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사회학]촛불시위에 나선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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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흥재(epogue21)등록 2003.01.10 11:55
“그대 계속해서 가라. 그러면 어딘가에 닿게 되리라"
- ‘존재의 형식’ 중에서 (방현석, 창작과 비평 2002 겨울호 218쪽)


연재를 시작하며

낯설다. 20여일만에 글을 쓰기 위해 마주한 모니터의 커서는 계속 깜박이며 나를 불안하게 한다. 거창하게 문학이, 소설이 한 시대의 ‘문제적 개인’을 통해 그 시대의 삶의 전형을 보여준다는 문학 사회학적인 해석을 곁들여가며 글을 쓸 용기가 내게는 없다. 다만 내가 사는 삶과 그 삶의 행위들이 행해지는 사회라는 것을 조금이나마 가깝게 들여다보기 위해 택한 한 수단으로서의 소설 읽기를 즐겨했던 한 개인으로서, 지금은 그 행복한 기회마저 세상살이라는 것에 거의 빼앗기다시피 살아가는 불행한 현실에서, 나는 진정한 ‘나’이기 위해 무엇인가 하여야 한다.

소설을 읽는 독자인 나는, 그 때만큼은 객체가 된다. 또한 주체인 내가 객체가 되어 있는 또 다른 ‘나’를 볼 수 있음으로, 내가 본 세상과 세상 속에 내동댕이쳐져 있는 나를 보는 경험은 경이롭다. 내 의식의 성장기를 함께 했던 그 소설공간의 세계가 나는 지독하게 그립다. 적어도 그 때에는 내 사유의 틀은 단단하지 않았다. 지금은 어떤가? 사유랄 것도 없는 내 생각의 창고에는 먼지만 수북하고 나는 고형화된 살이의 방식에 따라 기계적인 일상을 산다. 그런 내가 감히 비평의 언저리에도 걸어둘 수 없는 잡글을 쓰며 ‘가짜와의 한판 승부를 벼른다’는 낯뜨거운 확신을 가진 적이 있었음을 이제는 고백해야겠다.

해(年) 끝과 해 시작 며칠간을 반도의 끄트머리를 여행하면서 다시 책속으로 돌아가야 함을 깨달았다. 쓰기 전에 읽어야함이 정직한 것임을 뒤늦게 알았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연재를 기획한 것은 이런 나의 깨달음을 다잡기 위한 방편이다. <소설 사회학>이란 지면을 채우게 될 것이 무엇인지는 나도 아직은 모른다. 때로는 얼치기 문학비평이 될 수도 있겠고 독자의 눈으로 본 작품론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에 대한 나의 졸렬한 인상일 수도 있겠다. 나는, 그러나, 나의 열의와 시간의 여유가 허락하는 한, 내가 사는 세상의 일들과 관련하여 소설 속에서 그와 같은 사건과 현상들의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글이 걸리는 매체의 성격에 맞게 오늘을 위하여 소설 속을 뒤질 것이다. 물론 내 독서의 기억이 80년대를 끝으로 거의 정지하였음으로 이미 나는 새로운 실패를 예감하고 있음을 아울러 고백한다.

촛불시위에 나선 사람들
- “무언가를 꿈꾸려는 자는 그 꿈대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위 같은 책 239쪽)


아이디 ‘앙마’로 촉발된 촛불시위가 그 앙마로 인해 위기를 맞고 있는 저간의 사정을 신문과 인터넷 뉴스를 통해 보고 있는 요즘에 나는 촛불시위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란 무엇일까 다시 생각해본다. 주검이 되었기에 이름을 남긴 효순과 미선에 대하여는, 그 죽임의 범인이 미군 장갑차의 통신장애라는 경악할 판결도 그만 언급하기로 하자. 앙마의 비도덕적인 기사작성의 행태를 구실삼아 우리들의 순수한 의지마저 왜곡보도하는 족벌언론의 망종도 무시하기로 하자. 오늘 나는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모인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그 시린 겨울밤에 거리로 나서야 했을까’만 생각하려 한다.

