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사 현장에서 쓰이는 도구
픽사베이
사람의 몸은 참 신비롭다. 처음의 호기롭던 계획과는 달리 점점 일하는 반장님들과 일상이 비슷해져 갔다. 다음의 커리어를 위한 수단이었던 노가다가 생계를 위한 수단이 돼 갔다. 일 마치고 저녁으로 반주로 소주 한 병은 내일 일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다. 늘 시큰한 땀냄새와 술냄새가 함께였던 아버지의 저녁상이 이해가 갔다. 술을 좋아해서 매일 술을 마시는 게 아니었다. 매일같이 무엇을 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의지가 있거나 혹은 그 무엇이 일상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어야만 했다. 직장인의 커피와 같이 노가다꾼에게는 소주가 필요했다.
빨리 일어나기 위해서, 피로를 씻기 위해서 퇴근 후 술 한잔이 익숙해져 갈 무렵, 문득 '이력서에 경력으로 노가다 경험을 쓸 수 있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이 들었다. 한 달에 한 현장에서 최대 7일까지 일할 수 있는 일용직 경험을 이력서 경력 칸에 모두 다 쓰려면 몇 칸이 필요할까. 하루 일한 곳도 경력이긴 한 걸까.
자기소개서에서 노가다 경험은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상징하는 클리셰 같은 이야기가 아니었던가.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잠이나 자자. '뭐 먹고 살지'라는 불안도 일당과 소주 한 잔에 씻겨져 내려간다. 노가다꾼은 오늘 먹고살 걱정을 덜어둔 대신, 앞으로 뭐 먹고 살지도 잊어버린다. 자식만이 유일한 미래였던 아버지는 많이 일하고 돈 많이 받을 때를 참 좋아했다. 꼭 소주 한 잔씩 비우면서.
"손 반장, 이곳저곳 일 다니지 말고 여기 고정으로 들어와."
"진짜요? 고정이면 좋죠. 그런데 몇 개월 이렇게도 써요?"
"몇 개월? 3년은 해야지. 그래야 여기 마칠 때쯤 딴 데 가지."
3년. 딱 내가 첫 직장을 다닌 만큼이었다. 나름 진지하게 고민했다. 노가다 3년 이후에 무엇이 남을까. 몸 쓰는 일이 체질에 맞는 것도 같은데, 혹 제대로 건설 직종에 뛰어든다면 어떨까. 여러 고민을 하던 중 눈발이 매섭게 휘날리는 겨울이 찾아왔다. 늘 나를 많이 챙겨주셨던 마음씨 좋은 아버지뻘 반장님의 한 이야기가 내 결정에 도움을 줬다.
"야, 너 조심해야 해. 어디 가서 반장이 일용직 애들한테 뭐 시키잖아? 그거 하란 대로 다 하지 말고 좀 위험하다 싶으면 못 하겠다고 버텨. 괜찮아. 어차피 일용직인데. 야, 너 사고가 왜 나는지 알아? 일할 줄 모르는 반장이 반장 달아서 뭣 모르고 일용직 애들한테 시키니까 그런 거야. 그런 경우 많아. 특히 겨울에는 얼지 말라고 땅에 보양을 해두거든. 거기를 피해 가라고 알려줘야 하는데 그냥 '야. 리어카 가져가서 가지고 와' 하다가 푹 빠지고...."
많은 사람들이 노가다는 아무나 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전문 노가다꾼'까지도 자신이 하는 일을 어쩌다 했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한다고 생각한다. 이 일을 하고 있는 젊은 친구에게 안타까운 마음에 "잠시만 하고 가라"고 말한다. 마치 내가 하는 일과 같은 일을 하지 말라며 없는 형편에 굳이 굳이 대학을 보냈던 우리 부모님처럼.
그러나 짧은 6개월 동안의 경험이지만, 건설 직종이 그저 노가다라고 낮춰 부를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몸 건강하다고 뛰어들었다가 나뿐만 아니라 같이 일하는 사람까지 다치게 할 수 있었다. 노가다는 어떤 일보다 상당한 기술이 필요했다. 하지만 노가다 일은 책이나 말로 배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노가다 판에서 수년 구르다가 잔뼈가 굵어질 때쯤 자동적으로 얻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젊은 사람'들이 장기적인 미래의 목표로 삼기에는 너무나 작고 불투명한 일이었다.
각자의 사연 그리고 나의 사연
일하면서 만난 여러 '반장님'들은 각기 저마다 사연을 갖고 노가다판에 흘러 들어왔다. 30년 전 왕년에 잘 나가는 중소기업의 대표이사였다던 반장님, 코로나로 가게가 망해서 들어온 반장님, 딱 2년만 해야지 하다가 일용직이 적성이 맞다는 걸 깨닫고 8년째 하는 반장님. 딱히 뭐가 되고 싶은 게 없어서 군 전역하고 나서 5년째 노가다를 하고 있다는 20대 반장님까지. 이들과 일하는 건 퍽 즐거운 경험이었지만, 특히 나이 든 반장님일수록 노가다판에서 일종의 '방황'을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반장님들은 가족을 건사하는 어엿한 가장들이다. 그런 반장님들에게서 가족을 빼고 '스스로'에게는 무엇이 남아있을까? 똑같은 돈을 받아도 일을 잘하는 반장님을 인정하고, 그래서 더 일을 잘하려 하고, 또 효율적으로 일하는 방법에 있어서 서로서로 언성을 낮추지 않는 반장님들의 모습을 보면서, 반장님들의 자존심은 그래도 내 가족을 먹여 살리는 나의 일, '노가다'에서 나오는 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비록 주변에서 천시하고, 스스로도 어디 가서 떳떳하게 말하지 못 하지만 말이다.
2023년이 되면서 나는 경기도 일산에서의 생활을 접고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왔다. 건설 직종은 아니지만, 또 다른 일을 하기 위해 또다시 학교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렇게 됐습니다."
3년 반 만에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와 소주 한 잔 하면서 퇴사 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짤막하게 전했다.
"그래. 서울 생활 쉽지 않제?"
짠. 소주잔이 부딪치고 식도를 타고 넘어간다. 무뚝뚝한 부자 사이로 대화 소리보다 텔레비전 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그날은 평소보다 술병을 조금 더 많이 비운 듯했다. 특별한 대화를 했었던 건 아니지만, 비워가는 술병에 나는 잘 알지도 못했던 아버지를 어렴풋이나마, 조금은 이해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