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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권력자 대원군에 맞선 상소

[김삼웅의 인물열전 - 면암 최익현 평전 5] 사헌부 장령의 공직자로서 대원군의 폭주를 방관할 수 없었다

등록 2024.07.11 13:46수정 2024.07.11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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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면암 최익현 영정. 구한말의 선비이자 의병장으로서 진정한 보수였다.

면암 최익현 영정. 구한말의 선비이자 의병장으로서 진정한 보수였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가 출사하여 곡절을 겪으며 공직생활을 할 즈음 조정은 한바탕 격변을 겪고 있었다. 1863년 철종이 후사없이 죽고 고종이 즉위하면서 그 아버지 흥선이 대원군으로서 권력을 전횡하였다.

면암의 생애는 흥선대원군(대원군)과는 크게 얽힌 관계여서 그에 관해 살펴 볼 필요가 있겠다. 

왕족이지만 안동김씨와 풍양조씨의 세도정치에 밀려 한직을 떠돌았다. 잘난 체 했다가는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이어서 장안의 무뢰배들과 어울리는 등 부랑자와 같은 처신을 하였다.

흥선군은 결코 강화도련님과 같은 궁도령도 아니요, 거리의 무뢰배도 물론 아니었다. 오히려 남달리 총명하며 포부가 크고 심지도 굳센 데다가 통찰력도 뛰어나 척족세력의 심술궂은 모습을 잘 간파하여 능히 굴할 줄도 알고 때로는 가면을 쓸 줄도 알았던 것이다. 따라서 철종 연간의 흥선군이 취한 행동은 어느 모로 보든지 다음의 두 가지 조건에서 표현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주석 1)

여기서 제기한 '두 가지 조건'이란 첫째는 도정궁 이하선도 척족세력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았다가 역적으로 몰려 죽은 사실을 들어, 철저히 가면을 쓰고 건달패 행세를 하는 것. 둘째는 언젠가는 타도의 대상일 터이니 세도가들의 대문을 두드려 동정을 살피려는 심산이었다. 

조선에 머물며 한때 고종의 외교고문을 맡았던 H.B. 헐버트의 증언이다. 

새롭게 등극한 왕의 아버지는 흥선군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개성이 강하면서도 오만한 기질을 가진 남자였으며 백성들은 그를 미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를 항상 존경했다. 그는 아마도 한국의 정치무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걸물이었던 것 같다. 그는 매사에 반항적이었으며 어떠한 난관에 봉착하더라도, 그것이 도덕적인 문제이든 경제적인 문제이든 또는 친족 사이에 일어난 문제이든 관계없이,  자기의 의도한 바를 관철해나가는 불굴의 투지를 가진 사나이였다.


그러나 그는 천시(天時)에 어두운 사람이었다. 그의 생애 중에 있었던 가장 커다란 실책은 로마 가톨릭 교도를 근절시키려고 했다는 점과 외세에 대해 문호를 개방하지 않으려고 생각했다는 점이었다. (주석 2)

대원군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자기의 아들인 현재의 왕을 민씨 문중의 자기 조카딸(실제는 처제 딸) 에게 장가들게 한 것인데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권좌에 앉아 있으면서 더 나아가서는 국책의 실질적인 입안자가 되기를 바랐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그와 같은 타산이 얼마나 그릇된 것인가를 알게 되었다.


그는 또한 자기 아들을 위해 1592년의 임진왜란 이후 폐허가 된 경복궁을 중수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급속하게 과세하기 시작한 것은 두 번째 실책이었다. 이 엄청난 과업은 끝내 완공을 보았지만 그 댓가는 값비싼 것이었다. 이로 인해 나라의 재정이 피폐하게 되고 화폐 가치가 떨어지고 일련의 경제적인 문제에 실책을 거듭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사건들 뒤에  따라온 결과는 한심스러운 것이었다. 아무리 그가 강자였다고 하더라도 위대한 인물은 아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주석 3)

대원군의 위장술이 마침내 빛을 발휘하여 철종 사후 조대비와 세도가들은 소문난 건달 흥선군의 아들 12세 소년을 왕위에 앉혔다. 자신들이 얼마든지 조종하고 농락할 수 있을 것이라 장담한 것이다. 천대받던 흥선군이 일약 대원군으로 국가의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40대 중반의 혈기왕성한 때였다. 

그는 먼저 척족세도의 영수급이던 영의정 김좌근을 해임시키는 등 국정농단 세력의 제거에 칼을 뽑았다. 그리고 내정개혁에 나섰다. 서원철폐·세제개혁·경복궁 중건·척화정책을 폈다. 전국의 서원 중 47개소만 남겨두고 600여개소를 철폐시켰다. 조세는 종래의 군포(軍布)대신 호포(戶布)로 대신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경복궁의 중건은 막대한 예산과 백성들의 노역이 동원되고, 병인·신미양요와 외국선박의 내왕, 러시아의 남하 등에 대비하고자 쇄국정책을 강화했다. 전국 곳곳에 '양이침범(洋夷侵犯)에 비전칙화(非戰則和)', '주화자(主和者) 매국이라'는 척화비를 세웠다. "서양 오랑캐와 화친하거나 싸우지 않는 자는 매국적"이라는 구호였다. 

면암은 1864년 어머니의 3년상을 마치고 9월에 사헌부 장려에 임명되었다. 그동안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의 명목으로 당백전을 만들고, 역시 그 비용을 충당하고자 한양(서울)의 4대문 출입자에게 세금을 매기는 사대문세를 신설하여 민원의 대상이 되었다. 

경복궁 중건 공사는 시급한 민생은 뒤로한 채 그동안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려는  야심이었다. 전국에서 인력을 동원하고 금강산 등 명산의 나무를 베어 오는 등 국력과 인력이 크게 소모되었다. 면암은 사헌부 장령의 공직자로서 대원군의 폭주를 방관할 수 없었다. 대원군의 야심적인 4가지 사업을 비판한 것이다. 경복궁 중건사업, 가렴주구 중지, 당백전 혁파, 사대문세 금지 등을 적시하는 상소를 올렸다. 긴 내용 중 대규모 토목공사 중지를 요구한 대목이다.  

신은 생각건대, 임금의 급선무는 덕업에 있고 공사를 일으키는 데 달려 있지 않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띠집과 흙섬돌은 요임금이 위대하게 된 까닭이며, 궁실을 낮게 하고 음식을 박하게 하면서 백성의 일에 부지런히 한 것은 우임금에게 비난할 것이 없게 된 까닭이며, 경궁요대와 아방궁·만리장성은 걸주와 진시황이 어지러워 패망하게 된 까닭이다. 한나라 이후로 모든 나라를 보존한 임금 가운데 요역을 중지하여 민심을 얻는 것을 근본으로 삼지 않고서 태평을 누린 임금이 있는가.

나라를 망친 임금은 토목을 한없이 하여 백성의 힘을 고갈시킴으로 말미암지 않은 이가 있는가. 그 뚜렷한 사적이 서책에 갖추어 실려 있는 것이다. 만약 고금의 사변을 도무지 믿을 것이 못 된다고 여긴다면 그만이지만, 성왕(聖王)의 정치를 본받고자 한다면 그 까닭을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면암집>)


주석
1> 이선근, <흥선대원군>, <인물한국사Ⅴ>, 44쪽, 박우사, 1965.
2> HㆍB 헐버트 지음, 신복룡 역주, <대한제국멸망사>, 148쪽, 집문당, 1999.
3> 헐버트, 앞의 책, 148~149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면암 최익현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최익현평전 #최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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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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