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과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권순일 위원장 주재로 위원회의가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열흘 사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발 핵폭탄이 정치권과 교육계를 뒤흔들었다. 선관위는 지난 13일 마땅히 금지해야 할 위성정당을 서류상 창당요건을 갖췄다는 이유로 정당등록을 받아줬다. 반면 마땅히 권장해야 할 초중등학교 모의선거교육은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이유로 지난 6일 전면금지했다. 설마 했던 일들이 모두 현실이 되고 말았다.
선관위의 위성정당 허용 결정으로 미래통합당(옛 자유한국당, 이하 통합당)은 제3당들의 몫에서 최소한 10석 이상 가져갈 수 있을 거라 예상된다. 선관위는 피해자(제3당들)의 피눈물을 못 본 체하고 탐욕스러운 가해자(통합당)의 편을 들었다. 또한 선관위의 모의선거 금지로 말미암아 학내선거교육 활성화에 제동이 걸렸다.
두 사안에서 선관위는 헌법 원칙 대신 형식 문언이나 대중정서를 앞세워 위헌적 실체를 외면하며 정치중립의무를 위배했다. 위성정당등록에선 창당서류 형식심사주의를 내세워 특정 정당의 손을 들어줬고 모의선거금지에선 막연한 정치편향교육 우려(교사 불신 정서)에 편승해 정치 의지를 관철했다. 그럼에도 전문헌법기관이 일단 저질러놓은 일이라서 비판은 쉬워도 결정을 번복하게 하는 건 쉽지 않다.
두 현안에서 선관위가 채택한 입장은 현실의 정치지형에서 통합당과 보수언론이 취해온 입장과 다르지 않다. 엄정한 법적 판단에 따른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이심전심 카르텔이 작동한 결과로 판단된다. 두 사안에서 선관위는 의도적으로 통합당의 호위무사를 자임했다고 의심받아도 할 말이 없다. 문제의 선관위 결정은 워낙 근거가 미약해서 오는 3월에 4인, 내년에 2인 등 선관위원 6인이 교체되고 나면 자체 변경될 가능성이 크다.
정치와 교육 핵심사안에서 통합당 손을 들어준 일차적 배경은 선관위의 인적 구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2년 9개월이 지났지만 선관위는 아직도 박근혜 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4년 3월에 4인, 2015년에 2인, 총 6인의 선관위원이 임명됐다. 그 가운데 민주당 추천 국회 몫 1인을 제외한 5인이 박근혜 대통령, 양승태 대법원장, 새누리당(자유한국당의 전신) 몫이었다. 이들 보수성향 위원들의 6년 임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2018년 1월 취임한 권순일 중앙선관위원장도 보수성향이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2017년 12월에 지명권을 행사했지만 취임 두 달을 갓 넘긴 당시의 대법원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제청한 보수성향 대법관들로 채워져 있었다. 권순일 중앙선관위원장은 대법관 임기가 종료되는 오는 9월까지 자리를 지킨다. 요컨대, 중앙선관위의 인적 구성을 보면 총 9인의 구성원 중에서 6인(위원장과 선관위원 5인)이 검증된 보수성향 인물들이다.
굳이 이런 사실을 들춰내는 이유는, 모든 선관위원은 추천기관의 정치 성향과 상관없이 최고도의 정치 중립성을 요구받는다는 점을 환기하기 위해서다. 선관위원은 추천권자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헌법과 민주주의의 일반원칙에 충실해야 한다. 하지만 이번 사안에서는 선관위원들이 법 원칙을 팽개치고 정치 선호를 앞세우며 법 해석 권력을 남용한 혐의가 아주 짙다.
보수정당-보수언론-보수단체 카르텔
위성정당 창당이 연동형선거제 도입에 맞서기 위한 통합당의 탈법행위 꼼수라면 학교모의선거 반대는 18세 선거연령 하향에 맞서기 위한 통합당의 패배주의적 억지다. 둘 다 해외토픽감이 될 만큼 깨어있는 시민의 비호감도를 높이고 대한민국의 국격을 떨어뜨리지만 통합당은 개의치 않는다. 보수언론이 언제나 통합당의 편을 들며 든든하게 엄호해주기 때문이다.
보수언론은 유독 통합당 행태에 대해서는 민주주의와 법에 따라 시시비비를 가리는 대신 상반되는 찬반 입장에 각각 동일 시간과 지면을 할애하는 기계적 중립에 멈춘다. 결과적으로 보수언론은 위성정당에 대해선 꼼수냐 묘수냐의 성격 규정과 성패 전망이 엇갈린다는 식의 보도 행태로 기정사실화를 도운 반면 모의선거교육에 대해선 교육적으로나 선거법적으로나 문제 제기가 있다는 식의 보도 행태로 정치쟁점화를 도왔다. 정확하게 통합당이 원하는 바였다.
만약 위성정당 사안에서 언론의 반대 기류가 강했다면 아무리 보수 주도 선관위라도 권리남용금지원칙과 탈법행위금지원칙을 저버리고 정당법의 일개 규정에 지나지 않는 창당요건 형식심사주의를 내세워 통합당의 손을 들어주진 못했을 것이다.
