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대 재학 당시 금잔디 광장에서 율동패 회원으로 율동하던 장면
조경일
2007년 당시에는 반값 등록금 집회, 한미 FTA 반대 집회, 비정규직 차별 철폐 집회, 부당해고 반대 집회 등 다양한 집회가 광화문 거리를 가득 채웠다.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 출근길에 부당해고 문자를 통보받은 사람들, 어쨌든 작은 목소리라도 내기 위해 거리로 나온 이들은 대부분 억울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게 정치력이 있었다면 굳이 거리에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들이 아무도 들어주지 않기 때문에 거리에 나온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거리에 나선 사람들에게 공감이 됐다. 나도 불과 얼마 전까지 목소리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배고파서 구걸할 때, 억울해서 울분에 찼을 때, 죽을 만큼 아팠을 때 나를 위해 목소리를 내어준 이 하나 없었다. 한국에 오기 전까지 나는 거리를 배회하고 구걸하며 버려진 삶을 살았다. 나는 거리에 나선 이들이야말로 '아픈 자, 배고픈 자, 억눌린 자, 목소리가 없는 자'라고 생각했다.
나는 성실하지는 못했지만 교회를 다니며 성경 공부도 했던 터라 '예수님이라면 사회공동체에 어떻게 참여했을까?'에 대해 가급적 생각하고자 애썼다. 세상을 바라보는 나름의 내 기준이다. 거리의 집회를 바라보며 "귀족 노조"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것은 본질도 전부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나는 약자들 편에 서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나도 약자였고,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탈북'이라는 소수자로 약자의 그룹에 속하기 때문이다. 탈북 출신 중에서 아마 나와 같은 이력을 소유한 사람이 또 없을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돌아보니 내가 활동한 세대가 학생운동권 끝물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들, 노동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쉽게 '빨갱이'로 '종북 좌파'로 취급된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시위 현장에서 살수차 물대포에 맞으면서도 나는 그곳에 서 있는 나 자신에게 당당했다. 억울한 사람들과 함께 섰을 뿐 나는 '빨갱이'와 '종북'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 집회에 참여했고, 나의 주권을 행사한다고 생각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나 스스로 '동등한' 대한민국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집회 현장에 나가는 것이 '걱정거리'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선배들이 집회에 나가도 괜찮겠냐며 나를 걱정해 줬다. 내가 이런 활동을 하고 집회 현장에 참여하는 걸 알게 된 주변 사람들이 조금씩 걱정하는 말을 내게 하곤 했다. 왜 하필 이런 진보적인 활동을 하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