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군무부 포고 제1호 (독립신문 20.2.14)임시정부 군무부는 포고 제1호를 통해 국민 모두 '광복군'이 되자고 내세웠다.
독립기념관
이후 임시정부 군무부는 '포고 제1호'(<독립신문> 1920.2.14.)에서 항일전쟁에서 이기려면 전투의 기초인 군인 양성과 군대 편성이 가장 시급하다고 밝혔다. 무기·자금 마련보다 우선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민 모두가 군적(軍籍)에 등록해 '광복군'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안창호의 준비론에서 진전하여 군인 양성과 군대 편성을 현실 과제로 설정했다. 이를 기초로 임시정부는 구체적 군사 전략인 '군사에 관한 건의안'을 발표했다. 1920년 3월 30일 임시정부에서 처음으로 군대 편제, 사관 양성, 항일전 개시 시기 등에 대해 제안하고 임시의정원에서 만장일치로 통과했다.
'건의안'은 '혈전을 단행'하기 위해서는 '절실 주도한 군사의 계획과 방침', 곧 군사 전략이 필요하다고 제시하고, 만주 각 독립군단이 통합되지 못한 상태에서 '군사 수뇌자 회의를 소집'할 것을 주장했다. 임시정부는 독립군이 활동하는 만주와 멀기 때문에, 실제 부대 편제와 통합을 실현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만주의 각 군사단체 대표가 모여 통합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전제 아래 임시정부는 군사 전략을 수립했다. 건의안은 '군사기관'을 만주(노령 포함)로 옮길 것을 제시했다. 곧 만주를 독립전쟁의 근거지로 확정하고 군무부의 육군, 군사, 군수, 군법의 4국(局)과 기타 군사 실무 기관을 만주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 건의안은 이어 만주에서 1920년에 '보병 10개 내지 20개 연대를 편성 훈련'할 것을 제안했다. 실제 편제된 부대는 그보다 적지만 빨리 대부대를 편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연대 편제 방법은 '건의안 설명'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었다. 곧 1개 연대 병력을 2천 명으로 해서 전체 2만~4만 명을 목표로 삼았다. '건의안 설명'은 만주·노령에서 그 정도 청년을 모으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하며 이들을 훈련시켜 국내로 진공한 후에 계속 모병·훈련을 실시하여 후속 부대가 국내로 진공할 수 있다고 했다.
항일 진공전은 모든 독립군단이 염원했다. 항일전을 시작하기 위해 수만 명의 병력이 필요하다는 인식도 널리 존재했다. 이를테면 일경에게 피체된 이승(<백절불굴하던 전우 이홍파의 회상담>)은 독립군에게 호의적인 동포 경찰에게 만주·노령에 "조련 받은 독립군 2만여 명이 있다"고 몰래 알려주었다. 통합하는 못했지만 2만여 명의 독립군(잠재 병력 포함)이 존재하며 언젠가 국내로 진공한다는 것이었다.
건의안은 이어 1920년에 '적어도 사관과 준사관 약 1천인을 양성'할 것을 제의했다. 1연대에 70~80명의 사관이 필요하다고 할 때 20개 연대면 1500명이 필요한데, 각지에 대한제국 시대 사관도 있으니 1000명을 양성하면 된다는 것이다. 대한제국 장교가 만주에 500명이나 있지 않았으므로 여기서 부대를 지휘할 500명의 다수는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을 뜻한다.
특히 3.1혁명 이후 신흥무관학교는 많은 군관을 양성했다. 임시정부는 이 계획에 따라 신흥무관학교의 사관 훈련 체제를 그대로 인정하고 재정을 지원하려 했다. 또 국민회가 사관학교를 설립하도록 재정을 지원하려 했다. 건의안에서 가장 현실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사관 양성이었다.
