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와서 글 자랑하지 말라'는 바로 그 마을

푸른 자연과 전통문화가 남아 있는 곳, 완도 청계마을

등록 2024.06.21 11:01수정 2024.06.21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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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도신문

 
전남 완도군 청산도(靑山島)는 우리나라 최초의 슬로시티(전통문화가 살아있는 곳에서 삶의 가치를 여유로움에 두고 생활하는 것, 국제적으로 연맹이 결성돼 있다 - 기자 말) 지역으로 푸른 바다와 짙푸른 산, 초분(草墳), 돌담길, 구들장 논 등 섬의 곳곳에 아직도 우리의 전통문화가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오늘 찾아가는 마을도 그중에 하나다.

청산도는 크게 동부와 서부로 나뉜다. 그 분기점은 동부재(東部峙)다. 동부재를 막 넘어서면 나타나는 마을이 청계(淸溪)마을이다. 청계마을은 지사(志士)가 많이 태어난 마을로 1980년대까지 충주지씨(忠州池氏)들이 일가를 이룬 가운데 137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청계마을은 좌청룡의 보적산(寶積山)과 청산도 최고봉인 우백호의 매봉산(해발 384m, 鷹峯山)의 줄기가 계곡을 이루어 사계절 맑은 물이 흐르는 곳이다. 지금도 구들장 논에서 벼농사를 짓는 자연이 그대로 살아있는 곳으로 모내기철에는 투구새우가 자라고, 늦은 봄과 초가을이면 반딧불이가 온 마을을 밝힌다.   

이 마을은 예로부터 학문을 중시했는데 이는 청산도에 학문의 기틀을 마련한 귤은(橘隱) 김류(金瀏) 선생이 청계리에 터를 잡으면서 시작됐다고 한다. 귤은 선생은 삼도(三島, 오늘날의 거문도)사람으로 36세에 상처(喪妻)를 하고 인근 여서도(麗瑞島)에 머물 때 이 마을의 지승문(池昇文)씨가 직접 모셔와 서재(淸溪齋)를 짓고 학문을 가르친 것이 시초라고 한다. 이후 귤은선생은 청산도에서 46년을 머물며 후학을 양성하다 청계마을에서 운명했다.    

당시의 청계마을은 보적산에서 바라보면 마을의 형세가 노루가 멀리 뛰는 모양이어서 장곡등(獐谷嶝)이라 불렀다고 한다. 오늘날의 이름인 청계리는 20세기 초 행정지명으로 확정됐다고 하는데 정말 딱 맞는 말이다. 청계마을에서 '장기미'로 가는 전답(田畓)은 청산도에서 보기 드문 옥토인데 이 옥토를 적시는 젖줄이 바로 청계다.

청계에는 다슬기와 가재가 서식하고 거짓말 같은 '선녀와 나무꾼 연못'이 전해오는데 이 연못은 여름철 비가 오는 량에 따라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비밀의 연못이다. 청계의 끝은 '장기미'다.   
   
이 청계마을에 청산도의 대표 나무인 팽나무가 마을 주민들의 휴양림이자 사장(射場)나무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청계마을의 사장나무는 마을 입구에 있는데 자연석으로 석축을 쌓고 흙을 돋아 나무를 보호하고 있다. 이 축대는 나무를 심을 때 조성했다고 구전으로 전하나 신빙성이 낮은 것 같다. 수백 년의 오랜 세월동안 몇 번의 개축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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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돌 ⓒ 완도신문


청계마을의 사장나무 아래에는 아주 독특한 물건이 하나 있다. 들독(圓石)이다. 이 들독은 현대화 이전까지 마을 청년들의 품삿을 정하는 아주 중요한 물건이었다. 들독은 둥그런 모양인데 아주 둥글지는 않다. 

