에 대해 항의하는 전교조 교사들을 처벌하겠다는 것인가?

글쎄,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원상회복 시키겠다는 것인지도 이해가 가질 않는다. 원상이란 원래의 상태라는 뜻일 텐데, 현재의 상황에서 무엇이 원래의 상태인가? 그의 행보에 비쳐보면 네이스 시행이 원상 회복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네이스 시행은 결코 원래의 상태가 아니다. 이 문제의 경우, 원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교육부가 우여곡절 끝에 인권위의 결정을 수용하는 쪽으로 한 결정 뿐이다. 그것이 네이스 갈등이 시작된 후, 인권위의 결정을 따라 교육부가 공식적으로 내린 최초의 결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상을 회복한다면 그 결정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네이스 시행을 둘러싸고 우리 사회 내에 깊은 갈등의 골이 파였다고 걱정을 하는 소리가 높다. 그러나 우리가 이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여, 제대로 된 답을 얻어 낸다면, 우리 사회가 더욱 성숙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쓸데없는, 소모적인 대립과 논쟁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단, 네이스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잊지 않고 거기에 대해 제대로 논의를 한다는 조건에서만 그렇다.

지금까지의 윤 부총리의 일관성 없고, 무원칙한 발언과 행동으로 인한 가장 부정적인 결과 중의 하나는 바로 네이스 문제의 핵심이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는 점이다.

네이스 문제의 핵심은 전산화에 따른 학교 행정의 효율 증대와 그에 따른 여러 부수 효과, 편익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런 전산 시스템을 사용하면 효율이 증가할 것이고, 실제적인 측면에서 여러 가지로 편리함이 있다는 사실은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것들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고 이 점들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네이스 문제의 핵심은 이런 효율의 문제가 아닌, 바로 인권의 문제이다. 네이스를 둘러싼 쟁점이 인권 문제라는 것은 교육부가 이 문제를 국가 인권 위원회에 보낸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윤 부총리가 약속한대로 인권위의 권고안을 그대로 받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차일 피일 시간을 끌면서, 교육부 관료들이 인권위 권고를 따르겠다는 자신의 애초 다짐과는 다른 발언을 하도록 하면서, 결국은 이런 극심한 혼란을 자초하고 말았다. 이 와중에 이제는 인권 문제는 사라지고, 마치 이 문제가 교육계 내의 진보와 보수의 세력 다툼, 기 싸움으로까지 비쳐지게 되었다.

그러나 네이스 문제를 제대로 풀기 위해서는, 그리고 우리가 겪고 있는 이런 엄청난 사회적 갈등에서 제대로 교훈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문제의 근본인 인권의 시각에서 네이스를 살펴야만 한다.

네이스 시행 옹호자들, 특히 보안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완벽한 보안 시스템이란 것 자체가 존재할 수도 없지만), 김창국 인권 위원장의 “개인의 사생활에 관련된 정보를 수집, 관리하는 그 자체가 기본권 제한"이라는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다. 그는 지금 집적된 정보의 보안 시스템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개인 정보를 수집, 관리하는 것 자체가 법적인 근거도 없고, 기본권 제한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인권위 박경서 상임위원의 “세계에서 학교 안 정보가 학교 담장을 넘어가는 사례가 없다”라는 말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걸핏하면 선진국 예를 찾는 우리 관료들이 왜 이런 사례는 외면하려고 하는가?

한마디로 말하면, 네이스의 기술적인 고려를 떠나, 네이스는 발상 자체가 학생들에 대한 인권 존중의 고려는 없이, 학생들을 그저 관리의 대상으로 보고, 관리의 효율성과 편의성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비인권적이고 비교육적인 것이다. 효율성과 편의성은 개인의 인권이 보장되는 한도 내에서만 추구되어야 하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것 아닌가?

네이스 시행을 주장하는 이들이 네이스 시행의 타당성을 주장하려면, 집적된 정보에 대해 네이스가 충분한 보안 대책을 갖고 있다고 주장할 것이 아니라 (이 주장은 이미 인권이라는 논점을 회피하고 있다), 네이스 시행을 위해 모든 초, 중, 고등학생들의 개인 신상 정보를 수집, 관리하는 행위가 어떻게 인권 침해가 되지 않는지에 대한 자신들의 의견을 밝혀야 할 것이다. 그럴 때에만 제대로 된 생산적인 논의가 될 것이고, 제대로 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의 인권을 존중하는 사람으로 키우는 것, 아마, 교육의 가장 큰 목표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렇다면 네이스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지는 여기서도 자명해진다. 이 문제는 학생들에게는 이제 살아있는 교육의 문제가 된 셈이다. 인권을 존중하는 학생을 키우기 위한 학교의 제도는 일차적으로 학생들의 관리의 편의성, 효율성이 아니라, 학생들의 인권을 존중하는 제도여야 함은 물론이다. 개인의 인권에 대한 배려가 없이, 효율의 차원에서 접근하여 만든 제도로 학생들을 관리할 발상을 하면서, 어떻게 학생들에게 인권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네이스 문제는 우리 사회의 가치관을 가늠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네이스 시행 여부는 결국 우리가 어떤 관점에서 우선적으로 사람을 바라보느냐의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이 문제는 인권 대 효율의 문제로 압축된다고 할 수 있다. 즉, 우리 사회가 인권과 효율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지금까지는 이 양자간의 대립에서 대부분 효율의 논리와 명분(돈)이 인권(인간)을 압도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의 그러한 선택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참담한 결과로 우리에게 대답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삼풍 백화점 붕괴, 성수 대교 붕괴, 대구 지하철 참사 등으로 이어지는 대형 참사는 인권보다는 효율을, 사람보다 돈을 우위에 두어 온 우리 사회에서 당연히 일어 날수 밖에 없는 결과라고 생각하여야 한다. 우리가 인권 보다는 효율을 앞세우는 한, 이런 상황들은 우리 앞에 언제나 준비되어 있는 셈이다. 아니,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얼마나 이런 참담하고 창피한 비극을 더 겪어야만 그제야 우리는 인권을 효율보다, 돈 보다 우위에 둘 것인가? 네이스는 이런 측면에서, 우리 사회가 인간을 바라보는 현 주소를 근본적으로 함께 점검하고, 근본적으로 잘못된 점을 고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소위 참여정부라고 하는 이 정권은 네이스를 둘러싼 이 갈등과 논란을 힘으로 밀어부쳐 시행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네이스 문제를 인권의 측면에서 이성적으로 바라보면서, 우리 사회도 인간을 좀 더 인간답게 바라보고 대접하는 그런 사회로 거듭날 수 있기를 바란다.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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