건의안은 1920년에 항일전을 시작하며 실제 국내 진공에 필요한 병력을 10개 연대로 정했다. 이들 병력으로 전쟁을 시작하면 중국과 미국이 도울 것이라고 하여 국제적 지원을 고려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건의안은 국내 진공을 통한 독립전쟁의 시기를 1920년으로 정하고 이를 위해 10개 연대 이상의 부대를 편제하고 부대를 지휘할 1천 명 이상의 사관을 양성하며, 그를 위한 군사 수뇌회의의 개최, 임시정부 군사 실무 기관의 만주 이전을 제시했다. 임시정부 대표가 만주에 파견되어 북만주 독립군단의 통합이나 국민회 사관학교 건립을 위해 활동한 것도 건의안의 군사 전략과 연관되었다. 하지만 이 전략은 부대 편제 등을 통해 구체화되기 전에 일본군 대부대의 만주 침략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각지 독립군을 통합하자' -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서 항일전 전략
1923년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열렸다. 임시정부 일부와 만주·노령의 독립군단 대표들이 모여 정부 방향과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결정하기 위한 회의였다. 독립군단의 대표들이 참가했으므로, 1920년 임시정부의 '군사에 관한 건의안'에서 제시한 '군사 수뇌자 회의'의 뜻도 포함했다. 임시정부 수립 이후 처음이었다.
회의에 참가한 고려혁명특립연대 대표 지청천은 향후 군사 전략에 대해 발표했다. 그는 서로군정서 사령관이었고 노령으로 이동하면서 통합된 부대인 대한독립군의 지휘관이었다. 노령에서 고려혁명군관학교 교장으로 사관을 양성하며 만주 독립군과 연대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군사 전략은 실제 항일무장운동의 경험과 전망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신흥무관학교 교관이던 김승빈(<중령(중국령)에서 진행된 조선해방운동>)은 "(지청천은) 군사상 지식으로나 이상적 방면으로 보나 그 당시 독립군 수령들 중에 제일 선진적 인물이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국민대표회의에서 지청천의 군사 전략이 제시된 것은, 3.1혁명 후 사관 양성과 독립군 통합운동의 지도자로서 국내 진공을 위한 전략 수립에 가장 적합했기 때문이다. 항일전쟁 전략을 수립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 준비모임에서 발표된 그의 전략은 이러했다(<독립신문 1923.1.10.).
첫째, 노령의 활동을 바탕으로 노령을 독립전쟁의 우선 근거지로 제시했다. 노농 러시아가 '독립'과 '피압박민 해방'을 표방했기 때문이다. 국내 진공은 북만주가 적합하지만 '연전에 대타격'(경신참변: 인용자)을 받았고(주2) 중국군의 억압도 있어서 독립군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므로 당시로서는 노령이 독립전쟁 근거지로 적합하다는 뜻이었다.
당시 노령에서는 독립군단이 노농러시아와 연대해 극동공화국을 확립하고 그 원조 아래 '노농 한국'을 세운다는 전략이 전망되었다. 그를 위해 문창범과 노농러시아 대표 위원이 공동 행동을 결정했다는 소식도 있었다. 노농정부는 무기를 공급해 조선 독립을 도와주고 독립군은 '과격파군대'를 도와 일본군을 러시아에서 몰아낸다는 것이다(<동아일보> 1921.4.26.). 연대를 하지만 독립군이 단위 부대를 유지하며 항일전을 치르고, 또 항일 근거지로서 국가 수립 전망도 제시되어서, 1920년대 초 노령의 독립전쟁 상황은 북만주보다 적합하다고 인식되었다.
둘째, 지금까지 무장 행동으로 '동포의 독립사상도 많이 고취되고' 실제 적을 격퇴하기도 했는데 이제부터 '근본적이고 대대적으로 할 실행기'에 들어섰다고 했다. 그를 위해 전민족의 최고 기관을 조직하고 그 아래 지방 기관을 조직하여 '군사 기관을 원만히 설치'해야 하다고 제시했다. 곧 국민대표회의를 통해 전민족 정부를 구성하고 이를 기초로 항일전쟁을 치를 군대를 편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각지에 분립한 독립군단을 임시정부가 통괄하지 못하므로 모두가 신망하는 최고 기관을 조직하고 이를 통해 각지 독립군을 통합하도록 제의한 것이다.
셋째, 군사는 'OO제'를 채용할 것을 제안하였다. 병력 충원의 기본 전략이므로 <독립신문>이 복자(伏字)로 표시했는데, 뒤의 내용이 '러시아'가 군축 주장에 동의하여 '모종제(某種制)'를 채용한다 했으므로 그 내용은 '모병제', 곧 의용군제로 판단된다.
임시정부에서 국민개병주의를 천명했지만 실제 병력 운용에서 동포사회의 적령 청장년을 '모두 징병'하는 것은 현실에서 불가능했다. 따라서 무장대오 편제를 위해 필요한 적정 인원을 모병한다는 뜻이다.