미국, 미군, 북한, 핵 등등... 이런 단어들이 언론에 활자화되고 우리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게 되면 나는 습관처럼 베트남, 흔히 월남이라 부르는 그 나라를 떠올린다. 위에 나열된 단어들은 곧 우리의 분단과 그 분단으로 인한 질곡과 수난의 역사를 상기시킨다. 또한 앞으로 견뎌내야하고 마침내는 극복해야할 역사의 험난한 파고를 떠올리며 지레 겁을 먹는다.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인 내게, 이제 겨우 초등학교에 다니는 나의 아이들에게까지 분단은 엄연한 현실로, 무엇보다 무거운 시대의 짐으로 그들의 삶위에 얹어져 있다. 그 분단을 생각하면 나는 베트남과 조우한다. 훨씬 가까운 시기에 분단을 극복한 동.서독이 아니라 베트남이다. 왜일까?

같은 아시아권의 국가라서, 아니면 군국주의 일본의 군화발에 짓밟힌 경험을 공유하기 때문에, 아니다. 내가 우리의 분단현실에 베트남을 주목하는 것은 우리의 분단이 바로 외세의 개입과 그들의 세계지배전략의 이해관계에 따라 행해졌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우리보다 훨씬 길고 고통스런 외세의 지배를 당했던 베트남의 인민들은 그래도 그 분단을 극복하였다. 그 점에서 그들은 행복하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부럽다. 물질적 삶에서 우리와는 비교되지 않는 처참한 살이를 살망정 그들은 다른 나라 군대의 궤도차량에 자신들의 꽃다운 소녀가 깔려 죽지 않는다.

나는 주사파일까? 베트남의 인민들은 호치민을 위해서 호치민 정권을 위해서 동족과 전쟁하지 않았다. 또한 권력을 부자세습하는 괴뢰정권의 적화야욕을 위하여 동족을 살육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나라에 제 멋대로 들어와 자신들의 고유한 ‘인민의 삶’과 ‘인민의 가치와 정신’을 유린하는 외세와 싸웠을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대지와 정신을 외세에 지배 당하지 않기 위해 프랑스와 싸웠고 일본에 맞섰으며 미국에 대항하며 정글에 피를 뿌리고 자신의 육신을 묻었다. ‘통킹만 사건’으로 말해지는 북폭(北爆)은 친미정권의 수립과 대리지배를 획책한 미국의 만행이었다. 베트남 인민들은 제국주의 미국에 저항하며 식민지 백성으로 살기보다는 차라리 정글의 외로움과 굶주림을 택하였다.

아! 베트남, 나는 촛불시위에 나선 사람들을 생각하다가 그곳 베트남의 시인과 만난다. 방현석의 ‘존재의 형식’은 그 지난한 해방전쟁의 와중에서 겨우 살아남은 해방전사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지금은 시인이며 소설가이고 아시아에서 주목받는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기도 하다. ‘레지투이’ 그의 이름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시인 ‘반레’로 불려지길 원하고 기억되기를 원한다. 본문을 인용하면

<레지투이는 북부의 난빈이 고향이었다. 육지의 하롱베이로 불리는 아름다운 난빈의 지탄이란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1966년,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자원입대해서 베트남전쟁에 뛰어들었다. 그의 나이 겨우 열일곱살 때였다. 호치민루트를 타고 오로지 걸어서, 3개월만에 사이공에 도착했을 때 그의 부대원들은 이미 3분의 1로 줄어들어 있었다. 전투목적지로 이동해오는 동안에 그의 동료 3분의 2는 전투 한번 해보기 전에 죽었다. 굶어서 죽고, 말라리아에 걸려 죽고, 미군의 폭격에 맞아 죽고, 부비트랩에 걸려 죽고....>

한 때 우리가 북괴뢰 집단과 함께 가장 증오하도록 교육 받았던 소의 베트콩(남부 월남의 해방전사)과 출신이 비슷하다. 그렇다면 그는 왜 자원입대하여 전쟁에 참여하였을까? 그는 왜 공산주의자가 되었으며 우리의 분단현실에서 만나는 공산주의와 그의 공산주의는 마찬가지인 것인가?

