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전경
백건우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은 1908년 일제가 지은 감옥이다. '경성감옥'으로 시작해 1912년 '서대문감옥', 1923년 '서대문형무소', 1945년 '서울형무소', 1961년 '서울교도소', 1967년 '서울구치소'로 각각 이름을 바꿨다. 지금보다 훨씬 많은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선 걸 1987년 이후 보존할 가치가 있는 건물만 남기고 모두 철거한 다음 역사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문학 작품에서 서대문 형무소가 등장하는 작품을 찾아보면 전영택 <운명>, 이광수 <무명>, <혁명가의 아내>, <재생>, 김남천 <물(1933)>, <남편 그의 동지(1933)>, 현진건 <적도(1934)>, 심훈 <불사조> <찬미가에 싸인 원혼(1920)>, 편지 '옥중에서 어머니께 올리는 글월', 박영희 <독방(1958-1959)>, 박승극 <풍진(1935)>, <그 여인(1935)>, <화초(1935)>, <추야장(1936)>, 이태준 <구원의 여상(1932)>, <화관(1937)> 등이 있다.
[심훈] 장편 <불사조>, 단편 <찬미가에 싸인 원혼>(1920), 편지 '옥중에서 어머님께 올리는 글월'
경성제일고보를 다니던 심대섭(심훈)은 3.1운동 때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다. 그는 7월 집행유예로 풀려난 뒤 학교에서 퇴학 처분을 받았다. 그에게 3.1운동은 인생의 한 변곡점이었다. 그가 그 사건을 얼마나 소중한 경험으로 생각하는지는 일기에 잘 드러난다.
심대섭은 <찬미가에 싸인 원혼>(1920)이라는 짧은 소설에도 당시의 상황과 심정을 형상화했다. 이 소설은 그가 감옥에서 어머니에게 몰래 써 보낸 편지에서도 밝힌 소재, 즉 만세운동 때 함께 들어온 어느 노인(천도교 서울대교구장 장기렴)의 죽음을 다시 한번 다듬어내고 있다. 그가 필명을 '심훈'으로 삼아 본격적인 문필 활동을 할 때도 이런 정신은 변하지 않았다.
[이광수] 장편 <선도자>(1924, 미완)
독립문 앞에는 헐려진 연주문 재목을 그냥 쌓아 놓고 굵다란 연주문 돌기둥은 섬거적을 싸 놓았다. 그리고 영은문이라는 큰 현관은 바로 독립문 아래 땅바닥에 서너 조각을 깨뜨려 놓아 그리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번씩 밟도록 하였다. 오늘 대황제가 만조백관을 거느리고 나오시면 황제가 앞서고 백관이 뒤를 따라 그 여러 백 년 치욕의 기억을 가진 연주문 현관을 밟고 지나갈 거시오, 그런 후에는 일반 인민들이 한 번씩 밟고 지나갈 것이다.
[이광수] 단편 <무명>(1938)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감옥에 들어간 경험을 바탕으로 쓴 <무명>은 짧지만 이광수 문학의 한 정점
그 이야기 솜씨와 아첨 잘하는 것으로 간병부의 환심을 샀던 것조차 잃어버리고, 건강은 갈수록 쇠약하여지는 정의 모양은 심히 외롭고 가엾은 것 같았다. 윤이 전방한 지 아마 이십 일은 지나서, 벌써 다알리아 철도 거의 지나고 국화꽃이 피기 시작한 어떤 날, 나는 정과 함께 감옥 마당에 운동을 나갔다.
정은 사루마다 바람으로 달음박질을 하고 있었으나,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나는 모래 위에 엎드려서 거진 다 쇠잔한 채송화 꽃을 바라다보며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아침 저녁은 선들선들하고, 더구나 오늘 아침에는 늦게 핀 코스모스조차 서리를 맞아 아주 후줄근아였건마는 오정을 지난 빛은 따거울 지경이었다.
이 때에 '진 상'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돌아보니 일방 창으로 윤의 머리가 쑥 나와 있었다. 그 얼굴은 누르스름하게 부어올라서 원래 가느다란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나는 약간 고개를 끄덕여서 인사를 대신하였으나, 이것도 물론 법에 어그러지는 일이었다. 파수 보는 간수에게 들키면 걱정을 들을 것은 물론이다.
"진 상! 저는 꼭 죽게 됐는 게라. 이렇게 얼굴까지 퉁퉁 부었능기라우. 어젯밤 꿈을 꾸닝게 제가 누런 굵은 베로 지은 제복을 입고 굴건을 쓰고 종로로 돌아다니는 꿈을 꾸었지라오. 이게 죽을 꿈이 아닝기오? "
(중략)
" 그예, 보석으로 나가는군요. 나가더라도 한 달 넘기기가 어려우리라든데요. "
하였다. 그 최색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이 윤의 당숙 면장일 것은 말 할 것도 없다.
