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분과 열광의 뒤안길에서(월드컵 관전기)

망각의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에게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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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환(haejiggy)등록 2002.06.17 15:59
한국 축구가 신화를 창조해 가고 있다. 이탈리아와 8강전을 앞두고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과연 한국은 새로운 전설을 만들어 낼 것인가.

세계를 놀라게 한 것은 또 있다. 한국팀 경기가 있는 날이면 도시마다 거리마다 전국이 붉은 색으로 넘실대며 열광하는 응원이 그것이다. 또 있다. 한국인 그들은 응원의 이니셜(initial)로 천사를 거부하고 악마를 선택 했다. 그들은 기꺼이 붉은 악마가 된 것이다.

한국의 현대사에 조금만 관심을 가진 사람이면 이러한 현상이 하나의 반역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불과 4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의 붉은 색(red)은 괴뢰 정권의 상징이었으며, 내 편이 아닌 모두는 '빨갱이(사상이 붉은 자)'이고 빨갱이는 곧 악마라는 등식이 통용되던 사회였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붉은 색을 의식적으로 꺼려했으며, 특히 다중이 붉은 색의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조차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한국에는 지금도 붉은 악마(빨갱이)를 잡는 국가보안법이 엄연히 살아있는 나라가 아닌가.

한 때 빨갱이(붉은 악마)를 잡는 것이 최고의 애국이었던 국가에서 연일 붉은 악마를 외치며 열광하는 이 기이한 현상을 사회학자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인을 사로잡았던 레드 컴풀렉스(red coplex)에 대한 무의식적 반항은 아닐까.

자유민주주의라 하면서 좌와 우로 대칭되는 사회를 거부했던 나라 대한민국, 남북이 형제라 하면서 쳐죽여야 할 불구대천의 원수로 가르쳐 온 나라 한국, 친일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했기에 용서되어야 한다면서도 전쟁 중에 살기 위해 붉은 깃발을 들 수 밖에 없었던 민중에게는 빨갱이라는 색을 칠해 그 자손까지도 기를 죽여온 나라 코리아, 그 대한민국에 때 아닌 빨간 물감이 넘친다니 신기하지 않은가.

또 있다 신기한 일은. 참으로 알다가 모를 일이 있다. 남과 북으로 찢어져 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못하는 한국인들, 대한제국 이래 도심 한복판에 외국 군대를 기약없이 주둔시키고서도 수치심을 모르는 한국인, 지역정서에 빠지면 독재자도 우상으로 보이는 한국인, 정치적 결단 앞에서는 이성과 합리성, 정의가 마비되어 버리는 한국인, 자신에게는 관대하면서도 타인에게는 가장 엄격한 한국인,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관용을 바라면서도 타인에게는 굴종을 강요하는 한국인, 그들을 월드컵은 하나로 묶어 버렸다. 되는 것도 없고 안되는 것도 없는 한국 땅에서 바로 이 순간만은 되는 것이 전부였다. 가르친 자도 지휘하는 자도 없건만 가락에 맞춰 노래를 함께 부르는 한국인이었다.

필승 ! 코리아 !, 대한민국 자잔짜 짠자 !

오천년 유사이래 국민 전체가 이렇게 가르치지 않는 노래를 함께 부른 적이 있을까. 유사이래 국민 전체가 이렇게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느낀 적이 있을까. 불과 4년 전 이들은 국가 부도라는 최악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기업이 도산하고 은행이 파산하고, 가정이 파괴되고 해체되었다. 1998년 겨울 혹독한 추위에 길거리에는 파괴된 가정의 잔해들이 나뒹굴었다. 경제의 판탄은 무엇보다 인간의 존엄성마져 무너뜨린다는 사실을 실감해야 했다.

한국인들의 오로지 희망은 경제를 살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모든 전망은 비관적이었다. 국내의 경제학자들 뿐 아니라, 세계의 유수한 석학들마저 10년 내에 한국 경제를 치유하기 어렵다고 전망했다. 야당 정치 지도자는 공공연하게 절망에 빠진 국민 앞에서 경제가 잘되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호언하기도 했다. 그런데 기적이 온 것인가. 불과 4년 후 오늘 우리를 주눅들게 하던 거리에는 붉은 물결이 활개를 치고 있으니 말이다. 아니면 우리가 갑자기 10년을 훌쩍 넘어 살기라도 하는 것인가. 우리들 목줄을 죄고 있던 IMF는 언제 어디로 떠났는가.

두려움과 혼란과 불확실성의 시대를 넘어 한국인들은 지금 분명 안정과 희망과 확실성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적어도 월드컵을 계기로 세계가 보는 한국의 모습은 그렇다. 그러나 흥분과 열광과 희열의 밀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 나락은 깊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하지 않을까. 확실성의 시대가 도래하기도 전에 망각의 시대에 안주하는 한국인이 되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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