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의 '만종'을 따라 그렸다.
정재민
내가 선택한 그림은 밀레의 '만종'입니다. 유명한 그림 중에서 '만종'이 가장 편안하고 따뜻하게 다가왔습니다. 부부가 밭에서 일을 마치 때, 멀리서 들려오는 교회의 종소리를 듣고 오늘 하루의 삶을 감사하는 모습이 평온하게 느껴졌습니다. 백화점이나 멋진 가게에서 자주 보는 그림이기도 했습니다. 완성 후 벽에 걸어놓은 걸 상상해 보니, 보는 사람마다 평화로움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도 생겼습니다.
주문한 '만종'이 도착했습니다. 하얀 캔버스 위에는 촘촘하게 번호가 새겨진 공간들뿐입니다. 돋보기가 필요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아주 작은 공간과 숫자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상자 속에는 숫자가 표시된 물감들과 크기가 다른 붓이 들어있습니다.
설명서는 따로 없습니다. 하고 싶을 때, 원하는 곳을 색칠하면 됩니다. 주의할 점은 딱 한 가지입니다. 오른손으로 작업을 하게 된다면, 색칠한 물감이 번지거나 손에 묻지 않도록 왼쪽부터 시작해서 오른쪽으로 끝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감과 붓의 상태를 확인하고 곧바로 색칠을 시작했습니다.
물감으로 색칠을 해 본 기억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아마도 고등학교 시절, 어느 미술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물감에서 페인트 냄새와 비슷한 기름 냄새가 풍깁니다. 손에 쥔 붓에서는 잊고 있던 연필 냄새도 납니다. 반갑고 익숙한 향기는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다 끝난 것 같은 기분을 만들었습니다.
저녁에 아이들이 각자의 책상에서 인터넷 강의로 공부를 시작하면, 거실에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작업은 밑그림의 작은 공간마다 다른 색을 칠하는 것입니다. 얇고 작은 붓끝이 경계선을 넘지 않도록 손에 힘을 주고, 허리는 움직이지 말아야 합니다. 색을 칠하는 곳마다 물감의 농도를 비교적 같게 칠해야 합니다.
한석봉을 위해서 떡을 썰던 어머니의 심정으로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에게 '너희가 공부하는 동안, 아버지는 그림을 그릴 것이다!'라고 말한 것을 후회했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자세와 쓰지 않던 근육을 움직여야만 합니다. 시작하고 30분이 지날 때부터 손목과 허리가 아파져 옵니다. 곧 나아질 것이라고 여기며 저녁마다 계속 그렸습니다.
손목의 아픔과 허리의 통증이 사라졌습니다. 하루 1시간밖에 못하던 작업시간은 3시간을 30분처럼 몰두합니다. 처음, 색을 칠할 때의 마음은 내가 완성한 '만종'을 보면서, 아무도 '만종'인지를 모를 정도로 다른 그림이 되어버릴 수도 있겠다는 불안함입니다. 작품을 사진으로 찍는 게 아니라면 색칠만으로 명작의 이미지를 낼 수 있을지 의심이 들었습니다. 의심을 품고 매일 그렸습니다.
그림에 색이 입혀질 때마다, 명화 속 장면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캔버스 위에 쓰인 숫자를 따라서 물감을 칠했을 뿐인데, 그림은 하나씩 하나씩 '만종'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때부터 작업의 속도가 빨라집니다. 정해진 시간 이외의 자투리 시간에도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립니다.
늦은 밤까지 그리기도 하고, 새벽에 일어나서 작업하기도 합니다. 색칠하기가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내 손으로 명화를 그려서 완성했다는 성취감이 원인입니다. 여기에 가끔 튀어나오는 주체할 수 없는 급한 성질이 완성품을 빨리 보고 싶은 마음을 재촉합니다.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