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이순자 구속수사 촉구 범국민서명운동을 벌어는 민청련 민중신문팀. 맨 왼쪽 이범영, 그 옆은 홍용기, 김택수.
민청련동지회
대중을 향한 교육, 청년학교 한편 민청련 각 지역지부와 중앙이 나름의 활동을 펴는 가운데 드러나지 않은 조직에서 움직이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정책실이었다. 정책실은 중앙위원회를 보좌하는 기관으로 실장 이승환을 비롯해 한홍구, 노동진, 김종민 등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은 9차 총회 이후 민청련의 활동방침으로 결정된 '청년대중운동으로의 전환'을 정책실이라는 기능 속에서 고민하던 중, 청년대중에 대한 교육사업에 착안했다. 이를 위해 10차 총회에서는 교육위원회라는 기구를 신설했고, 이 기구에서 '청년학교준비위원회'를 꾸려 사업구상을 펼쳐나갔다.
민청련에서는 이전에도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이 꾸준히 진행돼 왔다. 하지만 그것은 대개 학생운동 출신자들을 위한 것으로, 내용이 '한국사회구성체 논쟁'이라든가 '여러 투쟁 노선의 차이점에 대한 분석'과 같은 것들이어서 일반인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일종의 '엘리트 교육'이었던 셈이다.
청년학교를 구상한 이들은 기존의 교육과는 다르게 '청년대중운동론'에 따라 일반 청년들, 특히 대학을 나오지 않은 보통의 '일하는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을 구상했다. 대개 중등교육과정에서 배운 우리 사회와 역사에 관한 지식들은 정권이 의도하는 바에 따라 과거와 현실를 미화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 청년학교는 그러한 제도권 교육이 심어준 거짓의 껍데기를 부수고 "우리 민족사회의 역사적 성격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것을 목표"로 삼았다.
준비를 마친 위원들은 1988년 7월 19일, 서울 서대문 충정로에 마련한 강의 공간에서 제1기 청년학교를 개강했다. 교장은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김진균이 맡았고, 이승환, 한홍구, 박기목, 윤석연 등이 간사로 운영을 맡았다.
강의는 매주 수, 금요일 2회씩 총 16강으로 구성됐다. 강의 주제는 첫 강의 '세계관'으로 시작해 자주, 민주, 통일, 한국경제의 구조, 80년대 운동, 애국과 매국의 역사 등이 전반기 강의였고, 이어서 후반기 강의로 사회참여와 운동, 노동운동, 청년운동, 문화운동, 주민운동 등이 이어졌다. 강의 제목만으로는 기존 교육과 차별이 없어 보이지만 실제 강의는 철저하게 일반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진행됐다.
강사로는 소설가 김영현, 노동운동가 장명국 등이 참여했고 민청련 선배 활동가로 김희택, 연성수, 권형택, 김희상, 현역 간부로 의장 김성환과 청년학교 측 한홍구가 직접 참여했다. 1기 강의에 참여한 학생은 70여 명으로 다른 지역지부 활동에 비해 규모가 컸다. 직업별 비중을 보면, 사무직 노동자와 대학생이 각 35% 정도로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