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1년 1월 24일 튀니지 수도 튀니스에서 시위대가 벤 알리 전 대통령의 사진을 불태우고 있다.
AP=연합뉴스
'아랍의 봄'은 2011년 북아프리카 및 중동 국가에서 독재정권에 대항하여 일어난 아랍의 민주화 운동이다. 이 혁명은 2011년 1월 튀니지에서 일어난 '재스민 혁명'(튀니지의 국화)을 시작으로 주변 국가인 리비아와 이집트, 예멘 등의 나라로 확장되었다. 억압적 분위기의 아랍권 국가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올 것이라는 기대감과 달리 아랍의 봄 혁명에서 유일하게 민주주의 국가로 진입한 국가는 튀니지가 유일했고, 나머지 국가들은 독재정치를 청산하기는 하였으나, 아직까지 무정부 상태나 과도기 정부 상태 아래서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다.
튀니지의 민주화 전개 과정은 다음과 같다. 2010년 12월, 수레에서 과일과 채소를 팔던 한 청년이 분신을 한다. 폭등한 물가에 비해 턱없이 적은 임금과 그로 인한 극심한 생활고, 청년실업과 어마어마한 빈부 격차 등 튀니지는 많은 문제들을 겪고 있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지속 되어 온 독재와 정치 엘리트들의 부패는 튀니지의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었다. 대학을 졸업했지만 일자리가 없었던 모하메드 부아지지는 행상을 하며 돈을 벌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경찰들의 단속에 빼앗겼다. 부아지지는 분신함으로써 이에 투쟁했다.
당시 튀니지에서 23년간 집권하고 있던 벤 알리 대통령은 유화책과 강경책(각각의 예로서, 식료품값 인하와 학교 폐쇄 등)을 통해 민심을 정비하려고 하였으나, 부아지지가 병원에서 죽자 2011년 1월 대규모 시위가 시작되었다. 1월 14일 벤 알리 대통령이 사우디 아라비아로 망명하고, 독재정권은 막을 내렸으며, 같은 해 10월 자유선거를 통해 이슬람주의 정당이 집권당이 된다.
흥미로운 점은, 튀니지에서 일어난 '재스민 혁명'이 우리나라의 노동 운동 전개 양상과 굉장히 유사하다는 점이다. 방직공장에서 일하던 청년 전태일은 하루 14시간의 노동에도 불구하고 결코 공장에서 빠져나올 수도 없고, 빠져나온다고 하더라도 결코 다른 살아날 구멍이 없는 암담한 현실에 저항하여 분신하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독재정권의 치하에 있었고, 많은 노동자들이 자신들을 위해, 나라를 위해 소위 갈려 나가고 있었다. 그의 죽음으로 노동환경에 대한 경각심이 우리나라에 깊이 뿌리 내리게 되었고, 유명무실했던 근로기준법이 점진적으로 보장받게 되었다.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억압이라는 어둠 속에서 결국 누군가의 발화를 통해 개진의 빛이 지펴지는 것 같다.
튀니지의 민주주의, 희망과 절망
2013년 결성된 튀니지 국민 4자 대화기구(Tunisian National Dialogue Quartet)는 튀니지의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에 크게 기여한 공로로 2015년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대화를 통해 독재정권에서 민주주의 정권으로 이양한 만큼, 튀니지의 대화기구와 민주화는 가장 이상적인 정치 모델 중 하나로 평가된다.
튀니지가 아랍의 봄 혁명을 함께 한 다른 국가들과 달리 민주주의 체제로 안전하게 진입할 수 있었던 것에는 국민 4자 대화기구의 역할이 크게 작용했다. 튀니지의 국민 4자 대화기구는 노동계와 산업계, 시민단체, 법조계 4개 영역이 모여 결성한 단체이다. 독재정권이 막을 내린 후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서 튀니지에는 새로운 헌법 체계가 필요했다. 국민 4자 대화기구는 정부와의 대화를 통해 평화적 대안을 제안하고, 정치와 종교의 자유, 기본권의 보장 등을 헌법에 포함시키며 튀니지가 민주주의 국가로 넘어갈 수 있도록 큰 역할을 했다.
민주화에 성공한 지 10년이 된 지금, 튀니지는 어떠한 상황일까? 사이에드 대통령의 총리 해임과 의회 기능 정지는 분명 민주주의에 좋지 않은 신호이다. 그럼에도 튀니지 국민들은 대통령의 행동에 어떠한 반감도 표출하지 않았다. 사이에드의 공포 이후, 거리에는 시위를 하는 그 누구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반정부 시위를 통해 민주주의를 획득한 튀니지 국민들은 여전히 빈곤에 허덕이느라 10년 전 간신히 짜내었던 그 한 발을 다시 내딛기가 힘들다. 튀니지 노동자의 평균 임금은 7.5달러로 10년 전과 동일한 수준이다. 하지만 물가는 그사이 폭등했다. 하루를 벌어 하루를 먹고 사는 이들은 시위를 위해 하루를 내던질 수가 없다. 당장의 내일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둘째, 민주화 이후 의회와 정당의 이권 다툼은 튀니지를 경제적으로 더 어렵게 만들었다. 국민들을 위해 일해줄 것이라고 기대한 의회와 정치인들이 이권 다툼에만 집중하였기 때문에 튀니지인들은 민주화로 오히려 싸움과 폭압의 주체들만 늘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하였다.
따라서 사이에드 대통령의 총리 해임과 의회 마비는 오히려 튀니지 국민들을 위한 하나의 과업으로서 행해졌다고 자국 내에서는 평가받고 있다. 법학과 교수였던 그는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고 헌법을 개정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민주주의에 적신호로 보이는 그의 행보를 독재의 시발점으로 평가하기에는 조심스러운 것도 여기에 있다.
애초에 튀니지의 헌법이 수립될 때 튀니지 의회는 많은 권한을 가져갔고 이를 바탕으로 집권당과 정치 엘리트들은 자신들만의 리그를 공고히 했다. 이에 대해 국민들의 반감이 계속해서 커지고 있던 상황에서 사이에드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개혁을 단행한 것이다. 대선 출마를 거부하던 그가 2019년 출마하여 당선된 것에 대해 그 자신은 '하나의 종교적 소명'이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튀니지인들은 사이에드의 정치적 결단에 오히려 민주주의와 경제 부흥이라는 소망을 걸고 있다.
우리는 왜 저 멀리 아프리카와 중동의 난민 문제에 신경 써야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