" 나도 보석이나 나갔으면! "
하고 정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내가 출옥한 뒤에 석 달이나 지나서 가출옥으로 나온 키 작은 간병부를 만나 들은 바에 의하면, 민도 죽고, 윤도 죽고, 강은 목수 일을 하고 있고, 정은 소화불량이 더욱 심하여진 데다가 신장염도 생기고 늑막염도 생겨서 중병 환자로 본감 병감에 가 있는데, 도저히 공판정에 나가 설 가망이 없다고 한다.
[김남천] <남편 그의 동지>(1933)
<남편 그의 동지>에서 '나'는 만삭의 몸으로 감옥에 오가며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다가 홀로 딸을 낳는다. 남편은 제 동지들을 찾아가 독일어책을 영치해 달라고 부탁하라고 하나 정작 내가 연락하자 그들은 바쁘다는 핑계만 댄다. 감옥에 찾아가 그런 사정을 전해준 나는 오히려 남편에게 몹시 억울한 지청구만 듣는다.
[김남천] <물>(1933)
나는 그의 뒤에 앉아 있었으므로 부채로 그의 등을 간신히 두드렸다. 사실 이렇게 더운 통에 맨장판 위에 오륙 시간 세이자(정좌)를 하면 다리가 각기 알는 사람 모양으로 될 것은 정한 이치였다.
공기가 들어 올 구멍은 합쳐서 일곱 개나 되었다. 천장에 네 개 뒷바람 밑에 한 개 창문이 둘. 그러나 공기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리 힘을 내어 부채질을 하여도 별다른 공기가 불리어 올 이치가 없었다. 옆의 사람의 땀 내음새가 후끈후끈 내 몸에 부칠 따름이다.
"이거 살 수 있나."
이런 소리도 입에서는 나올 여지가 없었다. 벌써 한 달경을 두고 "이거 할 수 있나" "어서 구월달이 왔으면" 하고 되풀이하고 또 춥고 추운 뒤라 그런 한숨 말도 이제는 좀처럼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숨을 쉴 때에는 똑똑하게 가슴이 거북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콧구멍으로 넘어가는 공기가 신선하고 청량하지 못한 탓이겠지. 심장과 폐가 그 공기를 마실 때에는 가슴이 빠게 켕겼다.
신선한 공기 대신에 물, 그렇다. 물이 비록 폐로 들어가지 않고 똥집으로 흘러들어간다고 하여도 얼마나 가슴을 신선하게 할 수가 있으며 이 늘어진 신정과 정신을 얼마나 기운차게 동작시킬 수가 있을 것인가! 입만이 빼빼 마르고 바짝 마른 물기 없는 목구멍만이 달각거렸다.
사실 나는 벌써 몇 시간 전부터 물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저녁을 먹을 때가 아니면 아무리 죽는다 하여도 물이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벌써 팔구 개월이나 경험한 것이었다. 그래서 아무리 가슴이 답답하고 목구멍이 말라도 물 생각을 하여서는 안 된다는 습관이 나에게는 짝 박혀 있었다. 나는 책을 들여다본다. 모든 정신을 책에다 집중하자! 더움과 안타까움 그리고 물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모든 것으로부터 나의 정신을 꽉 갈라서 책에다 정신을 넣어 보자!
[심훈] <상록수>
버스는 그친 지도 오랜 듯, 큰길 양 옆의 가게는 빈지를 닫기 시작한다. 독립문을 지나 서대문 감옥 앞 넓은 마당까지 오니까 전 등불이 건성드뭇해지고 오고 가는 사람도 드물어서 어두운 골목 속으로 드나드는 횐 옷자락만 희뜩희뜩 보일 뿐. 떠오른 지 얼마 안 되는 하얀 달은 회색빛 구름 속에 숨었다가는 흐릿한 얼굴 반쪽을 내밀고, 감옥의 높은 담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악박골' 물터 위의 조그만 요릿집에서는 장구 소리와 함께 노랫가락이 흘러나온다. 건달패와 논다니들이 어우러져서 약물이 아닌 누룩 국물을 마시고 그 심부름을 하는 모양이다. 동혁은 다른 사람이 하는 대로 돈 십전을 주고 약물 한 주전자와 억지로 떠맡기는 말라빠진 굴비 한 마리를 샀다.
[이상] <약수>(1936)
바른대로 말이지 나는 약수보다도 약주를 좋아하는 편입니다. 술 때문에 집을 망치고 몸을 망치고 해도 술 먹는 사람이면 후회하는 법이 없지만 병이 나으라고 약물을 먹었는데 낫지 않고 죽었다면 사람은 이 트집 저 트집 잡으려 듭니다.
