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인중개사법 시행규칙에 나와 있는 중개대상물 확인·설명서. 공인중개사법상 계약 시 세입자에게 반드시 설명해야 하는 사항으로 안전과 관련된 항목은 소방 부문의 단독경보형 감지기 단 한 개다.
서현정
"이대로도 월세 놓으면 돈 50~100만 원씩 들어오는데 몇백 몇천씩 들여서 투자하겠어요? 집주인들이 얼마나 짠돌이 짠순이처럼 안 쓰는데."
공인중개사 이모(50)씨는 원룸 안전 설비 강화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인상부터 찌푸렸다. 안전이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원인은 높은 비용과 허술한 법망이다. 스프링클러 설치엔 약 800만 원이 든다. 설치 후엔 물탱크도 채워야 하고, 제어 컴퓨터도 필요하다. 설치비용뿐 아니라 설치 기간 동안 영업을 못 해 발생하는 비용도 있다.
시공전문업체 가온 D&C의 안창길(48)씨는 "스프링클러 달려면 덴조(천장의 일본식 표현) 다 뜯어야 해서 공사할 동안은 세입자를 받기 어려울 것"이라고 밝혔다. 비싼 돈 주고 설치해도 낡은 건물에서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할 수 있다. 이영주 서울시립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노후화된 건물에 스프링클러만 설치하는 건 무너진 잇몸에 임플란트만 박아 넣는 꼴"이라고 말했다.
안전에 대한 책임을 등진 집주인들에게 허술한 법은 방패막이가 됐다. 신림역 인근 4층짜리 건물 임대인 A씨는 "건물이 작아서 스프링클러는 설치 안 해도 된다. 안전시설 신경 써본 적 없다"고 말했다. 현행 소방시설법상 스프링클러 설치는 6층 이상 건물에만 의무다. 소화기, 단독경보형 감지기는 전 주택 의무 사항이지만 이마저도 처벌 조항이 없어 강제하기 어렵다. A씨는 "(안전장치들은) 각자 알아서, 적당히 한다"며 자신은 관련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공인중개사도 안전을 책임질 의무는 없었다. 공인중개사법에 따르면 공인중개사는 집을 계약할 때 중개대상물 확인설명서에 있는 항목들을 직접 확인하고 세입자에게 설명해야 한다. 주택용 공인중개사 세부 확인 사항에 소방과 관련한 내용은 단독경보형 감지기 설치 여부 하나밖에 없다. 방범용 시설을 따지는 항목은 없었다.
'돈 되는 안전' 안전 강화는 투자라는 인식 전환 필요해
서울시립대 소방방재학과 이영주 교수는 "법 강화뿐 아니라 시장에서 안전에 대한 투자가 자발적으로 이뤄지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그 방법으로 소화설비할인 제도를 언급했다. 이 제도는 소화기, 스프링클러, 옥내외소화전 등 소화설비를 설치한 집주인에게 설비별로 보험 할인율을 적용하는 제도다. 보험연구원 이기형 연구위원은 이 제도가 "장기적인 관점에서 투자 비용 대비 회수하는 이익을 높여서 집주인들의 안전 투자에 대한 동기를 부여할 수 있다"고 밝혔다.
현재 우리나라에 소화설비할인제도가 있지만 할인 항목이 적고 할인율도 고정돼 있어 집주인들의 소화설비 설치를 유도하기 어렵다. 손해보험사들의 약관에 따르면 할인이 적용되는 설비는 소화기, 자동화재탐지설비 2개에 불과하고 할인율도 각각 3%, 8%로 일정하게 적용된다. 성능이나 종류에 따른 할인율 차등 없이 소화기가 있으면 보험료를 3% 할인받고 없으면 못 받는 셈이다.
그렇다 보니 소화기나 자동화재탐지설비만 있는 집과 스프링클러와 같은 안전 설비를 추가로 설치한 집의 할인율 차이가 없다. 이영주 교수는 "현재 우리나라 보험 체계가 탄력성이 없다 보니 투자하는 입장인 집주인들에게 돈을 더 들여 안전 설비를 설치할 동기 부여가 안 된다"고 말했다.
지난해 5월 신림동 한 원룸에서 한 남성이 혼자 사는 여성 거주자를 뒤쫓아가 집에 침입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 이후 서울시 관악구는 지난해 11월 '여성 안심 원룸 인증제'를 도입했다. 안심 원룸 인증제는 집주인이 인증을 신청하면 경찰이 현관문 방범 장치, CCTV 설치 등 52개 항목을 평가해 인증 현판을 주는 제도다.
관악구는 지난해 안심 원룸 1호가 나왔다는 사실을 언론을 통해 공개하면서 "민간의 자발적인 시설 개선 효과가 기대된다"며 계속해서 이 사업을 추진할 의지를 밝혔다. 하지만 2월 16일 관악구청에 정보공개를 신청해 받은 내용에 따르면 지금까지 단 한 곳만이 인증을 신청했고 이 한 곳만이 인증을 받았다. 즉 안심 원룸 인증제가 해당 지역 원룸 소유주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관악구 관계자는 "콩고물이라도 떨어져야 불편을 감수하고서라도 집주인들이 신청할 텐데 지금은 사업성이 크게 없어 동기부여가 안 된다"고 밝혔다. 관악경찰서 관계자는 "지정한 원룸에서 범죄가 발생하면 취지가 왜곡될 우려가 있다"며 제도가 활성화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1호 원룸에서 100미터 정도 떨어진 부동산 2곳 모두 '안심 원룸 인증제'에 대해 들어본 적 없다고 답했다.
관악구 여성 안심 원룸 인증제와 달리 충청남도 공주시가 실시하고 있는 '학생 안심 원룸 인증제'는 성과를 거뒀다. 지역사회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공주경찰서는 대학과 연계해 학교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인증받은 원룸이 알림창으로 뜨도록 했다.
인증제를 고안한 공주경찰서 박재현 경위(48)는 "2014년 12월 대학가 원룸촌에 침입 사건이 잇따라 일어나 살펴보니 출입문 도어락 설치가 안 된 건물들이 타깃이 됐다"며 도입 배경을 밝혔다. 침입 사건이 일어나고 원룸촌엔 학생들이 다 빠졌지만, 시설을 보강해 인증받았다고 홍보하니 학생들이 다시 돌아왔다.
인증받은 방들이 학생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자 집주인들이 먼저 설비 보강에 나섰다. 1년 만에 67개 빌딩이 인증을 받았다. 형사정책연구원 최수형 실장은 "지역사회 수준에서 범죄피해에 취약한 주변 요인을 계속해서 찾아보고 개선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며 "이를 지원할 수 있는 사회적 지지가 밑바탕 돼야 한다"고 말했다.
"집에서만큼은 맘 놓고 살고 싶다" 청년이 정의하는 '주거 안전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