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rand Odalisque(1814)앵그르 Source: Wikimedia Commons
루브르 박물관
앵그르의 그림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그의 그림에 생명력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일면 충분히 이해가 가고 수긍이 가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의 그림을 흔한 아카데미의 그림과 같은 맥락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딘가 부적절할 뿐 아니라 불완전한 것이 된다. 그의 그림에서 버려야 할 아카데미의 고답적인 룰만을 본다면 그가 추구한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에 대한 처절한 갈망을 놓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처절함은 고요하고 정적인 그림에서 더 나아가 온 몸을 비틀고 서로 뒤엉키며 고개를 빼고 손을 내미는 간절함으로 나타나곤 한다. 이러한 효과는 '터키탕(Turkish Bath)'에서 극에 달한다. 그동안 앵그르가 그린 수많은 독립된 누드들을 마치 집대성이라도 하듯이 이 그림에는 기존의 포즈를 포함하는 다양한 포즈의 여인들이 누드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전체적인 느낌은 에로틱하다거나 야릇하다기 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럽고 낯설며 억지스럽고 과장되어 있다. 한마디로 실험적이다. 아름다움은 평범함이나 자연스러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낯섦과 극단에서 오는 것인 양 말이다.
이러한 면에서 앵그르의 그림은 놀랍도록 현대적이다. 당시 아카데미를 대표하며 구악으로 여겨졌던 화가에게서 현대적인 면을 발견하는 것은 신선하고 한편으로는 충격적이다. 앵그르가 추구한 것은 당시 아카데미의 천편일률적인 주제와 구도가 아니었다. 앵그르는 그림이 지녀야 하는 가치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확고한 신념으로 자신만의 그림을 그려냈다.
"예술은 진정 새로워져야 한다. 이를 위해 나는 혁명적일 정도로 달라지고 싶다. 하지만 인내심이 필요하다. 이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싸워나가면 언젠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이것이 나의 가장 큰 야망이다."
그가 생각하는 그림이라는 것은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캔버스에 명징한 형태로 담아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선을 강조하고 매끄러운 화면을 강조했을 뿐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담아낸 결과물은 손에 잡히지 않는 무형의 가치를 선명하게 드러나는 형태로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그림이 명징하면서도 신비롭고 구체적이면서도 아련한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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