이는 한편으로 농사짓고 한편으로 군인이 되는 둔전제(屯田制)의 천명이라 할 수 있다. 곧 적정 인원을 뽑아 훈련시켜 일정 기간 군인으로 복무하게 하고 퇴역 후에는 다시 농사지으며 재향군인으로 비상시에 대비하는 것이다. 대부대를 한꺼번에 운용하기가 재정적으로 힘든 조건에서 청장년을 훈련시켜 군사 자원을 확충하고 동포 사회에 축적한다는 뜻이다.
넷째, '먼저 사관을 양성'할 것을 제의했다. 이를 위해 중국(만주)·노령에 사관 교육을 전제로 한 교육 기관을 설립해야 한다고 했다.
이 군사 전략은 1923년을 독립전쟁 실행기로 내세우고 사관을 양성해 이를 바탕으로 의용군제에 의해 독립군을 편제한다는 것이다. <독립신문>에 구체적 부대 편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국민대표회의를 통해 통일정부를 구성하여 '군무, 실업, 노동, 재무, 외교'의 일부를 '실행 지대'(만주·노령)로 옮길 것을 제시했으므로 군사통일 기구를 설립한 후에 부대 편제를 구체화하기 위한 구상이었다. 실제 이 제안은 '군계 인물을 망라'할 것을 주장하며 통일이 되면 만주·노령에서 양성한 400-500명의 사관이 집중할 것이라 했다. 이를 기초로 통합된 부대를 편제한다는 뜻이다.
이 전략은 국민대표회의 군사분과에서 구체화되었다. 곧 이 전략을 제시한 지청천과 신일헌, 배천택, 김동삼, 김철, 최준형, 정신이 군사분과 위원으로 선정되었는데 이들은 각 독립군단의 군사 활동을 대표하는 인물들로 군사 전략을 성안(成案)했다. 전략안은 1923년 4월 23일 전체 회의에서 통과되었다. 내용은 이렇다(<독립신문>1923.5.2.).
1.병역 2.편제 3.교육 4.군비 5.군사학 편인(編印) 6.현재 각지 군무기관의 처리 7.현재 무장대(武裝隊)와 해장대(解裝隊)의 처리, 부항(附項) 군사회의 소집.
각 항의 구체적 내용은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지만 제목으로 보아 병력 자원의 동원, 군대 편제, 군사 교육, 군비 확보, 각 무장대오의 통합, 군사회의의 소집 등 기왕의 전략 구상을 구체화한 것이다. 특히 군사교육을 위한 군사학 교재의 편찬을 제안한 점이 눈에 띈다. 군사 교재의 편찬은 군인 양성을 위해 필요하면서, 아울러 각지 무장대를 단일 대오로 통합하는 기초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국민대표회의는 정부 수립의 방향을 두고 창조파와 개조파로 분립하였고 통일 정부를 수립하지 못했다. 따라서 군사분과의 전략도 당장 실현되지 못했지만 이를 기초로 군사통일과 편제, 군사회의 개최 등의 전략적 논의는 이후 만주·노령의 무장활동 근거지에서 상황에 따라 실현되어갔다.
2. 경신참변 후 소부대의 국내 진입 작전 전략
경신참변으로 대부대 편제에 의한 국내 진공은 빨리 실현할 수 없게 됐다. 경신참변 전에 조직된 각 독립군단은 대규모 국내 진공이라는 항일전쟁 전망을 공유했지만 북만주 근거지의 파괴와 국민대표회의의 결렬로 통일 무장대오의 편제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대부대의 국내 진공 전략은 유보될 수밖에 없었다.
항일전쟁은 새로운 전략 단계로 들어섰다. 곧 장기적으로 통일된 무장대오의 강화를 전망하면서 소부대의 국내 진입 전투를 통해 왜적에게 지속적으로 타격을 주고 국내 동포에게 독립의식을 고취하는 장기 유격전이 현실적 전략으로 부각되었다.
소부대의 국내 진입 전투는 경신참변 전부터 각 독립군단이 실현하고 있었다. 특히 왜적의 침략에 피전책을 택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무장력을 보존했던 남만주는 대열을 정비하고 소부대 단위로 국내로 진입하여 항일전을 수행했다. <독립신문>에는 경신참변 후 남만주 서로군정서와 광복군사령부(·총영)의 국내 진입 작전이 자주 실려 있다.
