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련사백련사 경내
이준구
한편, 정약용이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를 떠난 것은 불행 중 다행, 아니 어쩌면 '천운'이었는지도 모른다.
귀양은 맞지만 '위리안치(유배된 죄인이 거처하는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 두던 일)' 같이, 거주지에 울타리를 쳐서 밖으로는 나오지 못하도록 심하게 다루지 않았다.
당시엔 어느 정도 눈치껏 편리를 보아주는 것이 상례였다. 더구나 정약용의 어머니 해남 윤씨의 고향은 강진에서 지척이다. 종가인 녹우당은 공재 윤두서와 윤선도를 길러낸 집안이라, 다산이 가장 아쉬울 수 있는 수많은 책과 문화적 자산을 맘껏 빌려다 볼 수 있었다. 그로서는 외가가 지척이었던 것이다.
자연히 윤씨 집안에선 후손들 학업을 위해 자손들을 다산초당으로 보내어 배우게 했다. 다산이 해남의 외가에서만 도움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말년에 저술과 교육에 몰두할 수 있도록 다산초당을 지어준 사람들은 강진 귤동의 해남윤씨들이었다. 나중에 자신의 외동딸을 시집보내 다산과 사돈을 맺은 집안도 강진 목리의 해남윤씨 가문이었다.
강진과 다산초당 일대를 돌아보면서, 40세에서 57세에 이르기까지 18년이라는 절망을 보물 같은 명저의 집필로 승화해 낸 인간 정약용을 발견하게 되었다. 하늘도 그의 곧은 선비정신을 높이 평가해서였는지 유배에서 돌아와 여유당에서 20여 년을 더 살며 학문을 집대성할 시간을 선물해 주었다.
후대의 큰 스승이며 대학자이고 실천적 실학자이며 좌우의 틀에 매이지 않았던 사상가. 무엇보다 아내와 자녀를 사랑하고 애틋해하는 한 가정의 아비로서의 절절하고 따스한 모습이 내게 깊은 울림으로 전해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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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여 년 간 영상물을 제작하고 있는 피딥니다.
사회학과 미디어를 공부했고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사유하고 성찰하는 글을 남기는 중입니다.
해외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아프리카와 어려운 나라를
다니는 중이며 자원봉사로 르완다에서 1년간 미디어를
가르치고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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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 유배당한 그를 보며 삶의 자세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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