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 언론 보국의 기수, 방응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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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준(ysj7211)등록 2001.04.10 11:16
친일 언론 보국의 기수, 방응모

1883년 평북 정주 출생
1933년 『조선일보』 인수 사장취임
1935년 『조광』 창간
1938년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 발기인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1950년 한국전쟁 중 납북됨

붓은 칼보다 강하다. 이 말은 올곧은 언론이 압제 권력을 능히 제어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일단 칼 앞에 꺽인 붓〔曲筆〕은 더 이상 그 기능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자체가 더 무서운 칼날이 되어 사람들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3.1운동 이후 일본 제국주의는 헌병경찰에 의한 무단통치 방식에 한계를 느끼고 이른바 문화통치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민족의 표현기관'을 자임하며 탄생한 것이 조선, 동아라는 양대 민간신문이었다.

당시 조선의 언론은 총독부의 기관지 每日伸報가 독점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일보는 친일 경제 단체인 대정실업친목회를 주축으로 하여 자본금 20만원 규모로 시작되어 1920년 3월 5일 창간호를 내었다. 총독부 당국은 조선일보를 대해 단순한 실업지로 보았던 것 같다.

이후 조선일보는 경영진이 수차례 바뀌었는데 임원진들의 친일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기자들은 항일적인 사람들이 많아서 종종 압수와 정간을 당하기도 하였다. 만성적인 재정난에 시달리던 조선일보는 1932년 평안도 광산 갑부인 방응모가 인수하여 주식회사로 등기하고 사장에 취임하였다.

방응모는 1883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조선일보의 경영을 맡기까지 그의 행적은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25년경 금광사업에 손을 댔다가 노다지를 발견하여 당시 조선 제일의 갑부가 되었다고 한다. 천성적인 사업가인 방응모가 언론을 인수 하게된 사연 또한 밝혀진 바가 없는데 그가 조선일보를 인수한 30년대 초반은 이미 민족적 사명은 고사하고 사업으로서도 경영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조선일보도 일제가 본격적으로 전시동원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한 30년대 후반에는 본격적으로 '언론 보국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당시 조선일보는 창씨개명과 국어-일본어-상용운동 등 황민화 정책을 선전하고 전시물자절약과 공출을 독려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주인 방응모도 각종 시국강연회 등 친일행사에 참여하고 친일단체에 가담하는 한편 1935년에는 출판부를 신설하여 본격적인 친일 잡지 『조광(朝光)』을 창간하고 자신이 직접 일본황실을 찬양하고 전시체제에 적극협조하자는 내용의 논설을 발표하고 金活蘭, 朱耀翰, 徐椿 등 친일지식인들의 글로 구석구석을 도배하기에 이르렀다.
다음은 방응모가 조광에 직접 쓴 논설의 일부이다

공고무비의 사국하 광휘있는 황기 2600년과 함께 시정 30주년 기념일을 맞이하였다.…생각건대 제국은 현하 전고미문의 대역사적 전환기에 당면하고 있다.…중대시기인 이때를 당하여 2300만의 반도민은 내선일체의 실을 거하여서 황국신민된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은 친일어용지 『매일신보』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내용으로 비록 조선일보가 창간 초기에 문화, 예술분야에서 어느 정도 공로가 인정된다하더라도 이러한 명백한 증거를 두고 조선일보가 민족지냐 아니냐하는 논쟁은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후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에 발기인으로 또 친일단체들의 총집결장인 조선임전보국단의 이사로 참여하는 등 친일행각을 멈추지 않았던 방응모는 '어두운 시대' 운운하며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합리화하기 위해 골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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