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형식 <8월의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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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구(cedaskr)등록 2002.08.22 17:58
한 나라 위정자의 무능과 기만이 국민의 생존을 어떻게 만신창이로 갈가리 찢어놓을 수 있는지를 확연히 보여준 1997년 11월 이후 몇 년간을 후세 역사는 아마 IMF시대라고 규정할 지도 모른다.

하루 아침에 한 가정도 아닌 한 나라의 살림이 거덜나고 대한민국은 국제적인 문제아가 되었다. 김영삼의 무모한 세계화 전략이 초래한 대한민국의 전세계적 자본주의의 무풍지대화의 비참한 말로는 수많은 가정의 생존의 해체로 귀결되었다.

멀쩡하게 잘 다니던 남편이, 아빠가 어느 순간 가정을 버리고 지하철 노숙자가 되고, 장밋빛 미래를 꿈꾼 대학 졸업생들은 졸업과 동시에 광범위한 산업 예비군의 풀을 형성하게 되었다. 앞만 보고 달려온 사람들에게 IMF는 그들의 전망을 일시에 가렸다. 그들에게는 이제 더 이상 전진은 불가능했고, 그렇다고 현재 그 자리를 지키는 것만도 버거웠다. 그들은 과거를 더듬어 보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세기말은 집단적인 종말의 시간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앞을 내다보기보다는 지나온 과거를 회고하고 그것으로 불투명한 전망을 대신했다.

그 시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것을 잃고도 남아 있는 것들을 꺼내서 헤아려보는 것이었다. 어떤 소설의 제목처럼 우리는 '우리가 가장 나종까지 지닌 것'의 목록을 정리했다. 그래서 남은 것은 가족과 기억, 그것만큼 확실한 것은 없었다. 문밖에는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치거나 날선 매서운 바람이 몰아쳐도 아버지, 어머니가 있고 아내나 남편이 있다는 믿음, 그것만큼 인간을 따뜻하게 감싸는 것이 있을까. 그리고 아무리 험하고 못나고 끔찍한 경험이지만 그 과정 속에 내가 있다는 그 존재감만큼 확실한 것이 있을까.

사람들은 평소에는 애써 찾지도 않던 가족들을 생각하고, 지나간 시간들을 소환하면서 가슴을 저미고 눈물을 머금으며 아스라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것은 쓰러진 자의 비통에서 나오는 눈물이라기보다는 지금까지 생존을 이어온 자아에 대한, 아니 생존 그 자체에 대한 경의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이었다.

IMF의 충격에 휩싸여 휘청거리고 있는 우리들에게 한 편의 영화가 찾아왔다.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 사람들은 이 영화가 나왔을 때 멜로영화 붐의 끝물을 탄 영화가 또 한 편 나왔겠거니 했다. 사람들은 멜로영화를 하대한다. 멜로영화는 우리 영화의 뿌리이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영화, 손수건을 꼭 챙겨서 봐야 하는 영화, 그 멜로영화를 우리는 혐오하면서도 사실은 꽤 즐기는 이상한 습성을 지니고 있다. 멜로를 흔히 신파라고 얘기하는 것, 그건 여전히 우리가 멜로로 표상되는 근대의 감수성 안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삶을 정리해 가는 사진관 주인 정원과 주차단속요원 다림 사이의 채 꽃을 피워보지도 못한 사랑 이야기를 주 플롯으로 하고 거기에 정원을 중심으로 연결되는 일상을 채워 넣고 있다. 점차 시력을 잃어가는 사진사 이야기와 김광석의 영정 사진에서 모티프를 얻었다는 이 영화는 죽음을 앞에 둔 30대 초반의 쇠잔해 가는 남자와 20대 초반의 풋풋한 젊음의 향내를 뿜어내는 여자의 이미지가 끝임없는 비교 효과를 내면서 종국에는 죽음과 삶, 쇠잔과 활기가 중화되어 죽음도 삶도 아닌, 쇠잔도 활기도 아닌 그 사이에서 중화된 이미지를 발하면서 정원과 다림의 캐릭터가 화합한다.

<초록물고기>, <접속>, <은행나무침대>, <넘버3> 등 그 당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던 한석규가 맡은 정원 역은 <초록물고기>와 더불어 그의 캐릭터가 가장 강하게 살아난 배역이다. <쉬리>, <텔미섬씽>같은 영화 속의 경찰 캐릭터는 그의 입장에서는 분명 신중한 선택이었을 것이지만, 그는 공적 영역 속에 놓인 캐릭터로서는 충분히 발휘될 수 없는 변두리적인 감수성을 가진 배우이다.