경신참변 직전까지 각 독립군단은 소부대 유격전과 대부대의 국내 진공전 사이에서 통일된 방안을 수립하지 않고 있었다. 일제 정보문서('기밀제255호')에 따르면 1920년 9월 15일 각 독립군단 대표 회의가 열렸는데 국내 공격은 다수결로 결의되었지만 방법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었다.
곧 남만주와 북만주가 서로 호응해 홍범도부대가 무산과 갑산을 공격할 때 다른 독립군부대가 종성과 온성을 공격하고, 다른 결사대가 회령을 공격하자는 전략이 제시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북로군정서과 국민회는 아직 시기상조라고 주장했고 다른 독립군단은 기다리지 않고 국내 진입을 준비했다 한다. 일제 문서라 정확하다 할 수 없지만 국내 진공 시기와 규모에서 전략 구상의 차이가 존재했음은 사실이겠다.
경신참변 이후에는 대규모 독립전쟁 전략에 대한 비판도 나왔다. 곧 신흥무관학교 교관이던 김승빈(<중령(중국령)에서 진행된 조선해방운동>)은 대부대가 일본군과 맞서 싸우는 것은 독립군의 전투력 손실을 가져온다고 했다. 그는 일본군이 침범할 수 없는 산림지대 근거지에 독립군을 배치하고 수십 명의 소부대를 편성해서 국내로 진공해 왜적 기관을 공격하는 것이 당시 항일전쟁의 바른 전술이었다고 했다.
그랬으면 '조선 민중의 반일 투쟁심을 격려, 증강'하며 '독립군의 무기, 탄약을 보충 확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국내 동포의 항일의식 고취와 무장 확충을 전망한 점에서 이 견해는 대규모 국내 진공을 부정한다기보다 대규모 진공의 시기가 올 때까지 소부대로 국내에 진입해 작전하는 옳았다는 뜻이다. 곧 대규모 국내 진공의 포기는 아니었다.
실제 경신참변 후 국내 진입 작전은 소부대 편제로 이루어졌다. 독립군 무장력의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왜적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가장 현실적 전술이었다. 만주를 근거지로 의용군이 활동하면서 각 단위 소부대가 때로는 단독으로 때로는 협동으로 국내에 진입에 작전했다. 통의부 군사위원장이었던 오동진은 한 중대장에게 보내는 글에서 '독립군 운동의 전도'는 '적의 각 기관을 파괴'하고 '적의 관공리를 살해'하는 것에 있다고 밝혔다.
이 내용 앞에 국내에 진입한 의용군의 활동을 기록했다('관기고수제17804호'). 결국 통의부 의용군의 전투 목표가 국내에 진입해 왜적 기관을 파괴하고 관공리를 처단하는 것이라고 확인한 것이다. 의용군은 소부대 단위로 국내에 진입해 작전했다.
'왜적 시설을 파괴하며 왜경과 매일같이 피를 흘려 전투를 계속'
만주사변 전까지 독립전쟁은 소부대의 국내 진입 전투가 중심이었다. 이를 두고 김학규(<백파자서전>)는 '압록강과 두만강에 출몰하여 조국 내에 있는 왜적 시설을 파괴하며 왜경과 매일같이 피를 흘려 전투를 계속'하는 것이라고 하며 '우리 독립군의 대일 게릴라전쟁'이었다고 기록했다.
이렇게 경신참변 후 만주의 독립전쟁 전략은 소부대의 국내 작전을 통한 장기 유격전이었는데, 그를 위해 우선 파괴된 근거지를 복구하고 무장대오 전열을 정비하는 것이 중요했다. <독립신문>(1922.7.1.)은 경신참변 후 '군정서 영문(營門) 자리에 일민단(日民團)(친일 주구조직: 인용자)의 문패가 붙을 지경이요 무관학교사(武官學校舍) 앞뒤에 보민회(保民會)(친일 밀정조직: 인용자)의 기치가 날리는 형편'일 정도로 근거지가 파괴되었지만 서로군정서가 백광운을 중심으로 용사를 모아 '군정서의 옛 영지를 회복'했다고 기록했다.
서로군정서뿐 아니라 각지에서 독립군단이 대열을 정비하고 군세를 강화시켰다. 독립군 통합 운동은 늘 유지되었다. 서로군정서, 대한독립단, 광복군총영 등 17개 단체가 연합해 남만주 최대 독립군단인 통의부를 결성했다. 비록 남만주에 국한되었지만 통일 무장대오 편제를 위한 전략이 실현된 것이다. 노령과의 연계도 유지되었다. 북정 때 노령으로 이동했던 김창환이 1922년 남만주로 돌아와서 서로군정서 사령관이 되었다. 전체 독립전쟁 전략 구상에서 만주와 노령은 같이 중시되고 있었다.
