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7.13 13:15최종 업데이트 24.07.13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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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술의 도쿄고등사범학교 졸업앨범 사진 ⓒ 위키미디어 공용


일반적인 경우, 한 국가 안에서 전과기록 최다 보유자는 다름아닌 국가 자신이다. 대한민국 내에서도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때 국가범죄가 대거 양산됐고, 그중 일부가 일반 사법절차나 재심의 판단을 받았다.

그런 국가범죄로 의심받는 사건 중 하나가 이달 5일 재심 절차에 들어갔다. 보도에 따르면, 이날 오전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조선정판사 화폐위조사건의 재심이 개시됐다. 이 사건으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항일투사 이관술의 명예회복을 위한 절차가 이렇게 시작됐다.

국가범죄, 조선정판사 위폐사건

조선정판사 위폐 사건은 미군정기인 1946년 5월에 발표됐다.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부터 1946년 2월까지 조선공산당 간부들과 조선정판사 직원들이 조선정판사 인쇄시설을 활용해 위조지폐를 찍어냈다고 미군정이 발표한 사건이다.


미군정이 사건 수사에 깊이 개입했다는 점은 제2대 군정장관인 아처 러치 소장이 전면에 나선 데서도 나타난다. 1946년 5월 20일자 <조선일보> 2면 좌상단은 "군정장관 러취 소장의 19일 발표에 의하면, 서울 시내에 광범위한 위조지폐 행위의 조사를 한 결과, 공산당 본부로 사용하고 있는 부분을 제외한 근택삘딩은 지난 토요일(18일) 밤 페쇠하엿다"라며 이렇게 보도했다.

"이 건물은 일본인 소유로 현재 군정청 관리하에 있고 근택인쇄소도 포함되여 있는 바 위조지폐 행위의 중심지엿다는 것이 판명되엿고 그 인쇄기는 위조지폐 인쇄에 사용되엿든 것이다."

위폐 규모는 1200만 원으로 발표됐다. 1945년 12월 7일자 <조선일보> 2면 좌상단은 일부 업자들이 쌀을 일본에 밀수출하고자 600원짜리 1가마니를 6천 원에 사들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시점에 상당수 지역에서 쌀 1가마니가 600원에 거래되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의 쌀값이 이보다 300배가 훨씬 넘는 가마니당 20만 원 이상인 점을 감안하면, 조선정판사에서 위조됐다는 1200만 원은 지금으로 치면 수십억 원이 된다.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이 이 돈을 찍어냈다고 군정청이 발표했던 것이다.

사건이 발표된 시점은 통일적인 한국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한 휴회에 들어가고(1946.5.6.), 이승만이 남한 단독정부 수립 의지를 천명한 정읍 발언(6.3)을 하는 시기였다. 한반도 분단 가능성이 급격히 높아지던 시점에 발생한 이 사건은 미군정의 좌파 탄압에 힘을 실어주는 계기가 됐다.

이 사건은 조작이다 아니다 하는 논쟁을 유발했다. 그해 10월 23일자 <경향신문> 2면 좌중단은 "사실인가? 아닌가? 세론이 분분"하다고 전했다. 그달 26일자 <조선일보> 2면 우중단에 의하면, 변호인 중 하나인 한영욱 변호사는 "본건 사건은 모략에 불과하다"고 발언했다. 이 신문의 9월 7일자 2면 좌중단에 따르면, 조선정판사 인쇄주임 신광범은 경찰에서 고문을 받아 허위자백을 했다면서, 압수된 조판으로는 압수된 위폐가 나올 수 없다는 점, 위폐에 사용된 종이와 정판사에서 압수된 종이의 재질이 다르다는 점 등을 진술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미군정의 손을 들어줬다. 2016년에 <역사비평> 제114호에 실린 임성욱 현 한국외대 특임강의교수의 논문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의 재검토'는 선고 형량을 이렇게 정리한다.
 
"11월 28일 제30회 언도공판에서 재판장 양원일은 검사의 논고 및 구형을 그대로 반영한 판결을 내려 이관술·박락종·송언필·김창선에게 무기징역, 신광범·박상근·정명환에게 징역 15년, 김상선·김우용·홍계훈에게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이로써 1심 재판은 마무리됐다."
 
항일독립운동가 이관술

조선공산당 재정부장이라는 이유로 중형을 받은 이관술은 을사늑약 3년 전인 1902년 지금의 울산에서 출생했다.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경성 중동학교를 거쳐 1929년에 도쿄고등사범학교 지리역사과를 졸업했다. 그 직후에 서울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훗날의 동덕여중·동덕여고)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관술은 학생들에게 항일 독립의 가치를 가르쳤다. 그는 이 학교에서 일어난 동맹휴학과 독서회 활동의 배후 기획자였다. 당시 언론은 그의 항일을 적화운동으로 매도했다. 1933년 2월 22일자 <조선일보> 2면 우중간은 "사건의 내용은 조선의 학생층을 망라한 반제동맹을 조직하고 남녀 각 학교에 반제동맹 도는 독서회 등을 조직하야 적화운동을 꾀하려고 하던 것이라 한다"라고 보도했다.

