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방사내의 TV보기 : 야망의 세월과 모래시계

TV드라마에 나왔던 나의 우상들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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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식(punctum)등록 2002.04.27 08:44
할머니는 나를 끼고 TV를 보셨다. 오전방송이 없던 시절, 화면조정으로 켜진 TV는 애국가를 부르며 꺼졌고, TV는 '또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내가 앉아있는 방안과 연결된 '같은 세계'였다.

왕년의 공포연속극 '옥녀'의 주인공 김영란은 아무리 순정극에 나와도 귀신이었고, 조금 시기적으로는 나중이지만, '지금 평양에선'에서 김정일로 나온 김병기는 아무리 배달의 기수로 나와도 빨갱이 미치광이였다.

아직 TV와 현실계의 중간 쯤에서 떠돌던 무렵 좋아했던 드라마가 몇 편 있다. 남성적인 것에 집착하던 풋내기 시절, 그리고 바람에 날리는 최루가스 냄새에나마 역사와 대의라는 단어에 빠져가던 시절 그 어설픈 감성을 자극하던 비장미 넘치는 드라마들이었다. 그 중 얼른 생각나는 것이 두 개 있다. 야망의 세월(1990. 나연숙 극본), 그리고 모래시계(1993. 송지나 극본).

야망의 세월은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가난하게 태어난 수재가 순수한 도전으로 대학에 가지만, 정의를 위해 학생운동을 하다가 고생을 한다. 그러나 거듭된 불굴의 도전 끝에 기업인으로 대성공한다. 그런데 유인촌이 연기했던 그 주인공은 실존인물이며, 다름아닌 현대건설 이명박 회장이라는 것이었다. 이명박은 나의 우상이었고, 또 많은 동시대인의 우상이었다. 드라마가 종영되자 그는 곧 정계로 진출했고, 여당의 국회의원으로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민자당의 전국구 의원이었던 이 정의로운 사내는 1991년에 십여 명이 분신자살을 하며 뭔가 절규해도 드라마같은 의기어린 고민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지역구에서 출마한 그 다음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돈도 꽤 뿌리고 다니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15대 총선에서는 돈을 너무 많이 썼는지, 당선이 되고서도 선거법 위반으로 국회의원직을 박탈당했다. 더 재미있는 것은 박탈당하기 직전에 서울시장 출마를 준비한다는 둥 허튼소리를 하면서 의원직을 반납하는 선수를 치는 것이었다. 참 우습고 낯뜨거운 짓이었다.

모래시계는 시대의 불의를 법으로써 다스려 나가려는 검사, 그것에 주먹으로 맞서려는 주먹, 그리고 돈으로 맞서려는 여자의 이야기이다. 그 주먹에 공감하며 가슴을 끓이면서도 드라마가 끝날 무렵 슬그머니 마음 속에 자리잡는 모범형은 검사였는데, 박상원이 연기한 이 인물은 주먹이니 돈이니 하는 초제도적 수단으로 맞서려는 모든 반역의 열기를 부채의식으로 안고서 정도를 걷는 지사였다. '아니야, 저들과 폭력으로 맞서면 우리도 똑같은 놈이 되는 거야'하고 외치는 만화 속 독립운동가처럼 말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박상원이 연기한 그 또한 실존인물이며, 그것은 바로 홍준표라는 검사라는 것이었다. 그 역시 나를 비롯해 숱한 덜익은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었고, 예외 없이 정계에 진출했다. 물론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 것이 제대로 된 놈 없는 것처럼 보이던 민자당으로 입당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 역시 선거홍보물에 '모래시계 검사'라고 써붙이고 나섰다. 모래시계 검사가 국회의원까지 되었으니 뭔가 될 것이었다.

물론 국회에서 별 감동적인 장면은 보여준 바 없었고, 폭로전문이라느니, 저격수라느니 하는 별로 곱지 않은 별명들만 늘어갔지만, '뭔가 있겠지'라는 믿음만큼만은 마저 거두지 못했다. 모래시계 검사인데, 설마.

그런데 어제, 그 모래시계 검사가 TV토론에 나왔다. 그가 '이렇게 총체적으로 부패한 정권은 해방 이후 처음이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야당을 탄압하는 정권은 해방 이후 처음이다'라고도 말했다. 같이 나온 교수 하나가 '정치사를 공부한 입장에서 그건 이해가 안된다. 자유당때, 공화당때 부패규모도 훨씬 컸다. 그리고 야당탄압도 훨씬 폭압적이었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여당의원이 신나서 한마디 거들었다. '홍 의원이 속한 한나라당 전신인 신한국당, 민자당, 민정당 때는 야당의원 잡아다 지하실에서 죽도록 패기도 했다'라고. 그랬더니 모래시계 검사는 '그 때는 나나 당신이나 다 정치도 안하던 시절이야. 그랬는지 안그랬는지 당신이 어떻게 알아?'라고 했다.

또, 모래시계 검사는 '노무현은 DJ의 허수아비다. 즉 위장후보다'라고도 했다. 왜 남의 당 후보를 근거없이 헐뜯느냐는 질문에는 '내가 아니라, 이인제가 한 소리다'라고 했다.

정의, 혹은 역사나 민중에 대한 부채의식은 개코에 묻은 기름이었고, 중학생 수준의 논리나 토론의 룰도 지키지 못하는 저질이었다.
나름대로 의식이 있다고 주목받는 작가, 송지나에게 꼭 묻고 싶다. 당신이 보고 그린 모래시계 검사가 그 사람 맞는지. 그리고 극작가들이나 드라마 심의하는 분들에게 말하고 싶다. 함부로 만드는 드라마가 사람 십수년씩 우롱한다는 것을 꼭 명심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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