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의 현장에서 증언으로 듣는 민간인학살(10)

거창지역에서의 또 다른 학살 (증언 : 신용달 유족)

검토 완료

이창수(lcs)등록 2003.05.16 14:46
거창학살은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사건 중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1995년 제정된 『거창사건등관련자의명예회복에관한특별조치법』으로 거창 신원면 등 인근 지역에서 국군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집단학살 사건은 널리 알려진 것이다. 그런데 이 법은 명예회복법이어서 사건의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한계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거창 신원면 한 곳만이 해당되어 거창 지역에서도 보도연맹원 학살 등 다른 학살 사건은 구제되지 못했다.

거창지역에서의 보도연맹원 학살은 현재까지는 1950년 음력 6월 6일과 11일 두 차례에 걸쳐 합천 마령재에서 25명, 권빈재에서 30여 명이 학살당한 것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1949년 7월 7일부터 28일까지 남상면 춘전마을(당시 함안군 안의면) 청년 24명이 안의지서 경찰에게 총살당하는 등 거창지역에서도 신원면 이에 한국전쟁을 전후해 여러 건의 민간인학살이 발행하였다.

현재 부산에 거주하시면서 일흔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서울 농성장을 찾은 신용달 유족도 거창에서의 또다른 학살의 유족이다. 신용달 유족의 아버지 홍범 씨는 해방 직후 일본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걸인이 되어 궁핍하게 사는 모습을 딱히 여겨 마을 부자들에게 쌀을 거둬서 나눠주는 일을 하였다가 이것이 빌미가 되어 소위 "빨갱이"로 낙인찍히게 되었다고 한다. 이승만 정부가 들어서고 "빨갱이 소탕령"이 내려지면서 신용달 유족의 아버지는 1년 여 동안 몸을 피했으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잘못한 것이 없으니 피해다닌 이유가 없다"며 경찰에 자수를 하였고, 쌀 배급과 관련한 전후 사정을 들은 경찰은 그 행동에 크게 감복하고 칭찬하며 귀가 조치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후 지역에 야산대가 출몰하고 이어 여순사건, 거창 5·8 사건 등 굵직한 사건들이 발생하자 다시 곤경에 처하게 되고 보도연맹원이 되는데, 결국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 보도연맹원인 것이 이유가 되어 학살을 당하게 되었다고 한다.

신용달 유족은 "우리 아버지 같은 분들.. 정말 이웃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했던 분들이, 그렇게 가시지 않고 여짓껏 살아계셨더라면, 거창은 물론 나라가 발전하는 데 더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며 "역사가 뒤집혀서 무고한 인재를 그렇게 죽여 놓았으니 나라가 이리 힘든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였다. 신용달 유족은 오는 23일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통합특별법 완전 쟁취를 위한 전국 유족 및 사회단체 총력 투쟁 대회"를 통해 유족의 힘을 보여주자며 각오를 다졌다.

ⓒ 2007 OhmyNews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