<서울의 달>에서 시청자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한석규가 대중적으로 강력하게 어필할 수 있었던 건 그다지 깔끔하게 떨어지지 않은 외모와 절묘하게 어울리는 서울 변두리 기질의 억센 캐릭터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채 사랑의 싹을 틔워보지도 못한 채 생을 마감해야 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멜로적인 상투성을 멀찍이 벗어난 영화다. 90년대 그 어떤 영화를 대고 봐도 <8월의 크리스마스>만큼 깊은 인상을 남긴 영화는 드물다. 사람들은 8월이 되면 해마다 비디오 가게 한 구석에서 이 영화를 빼들고 크리스마스가 다가 와도 이 영화를 본다. 무엇이 사람들을 이처럼 <8월의 크리스마스>에 깊은 애착을 느끼게 하는 것일까.

그것은 마치 8월에 느닷없이 닥치는 크리스마스처럼 죽음이 우리에게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보였던 때문 아닐까. 죽음이라는 보편적 실존의 문제 앞에서 그 운명을 근접한 현실로 마주쳐야 하는 정원의 위치는 우리가 소중하게 간직한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한번쯤 되묻게 한다. 정원에게 그것은 무엇인가. 이제는 자신을 잊어달라고 얘기하는 여자의 사진을 떼버려야 하고, 자기 없이 어떻게 살아나갈까 한없이 걱정스러운 아버지의 생계와 일상을 위해 준비하고, 아무도 챙겨주지 못할 자신의 영정 사진을 차분하게 찍어두는 일. 그것은 삶 앞에서 겸허해 지는 일이다. 그 겸허함을 사람들은 배운다.

다림과의 만남은 영화 속에서 결코 작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이지만, 이들의 만남은 흔한 멜로 영화에서처럼 감정을 과장되게 표현되지 않는다. 카메라 앵글을 이동하거나 특정 인물을 클로즈업함으로써 조작하거나 과장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화면은 마치 일상을 포착하는 우리의 안구와 비슷한 초점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정원의 죽음에 대한 명상을 담은 메시지는 큰 울림을 가지고 다가온다.

"나는 어렸을 때 아이들이 모두 가버린 텅 빈 운동장에 남아 있기를 좋아했다. 그곳에서 내 곁에 없는 어머니를 생각하고 아버지도,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사라져버린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친구 아버지의 장례식 뒤에 이어지는 초등학교 운동장 신에서 아이들이 뛰어 노는 모습을 보며 정원은 이렇게 얘기한다. 정원은 이미 아주 오랜 시절부터 자신의 내면에 죽음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영화 속에 정확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것은 부재하는 어머니로부터 기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에게 모성이 부재하며, 애타게 그리운 존재로만 드러난다는 것, 그것은 정원의 캐릭터를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그것은 가족 이미지의 결락이다. 한 부모 가정이 늘어가는 요즘 추세로 봤을 때 가정에 부모 중 한 명이 없다는 건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비교적 최근의 문제 의식일 뿐, 이 땅에서 30년 이상을 살아온 사람에게는 큰 결락 사항이 아닐 수 없다.

정원의 의식 언저리에 존재하는 어머니는 모성의 이미지이며, 자궁의 이미지이며 이 땅에서 성취될 수 없는 소망이다. 그는 부재를 견디며 현실의 결락을 매우며 살아왔다. 그가 서른살이 넘도록 아버지 곁을 떠나지 못했던 것은 정원이 아버지에게는 어머니의 자리를 보충해주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아들에게 아버지는 결코 살갑지 않은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원은 아버지에게 비디오 사용법을 몇 번이나 설명하고 결코 능숙해지지 못하는 아버지에게 화를 낸다.

아버지는 살갑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에 결코 화조차도 낼 수 없는 존재임을 이 땅의 아들들은 너무나 잘 안다. 정원을 통해서 강하게 부각되는 것은 정원이 가장 나중 지닌 것이 결국은 자기 주변 가장 가까운 존재인 가족이라는 사실이다. 이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강하게 박힌 것은 결국 흔히 가족의 가치에 대한 재인식이라고 말해지는 인간 삶의 원형에 대한 재인식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가족의 가치에 대한 재인식이라는 상투적인 이데올로기를 설파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가족을 가부장제적 억압의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것을 환기시키는 그 어떤 재현물에 대해서도 반동과 보수라는 딱지를 붙일 생각부터 한다. 그러나 가족이 비판받아야 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가족의 위계 질서가 억압적이고 이 억압이 국가주의의 충실한 훈련장이자 충실한 보증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아닌 그 모든 것을 배제하는 배타적 감수성을 배양하기 때문이다.