이관술은 노동쟁의를 통한 항일운동에도 참여하고 공산주의 활동을 통한 항일운동에도 참여했다. 그는 노동하는 대중이 항일운동의 주역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자료 대한민국사> 제1권에 실린 1945년 12월 12일자 <서울신문> 인터뷰에서 "일본제국주의 반대투쟁에 있어서 가장 선두에서 싸웠으며 또 앞으로 진정한 민주주의적 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일본제국주의의 잔재와 싸우는 데 있어서도 가장 철저하고 용감한 층이 근로대중"이라고 평가했다. 노동쟁의·소작쟁의 등을 통해 가장 강한 항일역량을 증명한 노동자·농민과 함께하고자 노동운동 및 공산주의운동이라는 수단을 선택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감옥을 드나들게 됐다. 1933년에 검거돼 이듬해에 가석방되고, 1941년에 검거돼 2년 뒤 풀려났다. 검거되지 않은 기간에도 항상 구속의 위험이 따랐다. 1946년 4월 19일자 <현대일보>에 실린 그의 항일 경험담에는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라는 제목이 붙었다. 그와 그의 동료들에게는 감옥이 항상 가까이 있었던 것이다.

신출귀몰 변신의 귀재
 

학암 이관술 선생의 투옥시 신상카드 ⓒ 김종훈 의원실

 
언제나 감옥 가까이 있으면서도 실제의 감옥에는 오래 있지 않았다. 상당부분은 그의 신출귀몰 덕분이다. 교사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게 그에겐 홍길동 같은 면모가 있었다. "이관술 돌연 경성에 출현"이라고 보도한 1937년 7월 23일자 <조선일보> 2면 우중단에서 느껴지듯이, 그는 행방을 잡아내기가 쉽지 않은 인물이었다.

중일전쟁 발발 12일 뒤인 1937년 7월 19일 밤, 서울 영등포경찰서 순사가 여의도에서 그를 발견했다. 위 <조선일보> 보도에 인용된 그 순사의 증언에 따르면, 이관술은 "쏜살가티 어둠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산속도 아닌 작은 섬에서 경찰의 추격을 그렇게 빨리 피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에 관한 이관술의 기억은 다르다. 그는 자신이 그날 붙들렸다고 기억했다. 9년 뒤에 나온 위 <현대일보> 보도에 따르면, 그날 그는 여의도 교량을 지나다가 순사에게 붙들려 파출소로 끌려갔다. 그가 쏜살같이 사라졌다고 보고한 순사와 여의도 다리에서 그를 체포한 순사가 달랐던 것이다.

그를 체포한 순사는 자기 손에 들어온 "쏜살"이 이관술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관술이 일본어를 모르는 척 했기 때문이다. 중일전쟁 발발 직후여서 그런지, 파출소 순사들은 그를 중국 스파이로 오해했고,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그는 밤중에 도주했다.

1937년 7월 23일자 <동아일보> 2면 좌하단에 따르면, 서울 시내 일경들은 그를 찾기 위해 22일 밤중까지 "혈안적 활동"을 벌였다. 서울 시내 경찰이 시 경계 밖으로도 파견됐다. "이번 단서로는 체포하기가 어려웁고"라는 말들이 일선 일경들에게서 나왔다고 기사는 전했다.

그는 변장술에도 능했다. 1945년 8·15 해방을 맞을 당시에 그는 넝마주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역사 저술가 안재성의 <박헌영 평전>은 "대전의 한 고물상에서 넝마주이로 해방을 맞은 이관술은 해방 소식을 듣고도 만세도 부르지 않고 담담하게 자신의 고물들을 챙겨 사람들을 의아하게 했다"고 서술한다.

더 이상 넝마주이로 가장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고물을 챙기며 직분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그의 변장술은 이외에도 다양했다. 솥땜쟁이·엿장수·풍각쟁이·거지 등으로도 변신했다. '일본 유학파 출신의 전직 교사'로 그를 인식하는 일제 순사들은 이런 이유 때문에도 그를 쉽게 식별하지 못했다.

골령골에서 총살... 억울한 누명 벗을까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고 했다. 일제강점기뿐 아니라 미군정기에도 마찬가지였다. 미군정은 그를 조선정판사 위폐 사건의 주역으로 체포하고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이 무기징역은 결국 사형이 됐다. 위폐사건 관련자들은 1심 판결에 불복해 상소했지만 기각됐고, 이 상태로 시간이 흘러 1950년에 한국전쟁(6·25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권은 이관술을 학살했다.

2010년에 진실화해위원회가 규명한 바에 따르면,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던 이관술은 1950년 7월 3일 지금의 대전시 골령골에서 총살을 당했다. 2015년에 대법원은 대한민국의 불법행위를 인정했다. 이번에 시작된 조선정판사 위폐 사건에서는 어떤 결론이 날지 주목된다.

진실화해위원회와 법원에 이어 이관술에 관해 대답을 해야 할 국가기관이 더 있다. 국가보훈부도 그중 하나다. 국가보훈부는 아직 그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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