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수 목사의 비둘기 죽인 이야기

미국에서 겪은 새와 관련된 에피소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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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수(yesom)등록 2002.01.25 20:34
비둘기 죽이고 까마귀 구한 이야기
김 범 수 / 2001년 5월 9일

1. 가지치기 하는 날

캘리포니아에서 처음 맞는 봄이다. 별로 춥지 않은 겨울이었어도 봄은 누구에게나 새로운 활력을 주는지 여기서도 봄맞이 세일, 봄맞이 창고정리, 대청소 등 마을 곳곳이 부산해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세들어 사는 '란초'아파트도 예외가 아니어서 엊그제인 월요일에는 조경작업으로 아주 시끄러웠다. 한국이라면 전지가위로 싹둑하는 것이 전부여서 소일거리가 될 것이 여기서는 전기톱에 전기제초기, 바람을 불어 먼지를 날려 청소하는 송풍기, 자른 나뭇가지를 즉석에서 작은 부스러기로 자르는 분쇄기 등 도구가 죄다 전기 동력이요 모두 소음원이다.

길가 쪽 나무를 마친 뒤 우리 집 곁의 소나무 두 그루에 대한 가지치기를 하게 되었을 때에는 그 소음과 대단했는데다가 놀란 까마귀들이 울어대는 소리까지 가세해서 큰 공사장의 한복판에 들어온 듯 했다. 아마도 한국이었으면 아줌마들의 집단 민원이라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이 맞벌이로 직장에 나가는 이곳에서는 이런 것도 무방한 가 보다.


2. 수영장의 비둘기

수영장 물에 빠져 날지 못하고 발로 물을 저으며 물가로 나오려는 비둘기를 발견한 것은 소음에 못이긴 내가 이 소음투성이 가지치기가 언제 끝날지 상황도 보고 쓰레기도 버릴 겸해서 나왔다가 수영장을 지나 집으로 들어가려던 바로 그 때였다.

새가 물에 빠지면 어찌되는지 보았는가? 직립보행의 사람처럼 맥주병이 되는 게 아니라 백조류와 같은 조류임을 본능적으로 아는 듯 이 작은 몸집의 비둘기는 날개를 몸통에 붙인 채로 발을 움직여서 서서히 수영장 가장자리로 움직여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자리에 다다른다 하여도 수영장의 벽면은 수면에 수직으로 닿아있어서 비둘기 스스로는 빠져나올 수 없어 보였기에 도와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의 작은 도움의 손길이 한 작은 생명을 살리는 역할을 하고서는 한때의 대수롭잖은 기억으로 사라졌을 그런 일이었다. 그때 그놈의 망령된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이 멋지고 박애적인 구조장면을 아들에게 보여주어야지. 옆집 예찬이도 집에서 함께 놀고 있으니 보여주면 한동안 아이들은 멋진 아빠의 휴머니즘을 입에 달고 다니겠지. 영웅적인 모습을 홍보할 절호의 기회다. 이건 연출이 아니고 실제상황이니까 거리낄 것이 없다'
수영장과의 거리는 불과 10m, 집과의 거리도 그와 비슷하다. 비둘기는 수영장의 벽면에서 불과 50cm정도만을 남기고 있을 시점이었다. 구하기 전에 집에 들어가서 영국이를 데리고 나오는데 잠시 시간이 걸리기는 하겠지만 인정 많은 구조자의 도움을 받는 비둘기로 하여금 가장자리에서 잠시 구조를 기다리게 하는 것도 크게 나무랄 것이 없을 터였다.

"영국아, 아빠가 수영장에 빠진 비둘기를 구할 거야. 신 신고 나와봐!" 그래도 최대한 시간을 아끼기 위해 다소 선동적인 억양으로 군대식으로 요점을 전달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들은 즉시로 그 대단한 구조장면을 놓칠세라 따라나왔다.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였다. 그때까지는 아무것도 잘못된 게 없었다. 정장 수영장에서 비둘기의 흔적을 볼 수 없었을 때 '무언가 잘못되었구나' 하고 느끼기 전까지는.

물에 빠진 비둘기는 물갈퀴 달린 물새가 아닌 이상 그새 스스로 수면을 박차고 비약해서 날아가 버렸을 리는 없었다. 또 아까부터 수영장 울타리에 않아 있던 두 마리의 까마귀가 보이지 않는 것이 수상하기는 하지만 그들이 독수리가 아닌 이상 물에 빠진 비둘기를 낚아 채 갔을 리도 없지 않은가?

