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자료사진)
픽사베이
'상춘', 이 단어의 진의를 깨닫기 시작한 것이 언제쯤부터였을까. 아마도 인생은 한순간의 소풍 같은 것이라고 느끼기 시작했던 즈음이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인생이 한 장의 사진이라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봄날의 한 때가 담긴 스틸 사진을 꼽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하는 따스하고 밝고 예쁜 봄날이다.
나는 지금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바람에 나부끼는 눈꽃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 곳에서 이 생각을 하고 앉아 있다. 곧이어 나는 그 봄을 좀 더 가까이 만끽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걷는다.
한 걸음 한 걸음 봄날의 진의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누군가의 진심을 알려면 그 사람의 마음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하듯, 나는 봄날의 진심이라도 알려는 듯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곳에는 한 장의 스틸사진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내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한 그루의 벚꽃 나무 아래 앉아 웃고 있는 사진이다. 바닥에 앉아 계시는 할머니의 오른손에는 지팡이가 들려 있다. 그 옆에는 내 어머니가 쪼그려 앉아 있다. 둘 다 하얀 이를 드러내 웃고 있다. 행복해 보인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그들은 함께 걸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직립이 힘들어진 두 여자
지금 내 할머니는 그녀와 딸과 그 딸의 딸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한 채 종일 누워 천장만 보고 있고, 내 어머니는 고된 허리 수술 뒤 하루의 절반 이상을 침대에 누워서 지낸다. 더 이상 직립이 힘들어진 두 여자. 나는 봄의 중심을 걸으며 생각한다. 그녀들의 봄은 지금 어떻게 지나가고 있을까.
내 어머니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할머니, 그리고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어머니. 봄을 느낄 수 있다는 건 내가 내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리라. 나는 가끔은 내 어머니에게 묻고 싶었다. 대체 왜 나를 이 힘겨운 세상 속에 던져 놓았느냐고, 왜 나를 낳았느냐고 말이다.
그러나 그런 질문이 결코 내 어머니에게 쏘아질 화살은 아니라고도 생각한다. 어머니도 나에게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거라고 말이다. 너는 왜 내 아이로 태어났느냐고 물으면 나 역시 할 말이 없기는 매한가지. 부모와 자식이라는 인연은 그렇게 우연한 '랜덤'이라는 것을 말해 무엇하리.
이 하찮지만 하찮지 않은 아름다운 따스한 봄날의 순간 앞에 서 있게 되면 랜덤 같은 내 인생의 의미 따위 무슨 의미가 있으리라는 노곤한 생각이 강물에 흘러가는 물감처럼 번져 모든 번뇌와 고민이 나른해진다. 그러니 봄날의 한순간 눈부시게 따뜻한 햇살을 받고 있는 이 순간만큼은 적어도 나의 탄생에 감사해야 하리.
이 따스함을 느끼게 해 준 건 바로 내 어머니 덕일 테니. 살면서 늘 내 존재의 의미를 고심했던 모든 순간이 이 봄날의 한순간으로 귀결될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봄은 순간의 절정이다. 내가 죽을 수 있는 있는 순간을 정할 수 있다면 바로 이 봄날이면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죽음이란 더 이상 직립할 수 없는 상태이기도 하다. 올해로 100세를 맞이한 할머니는 수 해째 침대에 누워만 계신다. 두 다리를 펼 수도 없이 구부린 상태로 누워서 주사기로 간 음식을 받아 드시며 살고 계신다.
게다가 나의 어머니는 허리 골절로 7개월을 침대에 누워 지낸 후에야 할머니의 삶이 얼마나 힘겨운지 절절히 느끼며 할머니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말씀하시곤 한다. 살아 있다는 건 숨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이지만, 더 이상 직립할 수 없이 누워만 있는 삶은 또 얼마나 힘겨운가.
인간의 몸은 노쇠해도 봄은 늘 생생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