우리 백부께서 몇 해 전에 뇌일혈로 작고하셨는데 평소에 퍽 건강하셔서 피를 어쨌든지 내 짐작으로 화인(火印) 한 되는 쏟았지만 일주일을 버티셨습니다. 마지막에 돈과 약을 물 쓰듯 해도 오히려 구할 길이 없는지라 백부께서 나더러 약수를 길어오라는 것입니다. 그때 친구 한 사람이 악박골 바로 넘어서 살았는데 그저 밥, 국, 김치, 숭늉 모두가 약물로 뒤범벅이었건만 그의 가족들은 그리 튼튼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그 먼저 해에는 그의 막내누이를 폐환으로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은 미신이구나 하고 병을 들고 악박골로 가서 한 병 얻어가지고 오는 길에 그 친구 집에 들러서 내일은 우리 집에 초상이 날 것 같으니 사퇴(仕退) 시간에 좀 들러달라고 그래 놓고 왔습니다. 백부께서는 혼란된 의식 가운데서도 이 약물을 아마 한 종발이나 잡수셨던가 봅니다. 그리고 이튿날 낮에 운명하셨습니다.
[박태원] <두께비집>
이곳 모화관(慕華舘)으로 살림을 나와 산 지도 이미 일년이 되어온다. 십팔 평짜리 여덜간 집—물론 옹색은 하다. 그러나 나와 안해와 딸 설영(雪英)이와 이러케 세 식구가 할멈 하나를 데리고 가난한 살림살이를 경영하여 가기에는 위선 이만해 조타.
중앙지대 다방골 살다 이곳으로 나온 당초에는 내 자신 어느 먼 시골로 낙향이나 한 듯한 느낌이 업지 안허 누가 집을 물으면 으레히 한번은
"나 고양(高陽) 사오."
그러케 말하엿고 듯는 이도 나의 주택의 위치가 독립문박기다 알면
"어떠케 그러케 멀직이 물러안젓소?"
하고 눈을 크게 떳다.
그러나 이곳 모화관(慕華舘) 뫄— 간이라는데가 나와 아주 인연이 업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아직 내가 나키 전이지만 원래 우리 집안은 현재의 이 집과는 전차길 하나 건너인 행촌동에서 살엇든 모양이요 우리 큰집도 수년 전까지는 역시 가튼 동리에 잇섯다. 이를테면 뫄—간 사람이 뫄—간으로 도라온 폭이지만 나는 이사온 지 한 일헤도 채 못 되여 벌서 이 동리가 실혀젓다.
[박태원] <죄인과 상여>
이곳의 어린아이들도 다른 동리의 아이들이나 한가지로 할 작난들은 다 하고 있다. '숨바꼭질' '띔뛰기' '술래잡기' 또 특히 계집애들은 '공 기' '잇센,도-까,모모 아다마'… 모다 좋고 또 재미있는 작난이다. 내 딸도 좀 자라면 반드시 그 놀이에 참가할 것이요 그것을 무론 나로서 금한다든 그러할 아모런 이유도 그곳에는 없다. 그러나 나는 최근에 그 어린이들이 좀 유다른 작난을 하고 즐기는 것을 발견하고 마음에 좋지 않었다.
분명히 그렇게도 지척 사이에 '감악소'가 있는 그 까닭이다. 하로에도 몇 차례씩 형리들은 죄인의 손을 얽고 몸을 묶어 이곳으로 안동(按洞)하여 왔고 또 한결같이 붉은 옷을 입은 전중이들은 개인 날 밭에 나와 부지런히 일들을 하였으므로 이 동리의 어린이들은 쉽사리 그것을 볼 수 있었고 본 것은 흉내내는 것이 또한 재미있는 노릇이어서 그래 그들은 곧잘 순검이 된 한 아이가 새끼나 빨랫줄 등속으로 죄수가 된 몇 아이들을 잔뜩 묶어 가지고는 골목 안을 돌아다니는 그러한 형식의 작난을 하며 서로들 매우 만족한 듯싶다.
이것은 분명히 자녀 교육에 있어 심히 아름다웁지 못하다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웁지 못한 것은 그것에 그치지 않는다. 골목을 나서 큰 사에는 죄수를 실은 것말고 또 시체를 담은 금빛 자동차가 하로에도 몇 번이나 무학재 고개를 넘나들었다. 대개 고개 너머 홍제원에 화장터가 있는 그 까닭이다.
그래도 자동차는 또 오히려 낫다. 그것은 위선 빨리 달릴 수 있는 수레이어서 잠깐 사이에 우리의 시계를 벗어나 버린다. 그러나 상여라든 그러한 것의 행렬은 느리고 길고 격에 맞추어 부르는 '에-흥' 소리와 또 (아마 어리석은 생각에 예식을 갖추은 우에도 더욱이 장하고 화려하기를 꾀하여서의 일이겠지……) 악대를 사서 '내 고향을 이별하고'와 같은 통속명곡을 취주하게 하는 등 귀와 눈에 함께 언짢기가 여간이 아니다.
우리의 문학예술산책은 서대문 형무소 기념관에서 마무리했다. 이곳에 예전에도 왔던 곳이지만, 다시 보니 새삼 근현대사를 피부로 느낄 만큼 절절하고 가깝게 느껴졌다. 역사의 현장을 직접 방문하는 건 역사 속으로 들어가 실감하는 것임을 새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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