무게는 약 90kg 정도라고 한다. 이 들독은 1970년대까지 마을에서 유월유두, 칠월 칠석, 팔월 백중 날 동네 모든 사람들이 모여 농악놀이를 할 때 마을 청년들도 모여 힘자랑을 했는데 청년들이 들독을 혼자서 어께까지 들어 올리면 성인 품삯을 주었다고 한다. 또 가끔 청년들끼리 모여 들독 들기 내기를 했는데, 지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에게 술을 사줬다고 한다.     


청계마을의 사장나무는 세 그루가 심어져 있다. 특이한 것은 평상시에는 주민들의 휴식처이자 휴양림으로 역할을 하고 정월 보름이면 마을의 당산나무로 변해 이 팽나무 아래서 당제를 모셨다고 한다. 섬 지역에서 당산은 아주 중시됐는데 청계 마을은 예외였던 것 같다. 주민들의 구전(口傳)에 의하면 한 그루는 수령을 250년 정도로 추정하고 두 그루는 150년으로 보고 있다. 세 그루 중 가장 큰 나무는 흉고 둘레가 약 575cm이고 흉고 높이에서 다섯 갈래로 줄기가 나눠져 있다. 

이 팽나무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인공수정이 발달하기 전 시골에서는 소를 직접 자연 상태에서 교미시켰는데 소를 교미시킬 때 사람들이 암소를 잡고 있기가 힘들어서 V자로 뻗은 가지 사이에 암소를 묶고서 교미를 시켰다고 한다. 그러면 100% 수정이 됐다고 한다.


안타까운 것은 다섯 줄기로 갈라지는 부분이 썩어 들어가 구멍이 생기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시멘트를 발라 조치했다고 한다. 다른 두 나무도 흉고 둘래가 370cm 정도로 줄기가 잘 뻗어서 큰 팽나무와 함께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혀 있으나 가운데 팽나무의 한 줄기가 심하게 썩어 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 전문가의 외과적인 수술을 거친다면 이 사장나무들의 미래는 아주 밝다고 할 수 있다.

청산도의 기록으로 볼 때 마을마다 다르지만 대부분 마을이 형성되고 사람이 본격적으로 거주하기 시작한 시점을 17세기 후반으로 보고 있다. 이 나무도 수령이 350여 년으로 볼 수 있으나 구전이 그렇지 않기 때문에 무리한 추측은 멈추고자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가 마을을 보호해 주고 있다고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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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도신문


청계리에서 평생 논농사를 했다는 김길남(77, 청산면 청계리, 사진)씨의 말이다.

"청산도에 와서 글 자랑마라 했는디 거그가 바로 우리마을이요, 옛날부터 전부다 글을 읽을 줄 알었어요. 지금도 그때 서당터가 그대로 남어있어요. 또 공부함서 마셨다는 서당 샘도 그대로 있고, 청산도의 마을들은 모두가 사장나무로 팽나무를 심었는디 여그 옆에 상서리나 동촌리 팽나무도 존디 우리마을 팽나무는 으디 내 놔도 손색이 없어요.

이 팽나무는 여름이먼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와서 놀아요, 그란디 저닉에는 모구가 많애서 사람들이 다 집으로 들어가 부러요. 특이한 것은 옛날에 큰 잔치를 하거나 초상이 나먼 여그서 챌을 치고 잔치를 해요, 그때는 사람은 많제 집들이 좁은께 사장나무에서 잔치를 한 것이 잴 좋았어요. 잔치를 하거나 팽나무아래서 놀때는 '풍차'를 까는데 그것이 그라고 고슬고슬하니 땀도 안차고 좋아요.

※장기미 : 청계마을 남쪽에 있는 아름다운 바닷가로 맥반석이 발달해 있다. 경치가 매우 아름다우며 슬로길의 백미다. 해조류와 패류가 풍부해 청산도 해녀들의 주요 어장터 중 하나다.

※풍차 : 밀짚으로 엮어 만든 방석의 하나로 크기는 대략 가로 60~90cm, 세로120~150cm 정도다.

유영인 다도해해양문화연구원 원장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완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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