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이 '조선일보'에게

'스폐인 내전' 당시 보여준 언론의 비겁한 호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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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용민(hanfan)등록 2002.07.04 12:27
무슨 일이든간에 매번 강경파들이 그릇된 방향만이 진실이라고 목이 터져라 외치게 마련이다. 강경파들은 시대가 혼란하면 할수록 국민들로 하여금 상황판단을 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기막힌 홍보를 하곤 한다. 미국의 매파가 아프가니스탄 공격을 주도했고, 한국의 호전(好戰)세력들이 냉전구도를 옹호하고 있듯이 말이다.

월드컵 3-4위전을 앞둔 시점에서 발생한 서해교전은 한반도의 대치상황이 '우발성'에 의해 어느 정도로 긴장이 고조될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는 민족의 불행이며, 누구도 큰 소리로 누굴 비난할 수 없는 사안이다. 민족의 불행한 단면이기에 그러하다. 특히, 민족의 화해보다는 대립과 상호비난에 열 올려 하던 일부 호전세력들에게 있어선 더 더욱 상황판단을 할 필요성이 존재한다.

그런데 애매한 상황에서는 늘 호전세력, '조선일보'가 상황을 주도하려 하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조선일보는 교전규칙을 '선제공격'이 가능하도록 개정할 것을 요구해 관철시켰고 이제는 군관계자의 책임론을 들고나섰다. 그것이 우발적이든 아니든 교전이 발생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며, 북한의 공격에 의해 아군에 전사자가 발생했다는 점만 부각시키고 있다. 우리 어선이 수 차례나 어로제한선을 넘었다는 측면은 '중요하지 않다'고 외면하면서, '모든 게 DJ의 햇볕 때문이다'고 강하게 비난하고 있는 형국이다.

나는 왜 조선일보가 저렇게 분노를 대변하고 있는지 그 '정치성'에 대해 고민에 고민을 해봤다. 일순간 조선일보가 돼서 그의 분노를 나누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분노는 순수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랫만에 어쩔 수 없이 보게 된 그들의 사설과 기사를 놓고 보면 '북한'을 비난하는 것 이상으로 'DJ'를 그리고 '햇볕'을 비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건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 그들의 순수성을 의심하게 된 동기는 사설의 제목이 이성이 아닌 감성에 호소한다고 느낄 때부터였다.

고민에 고민을 해봤다. 왜 조선일보가 저렇게 분노를 주도하지 못해 애를 쓰고 있을까. 몇 가지 추론이 가능했다. 이는 추론일 뿐이지만 내 한계일까. 더 이상의 가능성은 생각나지 않았다.

1. DJ를 맹공격해서, DJ의 햇볕을 맹공격해서 그의 햇볕을 계승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현재로선 유일한 대선후보 '노무현'을 코너로 몰 호재로 인식하고 있다. 또 그렇게 쓰고 있기도 하다. '말 못하는 노 후보'라는 기사로 이미 노 후보를 공격하고 있지 않은가.

2. 8·8 재보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 논쟁을 부각시킬수록 수세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는 민주당을 압박하고 음으로 양으로 지원하고 있는 한나라당 후보들의 당선을 위하여...이 역시 정치적인 차원에서 유추한 나름의 이유가 되겠다.

조지 오웰이 분노한 '전쟁을 부추기는 언론'

조선일보가 입에 거품을 물 무렵, 나는 조지 오웰이 스폐인 내전에 직접 참여하여 쓴 '카탈로니아 찬가'를 읽고 있었다. 특히, 전쟁을 다루는 '언론'에 극도로 실망한 오웰의 직접적인 메시지 대목을 읽고 있었다. 실로 절묘한 순간에 조선일보의 목소리와 조지 오웰의 목소리를 다 듣게 된 셈이다. 하늘이 주신 기회라고나 할까.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은 맘만 먹으면 조선일보의 목소리를 접할 수 있을 것이기에 이 지면에서는 조지 오웰의 '언론비판' 대목만을 다루기로 하겠다.