통합의 중요성은 노령 독립군도 강조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수청 지역에 모였던 한인사회당군대, 신민단, 홍범도부대 등 여러 독립군단 군인은 만주에서 독립전쟁이 실패한 원인이 부대 통합을 이루지 못했다고 비판하고 각 독립단을 해체하고 '수청빨치산군'을 조직했다(고상준, <수청 제일빨치산군대>). 각 독립군단은 상황에 따라 여러 곳으로 흩어지기도 했는데 한곳에 모인 여러 독립군은 통합 원칙에 따라 그 지역의 상황에 맞추어 통일 무장대오를 결성했다.
만주 독립군단은 통합되면서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의 3부 시대가 되었다. 이들은 동포사회의 교육과 산업육성 등 행정을 담당하는 기관이면서 아울러 무장대오의 확충을 통해 장래 대규모 독립전쟁을 준비하는 군사기관이기도 했다. 어디에 중점을 두는가는 시기에 따라 변화가 있었지만 두 가지 목표는 일관되게 실현되었다. 이 두 목표를 아우르는 병역제도가 의용군제였다.
이 시기의 무장대오는 한곳에 집중하지 않고 관할 행정구역에 분산 주둔하며 왜적으로부터 지역을 방어하고, 나아가 지역의 무장 역량을 강화하려 했다. 반농반병(半農半兵)의 의용군제/둔전제는 이를 위한 것이었다. 남만주에서는 일찍이 병농일치(兵農一致)의 둔전병제를 채용하고 있었다. 신흥학교 생도는 군사훈련을 받으며 방학 때는 노동하고 농사를 지었다. 3.1혁명 후에는 훈련만 집중해서 받았지만 졸업 후에는 의용대로 편제되거나 재향에서 활동하며 잠재 병력 자원이 되었다.
여러 단체를 통합했던 통의부도 중앙위원회에서 '각 지방에 병농제도(兵農制度)를 설치'하여 평시에는 농사짓고 유사시에 '통의부의 방침에 따라 활동'하도록 결정했다('관기고수제4014호의1'). 곧 농사지으면서 필요할 때 군인이 되었다. 중앙위원회는 또 '산업의 발달, 경제력의 충실'을 기하도록 하고, '조선 진입은 현하 세력으로는 불가능하므로 독립선전 방법으로 때때로 결행'할 것을 결정했다. 여기서의 '조선 진입'은 대규모 국내 진공전을 뜻한다. 그것이 어려우므로 때로 소부대가 국내에 진입해 작전하는 것이다. 결국 병농일치의 의용병제는 대규모 국내 진공전을 잠시 유보하고 산업 육성과 군사 강화라는 두 목표를 아우르는 병역제도였다.
대부대 진공의 독립전쟁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정의부의 초기 항일전 전략은 이러했다. 곧 앞으로 "약 1만의 병사를 모집하여 그를 각 중요지에 파견하여 안녕 질서를 유지함으로써 동포의 사업 발전을 강구한다."('관기고수제34660호의1') 군인이 각지에서 치안을 유지하며 산업을 발전시킨다고 했다. '남북만주'를 언급한 것은 당시 남북만주를 아우르는 통일 단체를 결성할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병력을 1만으로 계획한 데서 무장력을 강화해 장차 대규모로 진공할 전략임을 알 수 있다.
정의부는 병농일치의 군인 양성을 기본으로 하고 현역병을 두어 병력 자원의 이원화를 도모했다. 곧 1925년 초 회의에서 남북만주의 20-40세 청장년을 징모하여 의무병으로 삼아 둔병이라 부르고 이와 별도로 현역병 3천 명을 두는 계획을 결정했다('기밀공제89호'). 이 때도 북만주 독립단과 통합을 계획하고 있었기에 현역병 3천 명이라는 다수의 병력 자원을 계획하고 있는데, 현역병과 둔병(의무병)을 구분했다. 이는 요즘 병역제도로 보면 현역군인과 재향군인의 개념과 비슷하다. 현역병은 계속 군에 복무하는 의용군이고 둔병은 징모에 의해 일정 기간 복무하고 제대 후에는 다시 귀향하여 농사를 짓는다. 이는 군사비를 줄이면서 군사력을 유지하는 방법이었다.