이런 감수성으로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면 이 영화는 엄마 없이 자란 아이의 어둠이 결국 비관적인 감수성을 키웠고, 끝내 죽음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로 무의식적으로 귀결짓는 해석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다행인 것은, 이 영화의 내러티브의 시작이 어떤 이미지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허진호 감독의 말처럼 이 영화는 김광석의 영정 사진에서 시작된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오래 전부터 준비한 사람처럼 김광석의 영정 사진은 오히려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그 환한 죽음은 어디선가 들은 시력을 잃어가는 사진사 얘기와 겹쳐져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그것들이 솜씨좋게 응집되어 시각적 내러티브를 이끌어낸 것이다. 이 영화를 통해 궁극적으로 공감되어야 하는 것은 죽음 앞에서만 가늠되어지는 시간의 양과 질을 되새기는 경험의 감수성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물론 정원 옆에 다림이라는 극적인 안타고니스트 캐릭터가 없었다면 정원의 캐릭터는 대화적인 역동성을 상실했을 것임은 분명하다.

IMF 경제통치도 끝나고 우리는 다시 그 긴 죽음의 터널을 빠져나왔다. 그 죽음 앞에서 우리는 한 순간 생에 대한 겸허함을 배웠고, 삶을 구성하는 것이 그다지 대단한 것이 아님을 배웠다.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하는 집에서 가족과 함께 일을 해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먹고 자고 얘기하고 웃고 가끔 시간들을 반추하는 것, 그것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삶의 모습임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죽음을 끊임없이 유예시키는 행위이지만 어떻게 보면 죽음 앞으로 한 발짝 한 발짝 내딛는 일이기도 하다.

정원의 8월부터 크리스마스까지 그 짧았던 몇 달 간 그가 보여주었던 그 무수한 일상처럼 말이다. 이 영화가 낯설었던 건 우리의 일상 앞에 죽음이 항상 함께 한다는 사실을 그다지 깊게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11월의 IMF가 그렇던 것처럼 말이다.

이 영화가 끝나면서도 깊은 여운을 남기는 것은 다림이 정원의 아버지가 출장을 나가기 위해 스쿠터를 타고 나가는 시점과 겹쳐져 정원이 사진관에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을 보고서 흐뭇하게 걸음을 옮기는 장면에서 나온다. 이때 보이스오버로 한석규의 내레이션이 등장한다.

"내 기억 속의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간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준 당신께 고맙다는 말을 남깁니다"

모든 것이 과거로, 정리해야 할 대상으로만 존재하던 정원의 삶에서 다림은 현재진행형의 일상이었으며, 끝내 정리할 수 없었던 사건이었던 것이다. 모든 것을 과거로, 정리해야 할 것으로 간직한 죽음은 얼마나 쓸쓸할까? 그 죽음이 조금 더 생명력을 갖고 관객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다림을 통해서 얻은 생명력이다.

정원 역을 맡은 한석규는 어느 인터뷰에서 영화의 본질을 추억이라고 얘기한다. "떠올리면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다시 보면 눈이 아려오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의 기억", 그의 말마따나 <8월의 크리스마스>는 자신의 생각을 가장 잘 투영한 영화이다.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는 24프레임 연속 사진은 모노프레임을 통해 시간을 포획하고 자신의 영원성을 보증받으려는 무수한 사람들의 욕망을 보여준다. 그것은 스트림 플레이 모드의 동영상을 간직할 수 없는 후광을 가지고 있다. 먼 곳에 있지만 꼭 한번만 존재했던 것같은 그 느낌을 사람들은 사랑한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 수동카메라의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90년대 만들어진 가장 작은 목소리로 가장 큰 울림을 주는 영화이다. 죽음의 문화를 제대로 키워볼 여유조차 없던 우리에게 IMF가 마련한 그 죽음의 공간에서 이 영화는 일종의 상징적 죽음 체험이었다.

허진호 감독은 90년대 우리 영화가 내놓은 가장 소중한 결실이다. 그는 서른이 넘어서 영화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영화 감독은 처음부터 대놓고 할리우드키드나 영화광이어야 한다는 통념을 깨는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때늦은 시작은 훨씬 고생스러웠겠지만 그 때늦은 시작이 오히려 그에게는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 사이 영화 바깥에는 많은 걸 느끼고 영화를 한층 폭넓은 관점에서 볼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그의 두 번째 작품 <봄날은 간다>가 작년 개봉되었다. 이 영화에 대한 얘기는 다음에 미루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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