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컴해 보이지 않는 철창살 안은 수직굴인 금정굴. 국가폭력의 불법성으로 유가족이 국가배상을 판결을 받았지만, 그 현장은 70년이 지난 아직도 봉쇄되어 있다.
경기민주시민교육협의회
아직도 금정굴에선 영혼에 대한 집단학살이
금정굴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은 1950년 10월 고양경찰서장 지휘로 경찰과 우익단체 회원이 북한군 부역 혐의자와 가족을 집단 살해해, 금정굴에 매장한 사건이다.
국군의 고양, 파주지역 수복 이후 경찰은 부역 혐의가 있는 자와 부역 혐의로 행불 또는 도피한 자의 가족을 연행한 후, 각 지서 및 치안대 사무실, 창고 등에 구금하였다가 고양경찰서로 이송한 다음 3~7일간의 조사를 거쳐 10월 6일부터 10월 25일까지 20여 일에 걸쳐 학살을 자행했다.
희생자들은 심사받는 줄 알고 금정굴 아래 공터에 모여 있다가 경찰의 지시로 5~7명씩 현장으로 올라갔으며 한 번에 20~40명씩, 많게는 47명까지 끌려갔다고 한다. 부역 혐의자들의 가족도 학살의 대상이 되었고 이들의 재산도 경찰에 의해 탈취되었다.
연행자들은 수직굴인 금정굴 벼랑에 입구를 바라보며 꿇어 앉혀진 후 경찰 5명이 등 뒤에서 조준 사격을 했다. 양손이 묶인 희생자들은 총격과 함께 17m 깊이의 굴 안으로 떨어졌다. 이때 5명 중 누구 하나가 총에 맞지 않았더라도 옆 사람과 함께 있었기에 굴 속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저는 그 소식을 듣고 억울하지만, 아버님이 시신이나마 수습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즉시 작은아버지와 함께 동네 어른들 7명과 금정굴로 달려갔습니다. 밧줄을 이용해서 작은아버지가 내려갔다 오시더니 그냥 피비린내 나고, 생명이 덜 끊어져 살려 달라고 악을 쓰는 사람, 팔이 떨어진 사람들로 가득 차고 작은 굴에 많은 시체가 겹쳐있어 아버지를 찾을 수가 없어, 그냥 올라왔다고 합니다." (이○순 진술, 2006.5.25.)
1995년 9월 유족들이 먼저 합동위령제와 함께 유해 발굴 작업을 진행했다. 당시 장비를 동원해 계속 파 내려가자, 유골이 나오기 시작했고 MBC 등 언론이 이를 보도했다. 두개골 조각과 정강이뼈 머리카락, 신발 등 유품 70여 점이 발굴되었다. 탄피의 수를 근거로 최소 170명 이상으로 판단된다는 게 당시의 기록이다.
천이 다 낡은 검은 천막이 대충 쳐져 있는데 사람들이 안을 아예 보지도 못하게 입구를 철창으로 치고 천막으로 꽉 막아 놓았다. 마치 중죄인들의 가혹한 감옥처럼. 그 철조망에는 많은 추도의 리본이 허상처럼 달려있다. 2005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출범되면서 2006년에는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금정굴 사건에 대해 경찰 책임 하의 불법 학살로 인정했으며 고양경찰서에서도 유감과 애도의 뜻을 표명하고 법원도 금정굴 유족에게 국가 배상을 판결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도 금정굴은 봉쇄되어 있고 국가폭력의 역사적 현장이 되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현대사에 아직도 정권의 야만성과 잔인함이 관통하고 있는 현장이 바로 금정굴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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