<문태가 레지투이에게 아직도 공산주의자냐고 물었을 때 그는 그렇다고 했다. 문태의 물음은 한걸음 더 나아갔다.
“목숨을 걸고 만들려고 했던 것을 당신은 이루었다고 생각해요? 300명의 당신 부대원들 중에서 295명이 목숨을 버려가며 이루려고 했던 나라가 지금의 베트남인가요?”
“우리가 원했던 것은 대단한 것은 아니었어요. 굶주리지 않고, 외국의 군대가 베트남의 사람과 대지를 유린하지 않는 세상을 바랐을 뿐이에요......”>

<“이렇게 살기 위해서 싸운 건 아니잖아요?” (.....)
“우리는 우리 세대가 해야 할 일을 끝냈을 뿐이지요. 다음 세대에게는 또 다음 세대가 해결해야 할 일이 기다리고 있지요. 우리가 다 해버리면 다음 세대는 뭘 하고 살겠어요? 어떤 세대도 다음 세대가 할 일을 미리 할 수는 없지 않을까......”>

<“... 제가 보기에는 참 위태로워 보이는 이 아름다움을 얻기 위해 당신과 당신의 친구들이 바친 희생은 너무 큰 것 아닌가요....”
“우리는 공산주의를 위해 싸운 것이 아니고 공산주의를 살았어요.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남쪽에서 우리는 십년을 싸웠지만, 최소한 그 십년 동안 나와 내 친구들은 공산주의 삶을 살았어요. 자기가 살지 않은 것을 남에게 요구할 수 있겠어요? 나의 삶을 지탱해온 것은 거창한 이념이 아니라 어머니가 우리 형제들을 기르면서 가르쳐준 사소한 것들이었어요. 내가 군대에 지원해서 전쟁터로 떠나던 날 어머니는 말했어요. ‘아들아, 그 모든 사람들로부터 좋은 말을 들을 수는 없다. 사람들이 너를 미워하고 욕할 수는 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누구한테서도 경멸받을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


이 베트남 시인의 말속에서 나는 한국전쟁과는 다른 그들만의 전쟁과 해방의 의미를 발견한다. 기꺼이 인민이 되고자 했던 베트남 시인의 동료들은 ‘거창한 이념’을 위해서도, 공산주의를 위해서도 아니고 본래의 ‘공산주의의 삶’을 살었을 뿐이고 ‘외국의 군대가 자신들의 대지를 유린하지 않는 세상’을 위해 가공할 폭력집단 미국에 맞서 땅굴을 팠다.

<구치는 사이공 시내에서 한시간 반 거리 떨어져 있는 마을이었다. 해방전선은 그곳을 중심으로 총연장 250㎞의 땅굴을 파고, 사이공 시내를 드나들며 미국과 싸웠다. (....) 단돈 1원도 받지 않고 오로지 호미와 망태기만으로 24년에 걸쳐 파놓은 250㎞의 땅굴을 보면 전혀 다른 베트남이 있다는 사실을 소스라치게 깨닫게 된다>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인 우리들도 바로 베트남 시인과 그의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자유대한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에 의하여 결정되어져야 한다는, 우리의 대한민국은 우리 민중의 대지라는 소박한 믿음으로 삼삼오오 촛불을 들고 모여들었을 것이리라. 싸움 한번 해보지 못하고 정글에서 죽어가던 베트남 시인의 동료들의 전쟁이 과연 우리가 생각하듯이(우리의 전쟁과 같이) 이념의 광기가 학살과 살육을 부르던 전쟁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대지에 자신들의 정신을 묻기 위해 먼저 자신들의 살과 뼈를 묻은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여전히 이념의 맹신과 광기를 부추기는 언론과 정상배가 존재하는 오늘 우리의 땅에 영원히 묻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꿈을 가위 눌리게 하는 이념의 공포이다.

자유한 의지로 “무엇인가 꿈꾸려는 자는 그 꿈대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촛불을 켜 밝히려는 세상을 위하여
- “그대 계속해서 가라. 그러면 어딘가에 닿게 되리라.”


효순과 미선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이름일까? 김춘수식으로 말하여 우리가 그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그 이름을 부를 때 그들은 우리에게 무엇이 되어 만날까? 먼저 간 죽음이 주는 의미를 레이투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죽어간 친구들을 대신해서 자신이 산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나중에 친해졌을 때 이런 말을 하더군요. 내 앞에 걸어가던 친구가 지뢰를 밟고 죽었기 때문에 내가 살았지, 함께 싸웠던 그들이 아니라면 내가 어떻게 살아 있을 수가 있겠어, 라고”>

이 베트남 시인은 그래서 자신의 남은 삶을 자신의 것으로 살기 보다는 죽어간 친구들이 살아가려 했던 삶을 사는 것으로 그들의 죽음을 부활시킨다. 그의 시는 따라서 ‘전쟁이 안겨준 비애로 전쟁을 넘어서려는 정신의 바다를 이루’고 시인의 이름은 이제 레지투이가 아니고 ‘반레’가 된다.

