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장군 유해 입장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참석한 가운데 18일 오전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홍범도 장군 유해 안장식에서 의장대가 홍범도 장군의 영정과 유해를 들고 입장하고 있다. 2021.8.18
연합뉴스
홍 장군의 생애는 우리 민족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우선, 1911년 홍 장군은 '한민족의 시원 역사'와 '국통(國統)' 맥을 밝혀준 환단고기(桓檀古記) 초간본 30권 발간에 개인 사비를 털어 지원했다. 이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그 책 서문에 "홍범도와 오동진 두 벗이 자금을 대어 목판에 새겨 인쇄하였다(洪範圖, 吳東振 兩友之出金付諸剞劂)"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 사서는 독립군의 항일무장 투쟁의 당위성 제고는 물론, 국권회복의식 고취와 역사광복의 나침반 역할을 했다.
특히 장군은 1920년 독립전쟁 1회전 첫 승리인 봉오동 전투와 최대 승리인 청산리 대첩을 이끌어 독립투쟁사에서 새 지평을 열었다. 동학운동과 의병운동, 그리고 3.1운동에서 당시 무력감과 패배감에 젖어 있던 우리 동포들에게 '일본 정예군과 싸워 이길 수 있다"는 불굴의 투쟁정신을 몸소 보여주었다.
또한 1923년 이후 홍범도 장군은 연해주 한인사회와 1937년 강제이주 후 카자흐스탄 고려인 사회를 이끌며 권익 수호와 신장에 적극 기여했다. 그래서 현지 동포사회에서 홍 장군은 정신적인 지주이자 구심점이 되어 큰 존경을 받았다.
이러한 홍 장군의 행적이 국민에게 민족의식 고취와 민족 정체성 함양은 물론, 한국과 카자흐스탄 관계 증진에 기여했다. 이에 홍 장군의 고국 정부는 최고의 예우로써 유해 봉환하고 건국훈장 최고 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수여했다.
한편, 홍 장군 유해의 국내 봉환은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을 남겼다.
첫째, 해외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 선열의 발자취를 적극 발굴하고 관리를 강화하며 유해를 적극 국내에 봉환토록 해야 한다. 해방 후부터 현재까지 144구의 유해가 봉환되었다. 아직도 고국으로 봉환되지 못한 유해가 공식적으로 150여 기다. 해외 먼 타국 땅에 묻혀 있는 독립 영웅들을 조국으로 모시는 일은 국가와 후대의 마땅한 책무이다.
둘째, 독립투쟁의 한 수단으로 사회주의를 택한 독립운동가들을 정권의 색깔과 냉전 이념의 잣대로 재단하는 행태에서 과감히 탈피해야 한다. 1927년 연해주 한인들의 생존권을 제도권 차원에서 확보 및 보호하기 위해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다. 엄혹한 제국주의 시대의 구조적 상황에서 개인이 살아남고자 한, 동포의 안녕을 위한 선택이 어찌 이념으로만 평가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