모의선거 금지 결정도 다르지 않다. 만약 보수언론이 학교 모의선거를 둘러싸고 진영논리를 따르지 않고 헌법 원칙과 교육 논리를 따랐더라면 아무리 통합당이 반대입장을 내놓아도 선관위가 종전 입장을 뒤집을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선관위는 불과 4개월 전에 학교모의선거 홍보 동영상을 제작해 지난 13일까지도 홈페이지에 버젓이 올려놓고 있었다. 그만큼 학교 모의선거 교육 필요성에 공감하고 그 확대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었다.
선관위원 과반수가 종전입장을 번복하는 무리수를 둘 수 있었던 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됐기 때문이다. 첫째, 보수성향 선관위원들이 보기에 통합당-보수언론-보수단체 카르텔이 우군으로 작동하는 게 분명했다. 둘째, 이들이 보기에 외부의 방해꾼이나 저항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특히 교육부 장관과 교육감협의회, 교육법학회와 교육학회 등 유력한 이해관계자들이 공식적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이만하면 선관위원들이 움직이기 딱 좋은 외부환경이 만들어진 셈이었다.
만약 교육부 장관이나 교육감협의회가 '모의선거 교육은 참정권 교육이지 선거운동이 아니며 우리가 알아서 정치편향교육이 되지 않도록 책임 지도할 테니 선관위는 이 사안에서 손 떼라'는 공식 입장을 선관위에 보냈다면 과연 모의선거교육을 전면금지하는 무리수를 둘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그러나 교육부 장관과 교육감협의회는 이 사안에 대해 지금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외부에 잠재 우군이 움직이고 있는 반면 잠재 적군은 전혀 안 보이는 상황이었다.
모의선거와 관련된 선관위의 입장 돌변은 개정선거법으로 18세 유권자가 50만 명 넘게 생겨나고 그중 고교생이 14만 명이 된다는 새로운 사태를 배경으로 한다. 18세 선거연령 하향조정을 일관되게 반대해온 통합당은 18세 학생유권자들 탓에 '교실의 정치판화'가 우려된다며 교내선거운동 및 교내정치활동 금지법안을 제출했다. 동시에 서울의 전·현직 진보 교육감이 협력해서 추진해온 학교 모의선거 교육을 진보편향교육으로 낙인찍는 일에 나섰다. 선거교육과 모의투표를 빙자해서 진보편향 정치교육이 이뤄질까 염려된다는 것이었다.
통합당이 모의선거교육을 진보교육감표 정치편향교육으로 낙인찍으며 반대 기조를 잡자 보수언론이 뒤질세라 정치편향교육 프레임을 확산하며 나섰다. 곧바로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와 보수단체들이 얼씨구나 춤을 췄다. 선관위가 별다른 여론부담도 느끼지 않고 전격적으로 금지 결정을 내린 배경이다. 요컨대 학교모의선거 사안과 관련해서도 통합당이 정치적 이해관계를 앞세워 먼저 반대 나팔을 불면 보수언론이 함께 피리를 불고 이에 따라 국민 여론과 국가결정이 춤추는 정치여론화 패턴이 관철됐다.
위성정당 목적은 법 면탈과 부당이득
통합당이 미래한국당을 뚝딱 만들어낸 이유는 개정선거법의 연동형 의석 배분을 면탈하고 군소정당 몫으로 설계된 연동비례의석을 가로채기 위해서다. 이는 전형적인 탈법행위에 해당한다. 겉으로는 창당행위에 해당해서 설립 자유에 속하는 합법 행위이지만 속으로는 부당의석을 취하기 위한 개정선거법 면탈행위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탈법행위를 할 권리는 없다. 위장전입, 위장이혼, 위장폐업, 위장계열사 등 탈법행위를 은밀하게 하는 이유다.
얼핏 보기에는 정당한 권리행사처럼 보여도 그 목적이 법 면탈과 부당이득에 있다면 반드시 권리남용이 돼 금지된다. 통합당의 위성정당 창당도 마찬가지다. 미래한국당은 탈법행위의 수단이자 권리남용의 산물로서 법의 제국에는 그의 자리가 없다. 그 창당 과정과 운영행태가 이 사실을 웅변한다.
한번 생각해보자. 개인이 자녀를 좋은 학교에 넣을 목적으로 한 위장전입도 최고 3년 징역형까지 처벌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의석(주권)을 도둑질할 목적으로 추진된 공당의 위장 창당은 얼마나 큰 제재를 받아야 마땅할까? 통합당의 위장 창당은 공공연하게 진행된 공개적 탈법행위다. 위장전입과 같은 개인의 탈법행위가 아니라 공당의 탈법행위다.
통합당은 집권당 경험이 풍부한 제1야당이다. 그러나 통합당은 '악법'이라고 주장하는 개정선거법이 제공하는 부당이득을 노리고 서류상 위성정당을 만들어냈다. 공당의 공공연한 탈법행위는 개인의 위장전입과는 비할 바 없이 죄질이 무겁고 나쁘다. 물론 이런 역대급 탈법행위를 수용한 선관위는 더 죄질이 무겁고 나쁘다.
모의선거교육 금지 대신 정치편향선거교육 예방지침 주었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