조지 오웰의 목소리를 인용하는 이유는, 그가 '1984년'등을 통해 부각된 유명한 작가라는 점 때문이 아니라 스페인 내전에 직접 참여한 사람으로서 가장 잘 현장의 목소리를 전했다는 측면 때문이다.

"(당시 공산주의계열 언론이 통일노동자당 사람들을 비난하며 '유사 파시스트'라고 불렀던 것을 비롯한 여러 비아냥을 거론하며) 어쨌든 이것이 그 언론들이 우리에 대해 하는 말이었다. 우리는 트로츠키주의자, 파시스트, 반역자, 살인자, 겁쟁이, 간첩 등등이었다. 솔직히 기분 나쁜 일이다. 특히 그런 비난을 자행하는 언론인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들것에 실려 전선을 내려오며 모포 사이로 눈부신 듯 바깥을 내다보는 하얀 얼굴의 열다섯살짜리 스폐인 소년을 보면서, 이 소년이 위장한 파시스트임을 증명하는 팸플릿이나 쓰고 있는 런던이나 파리의 말쑥한 사람들(언론인들)을 생각한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다.

전쟁의 가장 끔찍한 특징 중 하나는 모든 전쟁 선전물, 모든 악다구니와 거짓말과 증오가 언제나 싸우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는 점이다. 노선은 달랐지만 '전선'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언론에서 비난했듯이 나를 결코 트로츠키주의자나 배반자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런 일은 후방의 기자들이 담당했다.

우리에게 반대하는 팸플릿을 쓰고 신문에서 우리를 헐뜯는 사람들은 모두 안전한 집에, 혹은 기껏해야 발렌시아의 신문사 사무실에 있었다. 총알과 진창으로부터 수백 킬로미터는 떨어진 곳이었다. '노선' 사이의 불화에서 비롯된 비방은 물론이고 모든 일반적인 전쟁 선전 활동, 즉 탁자를 치며 열변을 토하거나, 과장된 영웅담을 늘어놓거나, 적을 헐뜯는 일들 역시 보통 싸우지 않는 사람들, 많은 경우 싸우느니 차라리 백 킬로미터 가량 먼저 달아나겠다고 하는 사람들, 즉 언론인에 의해 이루어졌다. - 카탈로니아 찬가 중에서"

그리고... 조선일보

아군의 병사들은 죽거나, 다쳤으며 북한은 고대하던 북-미 대화를 저 멀리 기약할 수 없는 시점으로 미뤄놓아야 했다. 남한 사회는 다시금 '햇볕'을 놓고 이념논쟁에 접어들 모양새다. 우리 민족의 불행이다. 가슴을 칠 일이다. 그런데 조선일보가 있었다. 가슴을 치지 못하고 그것을 자신을 향한 분노로 바꿔놓는 기막힌 대변지가 있었다. 조선일보는 그 모든 게 북한탓, 그리고 햇볕탓이란다.

이런 논조의 신문이 최고의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이 기막힐 따름이다. 나는 조선일보같은 신문도 나름의 영향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생각은 자유'라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 시민사회가 다원성에 기반하고 있다는 측면을 십분 인정했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번 서해교전을 둘러싼 광란의 보도를 접하는 지금, 나는 참담한 느낌만 들 뿐이다. 그들은 새록새록 진실이 드러나면서 더욱 강경한 논조로 치닫고 있다. 진실을 오도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없고, 주장만 있는 것이다. 특히, 나는 우리 어선의 월선 대목이 드러나자 북한탓, 햇볕탓을 더욱 강하게 들고 나오는 조선일보의 모습에서 '광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울어야할지, 웃어야할지... 나는 침묵할 뿐이다. 조선일보의 보도태도의 정치성을 생각하노라면 분노할 수밖에 없는데 많은 구독자들이 그럼에도 조선일보를 애독한다는 측면이 내 분노를 식게 만들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측면이 딜레마다. 그럼에도 독자들이 조선일보를 보고 있다는 대목... 말이다.

말할 수 없는 고통속에서도 끝까지 싸우셨던 그분들에게 다할 수 없는 애도와 감사를 바치며 이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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