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중반 유럽에 수출되었던 명나라 화병. 그림 내용은 수호지 장면 중의 하나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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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때 새로운 변수가 생겼다. 중국이 정치적 격변에 휘말린 것이다. 신종 만력제 사후 명나라는 안으로 가뭄과 학정으로 인해 내란이 발생했고, 밖으로는 여진족의 발흥으로 외변이 잦아졌다. 1639년 이자성의 난, 1644년 청나라 북경 입성, 1673년 삼번의 난 등으로 이어지는 혼란으로 사회는 피폐해지고 생산력은 극도로 침체됐다.
도자기라고 이를 피해 갈 수 없었다. 생산량이 급격히 줄었다. 특히 양자강 이남이 주전장(主戰場)이 된 삼번의 난 때는 자기 생산의 메카인 경덕진(景德鎭)이 초토화되다시피 했다. 당시 네덜란드가 중국 무역의 근거지로 삼고 있었던 곳은 포르투갈을 밀어내고 차지한 타이완이었다. 그러나 멸청복명(滅淸復明)의 기치를 내걸고 봉기한 정성공(鄭成功, 1624~1662) 세력이 타이완으로 밀려들어 왔다. 전투에 패한 네덜란드는 타이완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일본 자기의 등장
이런저런 사정으로 중국 자기 구입이 원활치 못하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중국 자기를 대체할 수 있는 대용품을 찾았다. 그러다가 일본이 눈에 띄었다. 마르코폴로가 황금의 나라라고 칭한 곳.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일본에서 은을 가져오는 것에 혈안이 됐지만, 네덜란드는 자기에 초점을 맞추었다.
포르투갈은 일본을 포교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네덜란드는 오로지 상행위만 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이렇게 해서 네덜란드는 막부(幕府)와 번주(藩主, 다이묘)로부터 자기 교역을 허락받았다.
일본은 임진왜란 때 끌고 온 조선 도공의 기술 전수로 자기 생산이 막 개화할 즈음였다. 임진왜란 전까지 일본은 자기를 생산하지 못했다. 기술적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자기를 생산하는 곳은 전 세계에 중국과 조선밖에 없었다. 일본을 통일해 전국시대에 마침표를 찍은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팽배해 있는 전쟁문화를 순치할 요령으로 다도(茶道)를 유행시킨다.
다도를 즐기기 위해선 다기가 필요한데 다도의 원조이자 거성인 센리큐(千利休)는 중국 자기는 너무 비싸니 조선의 자기를 추천한다. 지방 영주(다이묘)이자 무장들은 새로운 시대적 흐름에 편승하고 문화적 교양인으로 치장하기 위해 너도나도 자기를 구입해 다도에 입문했다.
함께 모여 차를 마시고 다완(茶碗)을 감상하는 다회(茶會)는 칼이 아닌 차로 대결하는 또 다른 정치 공간이었다. 고급 다완을 원하는 다이묘 때문에 자기 값이 천정부지로 솟았다. 이러니 조선에 출병하자마자 도공을 찾는 데 혈안이 될 수밖에 없었다.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전쟁이 흐지부지 되자 다이묘들은 조선에서 퇴각하면서 닥치는 대로 도공을 잡아갔다.
큐슈 사가현의 아리타는 조선 도공 출신 이삼평(李參平)이 일본 자기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는 곳이다. 이곳 아리타에서 생산한 자기를 네덜란드 상선들이 주로 수입했는데 자기를 선적하는 항구가 이마리(伊萬里)여서 네덜란드 사람들은 '이마리 자기'라고 불렀다. 이마리 자기 역시 중국 자기 이상으로 네덜란드에서 인기를 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