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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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 출항했던 배가 포구에 들어올 때쯤이면 나는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선창으로 나갔다. 큰 선창 너머로 아버지 배가 보이고 이윽고 포구에 배가 정박하면 재빨리 술 주전자부터 건넸다. 그것이 우리 형제들의 매일 똑같은 일상이었다.
지금도 '막걸리' 하면 아버지가 떠오른다. 소주가 칼칼하고 깨끗하지만, 몸 생각해서 막걸리를 마신다던 아버지. 하지만 아버지는 분명 소주보다 막걸리를 더 좋아하셨다.
칠구지(서해안 마량포구) 가는 길에 있었던 우리 옆집은 주막(酒幕)이었다. 막걸리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주막이 집 옆에 있다는 것은 고양이 옆의 생선과도 같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지간해서 들어가지 않았다. 가난한 살림에 주막집까지 들락거렸다가는 집안 거덜난다는 것이 아버지 지론이었다.
아버지의 보물이었던 막걸리 단지
어머니는 결코 아까운 쌀을 허비하며 막걸리를 빚지 않았다. 그럴만한 여력도 없었다. 동네 교회의 열렬한 집사님이었던 할머니는 술 마시는 것 자체를 용납하지 않았다. 1970년대만 해도 정부는 식량 자급자족을 위해 정책적으로 곡물로 술을 빚지 못하게 했다.
집에서 술을 빚으면 밀주 단속에 걸려 벌금을 물기도 했다. 아버지가 마시는 막걸리는 서면양조장에서 빚은 텁텁하고 맛없는 밀가루 막걸리였다. 우리도 술 심부름을 할 때면 가끔 한 모금씩 마셔봤지만 정말 심심하고 텁텁했다.
그러다가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조그만 덴마(전마선)를 구입해 선주(船主)가 되면서 집안 형편이 조금 나아졌다. 마음이 넉넉해진 어머니는 큰맘 먹고 보리쌀로 막걸리를 빚었다.
비록 시커먼 보리쌀 막걸리였지만 아버지는 그것을 애지중지했다. 숨겨진 꿀단지를 발견한 아이마냥 보시기를 들고 슬그머니 부엌으로 들어가면 필시 막걸리를 훔쳐 마시는 것이 분명했다.
아버지는 이웃 사람들이 찾아왔을 때도 막걸리를 결코 내놓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구멍쥐 마냥 하루에도 몇 번씩 부엌을 들락거리며 막걸리를 마셔대니, 작은 술독은 금방 비었다.
아버지는 막걸리가 점점 줄어들자 안 먹은 척을 하기 위해 꾀를 냈다. 술 한 보시기를 퍼마신 뒤에 물 한 보시기를 부어 놓는 방식이다. 결과적으로 양은 줄지 않았지만 맛은 점점 심심해졌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보며 '저거 맹물이지 술이여'라며 웃었다.
내가 장성해서 고향에 갈 때면 빼놓지 않고 막걸리를 사 갔다. 동생들도 마찬가지다. 구기자술을 좋아하실 때는 직선거리를 마다하고 일부러 청양 운곡양조장을 거쳐 가기도 했다. 아버지는 우리가 사 온 막걸리를 부엌 창고에 보관하고는 동네 친구분들을 불러 자랑했다. 그것이 7남매를 잘 기른 아버지의 자긍심이었다.
나중에 우리 살림이 좀 나아지고 아버지께 사가는 술이 막걸리에서 양주나 전통소주로 대체되었어도 아버지는 막걸리 잔을 내려놓지 않았다. 그러다가 10여 년 전 뇌졸중과 중증 치매로 요양원으로 실려 가면서 막걸리는 아버지 곁에서 멀어졌다. 그렇게 10년을 강제로 술을 끊고 살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년, 다른 건 아쉽지 않지만 가시기 전에 막걸리 한 잔 대접하지 못한 것이 못내 서글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