나는 비둘기가 헤엄쳐 나오던 방향으로 눈길을 돌렸다. 수영장물에 떠 있는 불순물을 거르고 정화하기 위해 정화기계가 항상 가동되고 있었고, 수영장 수면경계선에 박카스 상자만한 구멍이 뚫려있어서 이 유입구를 통해 물은 회전하는 정화기계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오게 되어있다. 유입되는 물의 양이 많지 않고, 흡입되는 물의 속력도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였지만 비둘기의 진행방향으로 보아 비둘기는 이곳으로 흘러 들어갔을 게 틀림없었다.

'아차 이곳에 닿기 전에 건져주었어야 되는 건데...'
그다지 위험하거나 빠르게 돌지는 않지만 수중모터를 작은 수조에서 순환하며 걸러지는 기계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은 작은 비둘기에게는 마치 어린아이를 세탁기에 넣고 스위치를 올리는 것과 같이 생명을 위협하는 무서운 일이 된다.

몸을 굽혀 유입구를 들여다보았다.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갔지? 혹 이리로 들어갔을까?' 생각을 정리한 뒤 수영장 바닥에 부착된 정화기계의 원형뚜껑을 열었다. 처음에는 거기에도 없는 줄 알았다. 그러나 잠시 후, 작은 수조 속에서 위 아래로 순환되는 물 속에서 뭔가 검은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움직임이 없는 비둘기였다. 주저하다 죽은 새에 대한 미안함과 공공수영장의 오염을 막아야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지시하는 바람에 마지못해 비둘기의 한쪽 날개 끝을 엄지와 검지로 잡고 건져내었다.

외상은 없어 보였다. 일분이 채 되지 않은 짧은 시간동안 이었지만 회전하는 물 속에서 익사한 듯 보였다. 그다지 긴 시간이 아니니까 사람의 경우라면 어쩌면 인공호흡을 하면 충분히 폐에 있는 물을 토해내고 다시 숨을 쉬게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새에게 인공호흡을 하다니. 군대에서 구급법 시간에 인공호흡을 배우기는 했어도 아무도 새를 돕는 법은 가르쳐주지 않았다. 게다가 축 늘어져 몸과 목은 꼭두각시 인형처럼 따로 놀고, 물에 젓은 깃털이 한쪽으로 뭉치면서 드러난 붉은 몸통을 보면서는 만지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새라는 것은 원래 만지기에 썩 기분 좋은 동물은 아니었다. 대체 누가 죽은 새의 부리에 입을 맞추고 숨을 불어넣으려 하겠는가? 비둘기들이라면 몰라도 최소한 인간들은 이 상황에서 즉시 응급처치를 하지 못하는 것이 나의 잘못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죽은 새를 주차장 덤불 밑에 던져두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씁쓸한 맘으로 아내에게 상황을 일러주었다. "그래, 물에 빠져 죽어 가는 생명을 먼저 구해야지, 애들한테 자랑하는 것이 중요해?" 핀잔을 주는 아내도 실상은 그다지 새의 죽음을 실감하거나 안타까움을 느끼지는 못했다. 아니 죄책감을 가져야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나뿐이었다. 유입구로부터 불과 50cm 남겨둔 그 때 새를 보고 들리지는 않았으나 새의 구조신호를 들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까마귀 두 마리가 지켜보고 있었으나 비둘기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나였고 내가 구했어야 한다. 바로 그 즉시 수영장 울타리 문을 열고 들어가 새를 유입구에 들어가기 전에 건져내었다면 저나 나나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났을 일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역시 내게는 단순한 실수가 될지 몰라도 저에게는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 되는 일이 되어 버렸다. 내가 조금만 빨랐어도. 아니 지체하지만 않았더라면.

열한 살, 서해안 안면도 바닷가에서 물에 빠졌던 나를 구해준 이름도 모르는 아저씨들의 그 손길을 고맙게 느낀 적이 있었다. 허우적대면서 보았던 물 속 풍경이 용궁이나 사후세계 같았고, 몇 십 미터 곁에서 나의 위기를 알지 못하고 물장난을 치던 많은 사람들에게 느꼈던 소외감이 되살아났다. 새도 나를 보면서, 머뭇거리다 집으로 달려가던 나를 보면서 살려달라고, 급하다고 부르짖었을까? 유일한 희망이 시간을 낭비할 때. 유입구로 서서히 쓸려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씁쓸함이 입안에 가득 찼다. 그 때, 지체하지 않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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