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양심 갖고 장난치지 말라

착잡한 사면 복권 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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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곤(gaia1972)등록 2003.05.01 12:26
30일 단행됐던 특별사면 및 복권자 명단에 내 이름도 들어 있는 모양이다. 친절하게도 시민단체에 몸 담고 있는 한 친구가 민가협에 전화까지 거는 수고를 해서 확인 했다고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형 선고 실효 사면 및 복권’이란다.

이로써 1년 여 남아 있던 집행유예 기간이 사라졌으니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실형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고 구치소 문을 나설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절대 다시 잡히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럴 경우 이십대 초반을 군대에서 보냈듯이 내 삼십대 초반을 감옥에서 보내게 되리란 두려움이 나의 첫 석방 소감이었고 그와 같은 생각은 알게 모르게 그 동안 나의 행동반경에 보이지 않는 담장이 되었다.

이제 예상보다 1년 빠르게 그 담장에서 벗어났다. 그 뭣 같은 유예 기간을 그럭저럭 버틴 셈이다.

또한 예비군 훈련 통지 받을 때만 짜증과 함께 내가 지금도 이 나라 국민임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선거 날에도 내가 이 나라 국민임을 확인할 수 있고 그 권리를 당당하게 행사할 수 있으니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비록 외국에 나갈 여유는 없지만) 해외 여행을 할 수도 있으니….정말이지 짧은 수배생활과 긴 대학시절을 마쳤을 때는 왜 그리도 해외 여행을 권유하는 이가 주변에 많은 지, 나는 그들의 세뇌 덕에 집행유예가 끝나면 꼭 해외에 한 번 갔다 오리란 마음을 먹게 되었으니 이 또한 반가운 일 아닌가.

하지만 익히 들어왔던 사면이나 복권이 아닌 ‘형 선고 실효’가 무슨 뜻인지 알게 되자 기쁜 마음도 잠시. 기분이 좀 묘해졌다. 형 선고 실효란 형을 선고한 사실 자체, 즉 범죄를 저지른 사실 자체를 없애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내가 한총련 대의원이었다는 사실이 없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한총련 대의원이었기는 하지만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행위만 없어지는가. 그도 아니면 국보법을 위반은 했지만 그것이 범죄라고 선고했던 재판부의 결정이 없어진다는 것인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러다 이내 불쾌해졌다. 재판부가 ‘아, 오판이었습니다. 그건 범죄가 아니었군요’ 하는 것이라면 두말 할 것 없으나 특별사면복권은 대통령이 내리는 은혜와 같은 것이니 그런 성질은 아닐 듯 싶다. 아, 그래 이건 마치 불량배가 되도 않는 억지를 부려 실컷 때리고 나서 ‘내가 마음이 넓어서, 이번 것은 없던 것으로 하지’하는 것 같은 경우 아닌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어처구니가 없어진다. 나는 죄 지은 적 없다고, 죄를 만드는 그 법이 문제라고 끊임 없이 항변했음에도 불구하고 막무가내로 죄를 덮어 씌우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없었던 걸로 해준다니 기쁜 마음보다는 저항할 수 없는 국가 권력 앞에 내가 마음껏 농락당하고 있다는 무력감마저 밀려온다.

그렇다고 어제 사면 받은, 별로 많지도 않은 양심수들이 ‘이건 아니야’ 하며 일제히 석방을 거부하고 투쟁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또 ‘나는 사면복권을 요구하지 않았다. 즉각 철회하라’ 하고 법무부 정문 앞에서 외칠 용기도 나에게는 없다.

그렇지만 이런 물어보지도 않고 베푸는 은혜는 이젠 정말 반갑지 않을뿐더러 내가 바란 것은 국가보안법이 없어지는 것이지 나의 죄를 사함 받는 것은 아니란 사실이다.

그리고 이적단체에 가입했다고, 잡히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거나 운이 좋으면 반 병신이라고 부모님께 공갈협박을 일삼다가 기껏 잡아서는 이삼개월 구치소에 가두어 두고, 이내 그 무시무시한 사회 전복 세력들을 다 집행유예로 풀어주는 이 코메디가 어서 빨리 끝나길 바랄 뿐이며 더 이상 이 정부와 우리 사회가 남의 고귀한 양심과 청춘을 갖고 장난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또한 좀더 나가서 신참 국회의원이 옷 잘 안 입었다고 화내고, 국정원장에다 무슨 무슨 위원들까지 온통 사상검증하느라 바쁜 나리님들이 '빨갱이들 사면 복권 왠 말이냐'고 좀 나서서 이참에 아예 내 양심 대신 국가보안법이 도마에 오르는 계기가 되었으면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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