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수 목사의 까마귀 살린 이야기

미국에서 겪은 새와 관련된 에피소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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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수(yesom)등록 2002.01.25 20:36
비둘기 죽이고 까마귀 구한 이야기(2)
김 범 수 / 2001년 5월 9일

3. 까마귀 모정

월요일에는 전기톱 소리로 시끄럽더니 어제와 오늘까지는 소나무 위에와 지붕 위의 까마귀들이 계속 난장을 피고 있다. 쉴만하면 줄기차게 울어대는 소리. 전에 없던 일이다.

미국에서, 최소한 캘리포니아에서 우세한 조류는 바로 까마귀다. 공원과 전깃줄마다 한국의 참새처럼 많이 볼 수 있는데 쓰레기통을 뒤지며 산다. 그러나 워낙 수가 많고 자주 보게 되므로 흉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닭만한 몸집 때문에 가까이하면 달려들지는 않을까 겁이 들기는 한다. 정말 무섭게 보았던 히치콕 감독의 '새'라는 공포영화에서도 많이 나왔던 새이다.

'아마 전지하면서 소나무 위에 있던 까마귀 집이라도 헐었나보군' 아내에게 말했다. '맞아 그랬나 봐'. 실은 소나무 위에 까마귀가 살고 있었는지 전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집요하게 울어댈 리 없다.

도서관에 갔다가 점심을 먹을 집에 들렀는데 평소 우편함 편지만 놓고 가던 우체부가 집 문을 두드린다. 필경 소포나 중요한 편지가 온 것이다. 사실이었다. 그런데 우리 것이 아니라 전에 이 집에 살다가 같은 아파트 2층 방 두 개 짜리 집으로 이사간 최 전도사님께로 온 것이다. 중요한 편지가 올 것이라더니 이거였구먼.

215호로 가져다 주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가려는데 영국이와 예찬이가 따라나왔다. 2층으로 올라가는 집에서 가까운 계단위에는 큰 소나무가 있어 늘 그늘져 있었고, 바로 엊그제 전지를 해서 소나무 밑 덤불에는 가지치기의 흔적이 여기저기 박혀있었다. 2층에는 올라갈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계단을 밝고 올라가며 나무로 되어 조금 허술하게 생각되는 2층 복도를 지났다. 아무도 없었다. 저녁때 갖다 주어야지.

소나무 위에서 두 마리 까마귀다 또 다시 울어대기 시작했고, 이에 응답이라도 하듯 지붕 위 곳곳에서 동료들이 깍깍댄다. 평소보다 까마귀가 많이 보인다고 생각하며 계단을 내려올 때 하늘 위에서 선회하는 놈들도 시야에 들어왔다. 계단을 다 내려왔을 때 그때 나는 까마귀들의 울음소리를 해독할 수 있었다.

'이것 때문이었군'.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 덤불가에 검은 새가 웅크리고 있었다. 그늘진 곳인데다가 아이비 덤불 속에 있었기 때문에 검은 깃털을 가진 이 불쌍한 것은 사람의 눈에 발견되지 못했다. 며칠동안 그렇게 울어대던 까마귀들은 이 작은 까마귀가 떨어진 곳 위, 소나무 위에 앉아서 어린 새와 나를 불안한 눈으로 내려보며 여전히 짖어대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 초조한 울음소리 속에는 작은 안도의 느낌이 스며드는 듯 했다.

인부들이 소나무를 전지 할 때, 이들의 집을 철거하면서 덩치는 작은 비둘기 만하지만 아직 날지는 못하는 이 친구를 살그머니 덤불에 내려놓았던지, 그도 아니면 제 일에만 충실한 인부들이어서 새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거칠게 일하다가 이 새를 떨어뜨렸을 터였다. 역시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새를 옮기려고 손을 내밀어 잡으려 하자 어린 까마귀는 입을 크게 벌리며 저항했다. 울음소리는 내지 못했지만 경계와 거부의 뜻이 강경했다. 울지는 못하고 입을 크게 벌려 붉은 주둥이의 안쪽을 내보이며 저항하는 것을 보며, 떨어지면서 어디 다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들었다.

여하튼 나는 섣불리 내밀었던 손을 곧 거두었다. 집으로 가서 새를 안전하게 운반할 상자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아 다시 나오는 길에 마이클을 만났다. 우리 집 위층에 사는 마이클은 바이올라 대학원에서 선교학을 공부하는 사역자로서 우리 눈에는 특이하게도 그의 처는 일본 사람이었다. 그다지 친하게 사귀지는 않지만 나와는 연배도 비슷하고 바로 우리 윗집이 그의 아파트인지라 영국이와도 놀아주는 정도의 교류는 있던 터였다. 2층으로 올라가려던 그에게 영국이와 예찬이가 벌써 새를 보여주었다.

'아마 이것 때문에 그동안 까마귀들이 울었던 것 같지요?' 이럴 때 관리인에게 연락해야 하는지 혹은 동물구조센타 같은 곳이 있는지 물었더니 날더러 돌봐주겠냐고 물었다. 사양했더니 자기가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한다. 미국 새에게 가장 좋은 길을 미국사람인 마이클이 잘 알 테니 나는 기쁜 마음으로 인계하였다.

도서관으로 가려고 준비하여 집을 나왔을 때, 이미 새는 그 자리에 없었다. 마이클이 뭔가 조치한 모양이다. 소나무 위에는, 이제 더 이상 까마귀들은 없었다. 아파트 위에도 다른 동료들이 함께 자취를 감췄다. 상황종료. 까마귀들의 애끓는 탄원이 해결되고 나서야 공중에 평안이 깃들였고, 이웃한 동물들이 진정되자 비로소 우리 사는 아파트도 일상의 공기로 돌아왔다.

문득 수영장의 비둘기가 생각났다. 이것으로써 조류 전체에 대한 내 잘못이 조금이나마 상쇄될 수 있을 것인가? 생명은 생명으로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내 마음에 올려졌던 짐이 어느 정도 가벼워진 것 같았다. 최소한 오늘은, 지체하지 않았으니까.

2001년 봄날 하루간격으로 내게 일어난 이 두 일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혹은 어떤 신학적이고 목회적인 시사점을 주는지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아니, 어떤 의미라는 것을 찾는 일이 꼭 필요한 것인가?

새의 영혼의 존재 유뮤,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에게 주신 생명의 값어치는 무엇이며 나아가 그들과 공존하는 인류의 그 '의미' 같은 이런 추상적인 사고의 중요성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오히려 강조하고 추구하던 쪽이다. 그러나 수영장 물을 들이키며 긴급한 도움을 바라던 한 목숨에게는, 또 골육의 위기를 보고 삼일을 떠나지 못하며 탄원하던 그들과 그들의 동료들에게는 정작 필요한 것은 그 어떤 의미가 아니다. 그보다 더 시급한 것은 즉각적이고 실제적인 도움의 손길이었다.

영국이가 마이클의 집에서 새를 보고 돌아왔다. 관리인에게 연락하지 않고 마이클이 자기집으로 데려가서 모이를 주며 돌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움직이지는 못하지만 아직 살아있더란다. 물에서 건져낸, 몸에 매달려 힘없이 흔들리는 그 작은 비둘기 머리의 회색빛 영상 위로 오랜 긴장 끝에 찾아온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달게 쉬고 있을 검은 깃털의 어린 까마귀의 모습이 겹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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