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난스의 장례식(1850)구스타프 쿠르베 Source: Wikimedia Commons
오르셰 미술관
하지만 누구의 장례식인지, 심지어 장례식이라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그곳이 오르난스라는 사실만이 중요한 것처럼 여겨진다. 그들이 모여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삶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 그들이 살아가는 마을을 둘러싼 자연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을 뿐이다.
즉, 아무도 아닌, 아무 것도 아닌, 아무 곳도 아닌 그림을, 그것도 역사화의 크기에나 어울릴 법하게 어마하게 큰 그림으로 그려낸 쿠르베는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깨달았던 것 같다. 바로 자기 주변의 사람들을 어떠한 편견이나 차별없이 있는 그대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살아있는 존재로 그리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가 자신의 주변과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 그림들은 자연스럽게 정치적인 논란을 불러왔다. 하지만 그가 세상을 바꾸려는 전복적인 의도로 이러한 그림들을 그렸다고 하기는 어렵다. 단지 어떠한 것을 그려야한다 라든지 그리지 말아야 한다 라는 제한과 구속이 싫었을 뿐이다. 눈에 보이는 대상 중 자신이 그리고 싶은 것을 무엇이든 그리겠다는 생각 자체가 전복적이라면 어쩔 수 없는 것이리라.
쿠르베는 자신이 만들어낸 오해와 소란을 잠재우기 보다는 오히려 허풍스럽게 더욱 부추기는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하곤 했다. 이러한 탓에 그의 존재는 위협적인 동시에 풍자와 놀림의 대상이 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뚝심과 고집만은 대단해서 쿠르베는 어떠한 비난이나 조롱에도 끄떡하지 않고 줄기차게 자신의 길을 밀어부쳐 나갔다.
"나는 어떠한 종류의 제도에도 속하지 않으며 고대의 예술이나 현대의 예술이나 그 무엇에 어떠한 편견도 없다. 나는 단지 그 어떠한 것도 모방하거나 복사하고 싶지 않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안일한 목표를 갖고 싶지도 않다. 나는 단지 전통에 대한 완벽한 습득에 근거하여 나만의 개성을 분별하고 이해하여 독자적으로 발현하고 싶었을 뿐이다.'"
과연 쿠르베는 자신을 얽어매는 어떠한 제도, 제한, 편견에 맞서 끊임없이 싸워나갔고 이러한 과정에서 일어나는 온갖 불협화음을 오히려 즐기기라도 하는 듯 조금도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물론 1855년 유니버설 엑스포지션에 출품되지 못한 자신의 대표작을 포함한 44개의 작품으로 개인 전시를 연 것이 성공은 커녕 실패에 가까웠던 탓에 개인적 손해를 면치는 못했지만 말이다.
그 이후로 쿠르베는 더 이상 어마한 크기의 선언적인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지만 세상의 근원이자 원시성을 느낄 수 있는 순수함으로서 자연과 동물, 생명력이 가득한 날 것 그대로의 여성성 등을 여과없이, 다시 말해서 진실되게 보여주는 그림들을 계속해서 그려나갔다.
그 중에서도 자신의 고향 마을의 숨겨진 곳곳을 찾아다니듯 그려낸 바위, 시내, 나무, 동굴 그림들과 사냥을 하면서 마주한 야생 동물의 은신처나 치열한 먹이 싸움 현장 등을 담아낸 그림들은 대중들에게도 꽤나 인기가 높았다. 쿠르베가 그린 여성들의 누드 또한 당시 은밀한 성적 방종이나 취향을 즐기는 수집가들이 개인 소장용으로 주문하고 모으면서 수요가 꾸준했다. 아카데미에도 계속해서 당선되고 대중에게 인기도 높아지면서 쿠르베는 과연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