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예린이 당시 사건을 회상하고 있다.
김성인
거짓말이라 믿고 싶었던 그 날전남 보성에서 보낸 2박 3일 학술답사의 마지막 밤이 지났다. 아침 7시에야 술자리도 파장에 이르렀다. 건국대학교 철학과 집행부원이었던 예린(당시 21살)은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거실엔 최후의 다섯 명이 남았다. 예린, 친한 남자 동기, 고학번 남자 선배 A, 그리고 옆 호실에서 놀러 온 언니 두 명. 감겨오는 눈을 못 이긴 남자 동기는 그 자리에 누워 잠이 들었다.
'지금 방문 열면 다 깰 텐데, 거실에서 딱 두 시간만 눈 붙여야겠다.'예린도 친한 남자 동기 옆에 대충 자리를 잡고 몸을 뉘었다. 그때까지도 언니들과 남자 선배 A는 술을 곁들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선잠이 들었다. 두어 시간이 지났을 무렵, 잠결에 목 아래로 팔이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누군지 참 정신없이 자나 보다' 싶은 순간 팔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옆으로 누운 예린의 뒤에서 팔베개하듯 자리 잡은 누군가의 손이 점점 가슴 쪽으로 내려왔다.
순간 잠이 확 깼다. 떨리는 마음을 다잡고 예린은 눈을 떴다. 앞에서 곤히 자고 있는 남자 동기 녀석의 뒷통수가 보였다. 옆 호실에서 놀러 온 언니 두 명은 각자의 호실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예린이 학술 답사에서 처음 본 고학번 남자 선배 A, 그밖에 없었다. 소리를 질렀다간 맞을 것만 같았다.
앞에서 자고 있던 동기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봤지만, 미동도 없었다. 그사이 A의 손은 상의 안으로 들어와 맨 가슴을 더듬었다. 예린은 몸을 뒤척이며 벗어나려 했지만, 그에게 먹히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손이 이내 팬티 속으로 들어왔다. 예린은 소스라치며 벌떡 일어났다.
그때, 현관문이 열렸다.
"다들 아침 먹으러 가요."꿈이라 믿고 싶었던 순간, 이상하리만치 일상적인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선배도 아침 먹으러 가요."예린은 침착하게 가해자에게 말했다. 불과 몇 초 전 자신을 추행했던 그였다. 일단 사람이 많은 곳으로 데리고 가, 그 사람의 손발을 묶어두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예린과 남자 선배 A는 친구들 사이에 휩쓸려 1층 식당으로 내려갔다.
예린은 학우들과 둘러앉아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는 A의 모습을 보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도망치듯 자리를 뛰쳐나와 집행부실로 향했다.
복도에 서 있던 집행부 친구들의 얼굴을 본 순간, 그녀는 다리가 확 풀렸다. 그제야 눈물이 쏟아졌다. 무서웠다고, 너무 무서웠다고, 그 말만 반복했다.
2017년 4월 1일 만우절 아침, 거짓말이라 믿고 싶던 그날이었다.
고통의 대가는 터무니 없었다함께 학술답사를 갔던 철학과 교수단 다섯 명은 모두 모여 가해자를 소환했다. 당황한 가해자는 자신의 성추행 행위를 전부 인정했다. 하지만 단서를 덧붙였다. 피해자도 원했노라고, 잠에서 깨 알면서도 저항하지 않았다고, 자신은 술에 취해 실수로 그런 거라고. 가해자의 모든 발언은 6분 남짓한 녹음 파일에 또렷이 담겼다.
예린은 자신이 원하는 건 가해자의 퇴학이라는 의사를 교수단에 표했다. 다시는 그를 학교에서 보고 싶지 않았다. 교수단은 학칙에 맞춰 가해자의 처벌을 고려하겠다고 약속했다. 학교 차원의 처분이 내려질 때까지 가해자는 수업에 나오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
사건 당일 저녁 8시,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예린은 경찰서로 향했다. 추행 수위가 유사강간에 가깝다는 주변의 조언에 그녀는 고소를 결심했다.
하지만 경찰은 "음부를 건드렸다 해도 질 속에 손이 들어가지 않으면 형법상 유사강간이 될 수 없다" 말했다. 예린의 예상과 달리 준강제추행으로 수사가 진행됐다. 피해자 측 변호사도 처벌은 300만 원~500만 원 상당의 벌금형에 그칠 거라 조언했다. 예린은 믿을 수 없었다.
형법 제297조의2(유사강간)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에 대하여 구강, 항문 등 신체(성기는 제외한다)의 내부에 성기를 넣거나 성기, 항문에 손가락 등 신체(성기는 제외한다)의 일부 또는 도구를 넣는 행위를 한 사람은 2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형법 제298조(강제추행)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에 대하여 추행을 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형법 제299조(준강간,준강제추행) 사람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를 이용하여 간음 또는 추행한 자는 제297조, 제297조의2, 및 제 298조의 예에 의한다.
유사강간의 경우 2년 이상의 형기가 정해져 있지만, 강제추행은 폭행, 협박, 추행의 정도에 따라 징역 또는 벌금형에 처한다.
학교를 도망쳐 나온 건 피해자였다학술 답사 이후 예린의 첫 수업에서였다.
"OOO(A의 이름)?"대답이 없었다. 그날 일을 미처 전해 듣지 못한 강사에겐 그저 결석생의 이름이었다. 그러나 그 이름은 예린을 다시 며칠 전 그날로 데려갔다.
괜찮을 줄 알았다. 징계 처분을 기다리는 가해자는 학교에 나올 수 없으니까, 마주칠 일만 없으면 상관없다 생각했다.
하지만 강의실에 들어서면, 아니 학교 근처에만 오면 몸이 아팠다. 뱃속에서 수백 마리 나비들이 한 번에 날갯짓하는 듯한 느낌에 구역질이 올라왔다. 일주일 만에 예린은 휴학을 결정했다.
한동안은 집에만 있었다. 술과 수면유도제에 의지한 채 잠드는 날이 잦았다. 예린이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을 내렸다.
하루에 한 두시간이라도 자는 날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겨우 잠에 들어도 이불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놀라 눈이 떠졌다. 엄마는 집에 틀어박힌 예린만 보면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물만 쏟아냈다.