군대가 지역 위수와 산업 발전의 역할을 아울러 했기 때문에 한곳에 모여 주둔하는 형태가 아니라 각 부대가 여러 관할 지역에 주둔했다. 정의부는 초기에 군사위원장/총사령관 지청천이 군대 배치 지역을 선정할 목적으로 네 달 정도 정의부 관할 구역을 시찰했다. 그리하여 관할 각 현에 부대가 상주하도록 했다('기밀공제50호').
북만주도 병역제의 기초를 둔전제로 했다. 1923년에 김좌진은 '둔전제를 대규모로 실행'하기로 했다(<독립신문 1923.5.2.>). 신민부 설립 후에도 둔전제는 병력 자원 확보를 위한 기초 병역제로 채용되었다. 특히 '공고'에서 '신민부는 권위적 무력전쟁은 불가능'하다고('기밀제983호'), 곧 대규모 국내 진공이 당장은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신민부 관할 구역이 국내 진입에 어려운 지리적 문제도 있지만 실제 신민부는 국내 진입 작전이 드물었다.
정의부가 남북만주 독립군단을 통합해 1만 명의 독립군을 확보하려 한 것은 장기적으로 대규모 국내 진공전을 준비한 것인데 신민부도 장기적 국내 진공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국내 진공을 위한 노선을 조사해 앞으로의 대규모 진공에 대비했다. 이중삼 등이 인솔한 조사단은 1선이 압록강 건너 강계를 경유해서 평양에 이르는 노선을 조사하고, 2선은 백두산을 타고 함경·강원·경상도의 산악을 따라 지리산에 이르는 노선을 조사하고, 3선은 두만강을 건너 진남포를 지나 북청에 이르는 노선을 조사했다(<경향신문> 1961.8.31.).
장기적으로 대규모 국내 진공을 준비하면서 현실적으로 소규모 국내 진입전이 지속되었다. 이는 독립군 무장대오의 피해를 줄이면서 왜적에게 타격을 주고 동포에게 독립의식을 고취하는 유력한 전술이었다. 당시 국내 신문에는 통의부, 정의부, 참의부 등의 독립군이 국내에 진입해서 일제 기관과 일경을 공격하는 내용이 거의 매일 실렸다. 그만큼 소부대의 국내 진입은 끊임없는 지구전이었다. 재만삼부 모두 이 항일전쟁 전략을 견지했다.
3. 만주사변 후 한중연합의 항일독립전쟁 전략
독립군은 소부대의 국내 진입 작전으로 지속적으로 일제를 타격했다. 일제는 1925년에 중국에 삼시협정을 강요했다. 삼시협정은 국내에 진입해서 작전한 독립군을 중국 관헌이 체포해 일제 총독부에 넘기고, 나아가 총독부가 지목한 독립운동 지도자를 중국 관헌이 체포하도록 한 것이다. 이 때문에 국내 진입 작전, 나아가 만주의 독립운동이 한때 곤경에 처했다.
하지만 1931년 일제의 만주 침략은 독립전쟁 정세를 바꾸었다. 항일중국군과 연합하게 되고, 국제적 연대를 통한 독립전쟁 전략이 전망됐다. 곧 일제와 전쟁하는 나라로 세계에 존재를 알리고 국제적 연대를 강화했다. 3.1혁명 직후 이동휘는 무장을 갖추고 일제와 전쟁하면 열강에게서 '교전단체로 승인'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독립을 '절반'은 달성할 수 있다 했다.(주3) 열강의 지원은 항일전쟁 승리의 중요 부분으로 언급됐다. 임시정부도 1920년 시정방침에서 개전 준비를 위해 군대 편제 등과 함께 '미국·러시아 기타 외국에 교섭하여 군물(軍物: 무기 등 군수품)을 수입'할 것을 내세웠다('고경 제14529호'). 실현되지 않았지만 열강의 군수 지원을 항일전쟁 수행의 한 요건으로 삼았다. 만주에서도 열강의 군사 지원을 논의했다. 곧 중국인 보위단장이 국민회 비서(허동규)에게 독립군에게 무기를 지원하는 나라를 묻자 그는 정의와 인도를 위해 전세계가 지원할 것이고 특히 중국, 미국, 러시아의 원조를 바란다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