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자료사진).
pexels
우리 엄마는 눈꼬리가 접히는 미소로 몇 푼의 돈을 벌던 사람이었다. 얼마나 휘어지게 웃었던지 세월을 따라 눈가에 남은 자글자글한 주름이 살아온 날들을 짐작하게 했다.
살림이 변변치 않던 탓에 부모님은 맞벌이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일했다. 처음 한 달은 식당에서, 서너 달은 콜센터에서, 그다음은 백화점에서 돈을 벌었다. 딸의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엄마는 고객 응대하는 일을 시작했다. 항상 학교 마치자마자 백화점으로 향했다. 무척 더운 여름엔 에어컨이 빵빵한 그곳이 휴양지나 다름없었다. 환기가 되지 않아 쾌쾌한 먼지가 코끝에 스쳐도 그저 좋았다.
그날도 불볕더위로 살갗이 타던 여름이었다. 백화점 안은 시원한 냉기를 쐬러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하지만 한 곳의 매장만큼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사람들이 말려야 하는 거 아니냐며 웅성거렸고, 발을 내디딜 때마다 공기가 얼어붙어 싸늘했다. 얼핏 보이는 엄마가 나를 보고 고개를 작게 도리질하고 있었다. 빨리 가라는 입 모양을 보았으나, 발은 그 자리에 묶여 쉽사리 떼지지 않았다. 마침 한 사람이 이성을 찍어 누르듯이 증오 섞인 발언들을 쏟아냈다. 이 모양 이 꼴이니 아직도 이런 일이나 하고 있지. 부끄럽지도 않냐, 나 같으면 때려 쳤다, 이참에 내가 그냥 관두게 해줄까?
초등학생이 듣기에도 그 사람이 내뱉는 말은 모조리 독이었다. 곧이어 그는 한마디의 갈고리로 엄마를 다시금 무너뜨렸다. '매니저 어딨어'라는 소리가 나오자마자 엄마는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여전히 기계적인 미소는 빠트리지 않고 싹싹 빌었다. 곧이어 엄마는 무릎을 꿇었다. 한순간에 폭삭 무너지는 다리가 엄마의 인생을 닮아있었다. 잔뜩 수그린 엄마를 위에서 내리꽂듯이 바라보는 차가운 눈이 싫었다. 그제야 마음이 풀렸는지 돈을 바닥에 던지듯이 떨어트리고 홀연히 사라졌다.
고요한 적막 속에서 엄마가 처음으로 울었다. 숨죽인 채 흐느끼는 모습이 땅에 눌어붙은 껌보다도 애처로워 보여서 그저 멀리 도망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마음은 엄마를 안아주고 싶었으나, 혼란스러운 이성은 도피를 선택했다. 하나뿐인 딸이 비수를 꽂아도 대수롭지 않게 넘기던 엄마였다. 매일 마음에 대못을 박아도 그 자국에 액자를 걸어두던 당신이었다. 그런 엄마가 하염없이 울었다.
한 번도 엄마에게 구태여 묻지 않았다. 엄마도 나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그냥 못 본 체하는 것이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도리였다. 감정노동이란 말조차 없던 시절이었기에, 누가 앞에서 욕을 하면 되레 사과하던 때였다. 엄마는 그렇게 살았다. 조악하고 비루했기에 참는 것만이 답이라고 여기며 돈을 벌었다.
스물두 살이 된 지금도 백화점은 꺼내기 힘든 얘기다. 하지만 그때의 서늘한 음성과 내리까는 시선은 꿈속에 득달같이 찾아온다. 여전히 백화점을 배경으로 한 장면이 되풀이된다. 한 가지 다른 점은, 꿈속의 어린 내가 엄마를 다독여 주고 위로했다는 사실이다. 도망치기만 하던 현실의 나도 그랬어야 했다. 숨을 게 아니라 차디찬 손이라도 잡아줘야 했다. 지금이라도 그런 당신에게 늦게나마 전한다. 그동안 참 고생 많았노라고, 눈물로 치환된 감정을 팔아 번 돈으로 키워준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면서.
그 후로 어머니는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서비스직에서 티끌처럼 남은 비루한 모습이 보일 때면 어머니가 떠올랐다. 동시에 사람의 악한 모습과 잔뜩 일그러진 민낯들, 세상의 조악함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그래서 백화점이 싫었고, 영화관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지금처럼 사람이 많은 날이면 더욱이.
온갖 잡념에 빠져 영화가 끝난지도 모르고 엔딩 크레딧이 끝날 때까지 가만히 앉아있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아까 일이 자꾸만 떠올라 집중력이 흐려졌다. 탄산음료만 연신 마셔댄 탓인지 속이 부글거렸다. 친구만 먼저 내보내고 화장실을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마침 비상계단 쪽에서 서럽게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왠지 익숙한 소리, 아니나 다를까 전에 봤던 직원이었다. 유니폼을 벗은 평상복 차림은 확실히 앳되어 보였다. 아무래도 나랑 같은 대학생이지 않을까. 몸을 공처럼 동그랗게 웅크리고 우는 모습이 잔상처럼 남아 귓가를 괴롭혔다.
나는 또 멈칫거렸다. 못된 버릇이었다. 누군가에게 등을 내어주고 위로해 준다는 것이 여전히 어려웠다. 하지만 난 과거의 여덟 살 꼬맹이가 아니었다.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커피와 빵을 사 와 옆에 슬그머니 밀어 넣었다. 그냥 다 괜찮아질 거라는 듯이, 당신은 그 무엇도 잘못한 게 없다고. 그 마음을 전달할 방법이 없어 한참을 뒤편에 서 있었다.
문득 돌아본 직원의 감정에서 여린 숨이 묻어났다. 흐느끼는 울음 사이에 인생과 삶이 들어있었다. 감정 노동자를 슬프게 만드는 것은 결국 사람들이 감정을 밑으로 보고 하대한다는 것에서 통곡을 그려냈다. 그러한 여린 숨이 통곡이 아니라 인간다운 존중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감정 역시 자아실현을 꿈꾸지만 자아'시련'을 만들 뿐인 현주소에서 우리가 나아갈 길은 노동자를 내 가족으로 대하는 것이다. 오늘 아침에 통화한 콜센터 직원이 만약 본인의 가족이라면 날선 말을 구태여 할 수 있겠는가.
필자의 이야기는 단지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 본 감정 노동자가 당신 친구의 지인일 수도 있다. 우리 사회의 수많은 감정노동자들은 가까운 지인이다. 곧 사회 공동체 구성원이기도 하다. 그들을 존중하고 더욱 살기 좋은 세상이 되길 바라며, 얼굴에 피어나는 미소가 그저 주름으로 치환되지 않기를.
- 박선주(동아대학교 철학생명의료윤리학 3학년)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부산노동권익센터는 일하는 부산시민의 사회경제적 권리향상과 복지증진을 위해 노력합니다. 부산광역시에서 설립하고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가 수탁 운영하는 기관입니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