<레지투이가 전선에서 만난 친구 중에서 시인을 꿈꾸던 이가 있었다. 전쟁터에서도 그 친구는 틈만 나면 시집을 읽고, 시를 썼다. 그러나 그 친구는 수많은 동료들이 그랬듯이 전선에서 열아홉살의 나이로 죽었다. 시인이 되고 싶었지만 시인이 되지 못한 채 죽은 그 친구의 이름이 반레였다.>

효순과 미선은 반레보다 더 어린 열다섯의 나이에 죽었다. 그녀들이 무엇이 되고 싶었는지는 모른다. 어찌 되었든 그녀들은 어느새 우리에게는 베트남 시인의 친구처럼 다시 살려내야 하고 잊어서는 안되는 이름이 되었다. 광장에 촛불을 들고 모인 우리는 비록 시인처럼 아름답고 성결한 언어로 나를 대신해 앞서 죽어간 친구들을 위해 시를 쓰고 영화를 만들 수는 없어도 그녀들이 살고자했던 세상을 위해 오늘의 결의를 기억하여야 한다.

반레로 살아가는 시인 레지투이는 그 세상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서울에서 온 자네 친구 말이야. 내일 새벽 비행기로 떠난다면서? 잘 해주게. 친구가 친구를 이해해주지 않으면 누구와 더불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나”>

친구와 친구가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 그 세상을 위해 우리들은 광장으로 모여 들었다. 우리가 미국에게 주장하는 이 소박한 요구를 반드시 들어야할 부시의 미국과 사대망상증 환자들만이 못 듣는다. 아니 일부러 듣지 않으려고 한다. 촛불을 켜고 우리는 기도한다. 한국과 미국이 서로를 이해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위해 미군만 앉기 편한 소파를 바꾸자고, 친구를 죽이고 시침떼는 그 고약한 버릇을 사죄하고 용서를 구하라고 기도한다. 친구를 추모하며 친구를 죽인 가해자까지 친구로 삼겠다는 촛불의 헌신을 반미, 불순이라니...

아름다운 시인의 충고에 재우와 문태는 불편함을 털고 친구로 화해한다. 또한 창은과도 화해할 용기와 힘을 얻는다. 재우는 창은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에 베트남 택시안에서 운전사가 행선지를 묻자 대답한다.

“명동성당”

시인 반레가 말해주는 아름다운 세상은 곧 친구가 친구를 이해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이다. 레지투이가 입대할 때 들려주던 어머니의 말씀이 이어진다. 문태의 질문에 시인은 어머니에 대하여, 어머니가 가르켜준 ‘마음가짐’에 대하여 들려준다.

<“어머니.... 큰 배움은 없었지만 우리 형제들에게 늘 사람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서 말씀하셨죠.”
“뭐 별것 아냐. 친구를 만나면, 먼저 어떻게 하면 이 친구와 즐겁게 지낼 것인가를 생각하는 마음가짐, 함께 지낼 때는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헤어질 때 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지를 생각하는, 뭐 그런 마음가짐...”>


촛불을 들고 모인 우리들이 꿈꾸는 세상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 당장에 우리의 집회와 행동에 대하여, 그 기사를 보도한 매체를 향하여 던지는 수구언론과 수구당의 정신나간 정상배들이 시인의 어머니가 들려주는 이 마음가짐을 지금이라도 이해하고 스스로 노력한다면 구태여 우리의 입으로 개혁을 논할 필요가 없으리라. 그러나 우리의 그 기대는 요원하다. 그렇지만 촛불을 들고 의심없이 나선 우리는 내일을 위해 정글과 땅굴에서 죽어간 시인의 친구이자 베트남 인민인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꿈을 향해 반역도 서슴치 않을 것이다.

“그대 계속해서 가라. 그러면 어딘가에 닿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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